『조선, 철학의 왕국』
호락논쟁은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낯선 주제다. 최소한 고등학교 한국사 시간에 졸지 않은 사람이라면, 조선 전기와 후기에 사단칠정논쟁과 예송논쟁이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호락논쟁은 앞의 두 논쟁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논쟁으로 꼽힘에도 그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나 역시 재수 시절 풀었던 국어 모의고사 지문을 통해 처음으로 호락논쟁을 접했다.
사실 세 논쟁 중 가장 이해하기 쉬운 건 의외로 호락논쟁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단칠정논쟁과 예송논쟁의 경우, 막상 조금이라도 깊게 들어가는 순간 깎아지른 듯 솟아오른 절벽을 맞이하게 된다. 역사와 철학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상태에서 사단과 칠정이 리(理)와 기(氣) 중 어디에 속하는지, 계모인 자의대비는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전개된 치열한 논쟁을 접한다면 누구라도 얼이 빠질 것이다.
반면 호락논쟁이란 거칠게 말해 인간과 동물,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의 본성이 같은지 다른지를 두고 벌어졌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머리에 팍 들어온다. 뿐만 아니라 호락논쟁의 당사자들이 부딪혔던 쟁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고민거리이기에, 비교적 쉽게 공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지금껏 호락논쟁이 대중에게 이토록 홀대받았던 이유는, 다른 두 논쟁과 달리 논쟁 ‘바깥의’ 이야깃거리가 그다지 풍부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사단칠정논쟁은 젊고 야심찬 기대승의 도발에 나이든 대학자 이황이 보인 진지하고 겸손한 태도로 두고두고 회자되며, 조선 전기의 건강한 학문적 분위기를 상징하는 논쟁으로 기억된다. 예송논쟁 역시 그 쓸모없음을 조롱하건, 조선후기 공론정치의 성숙에 감탄하건 간에 어쨌든 이야깃거리가 차고 넘친다. 이와 달리 호락논쟁은 소위 ‘임팩트’ 있는 사건이 없어서인지 그간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한 듯하다.
요컨대 누구나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또 그 문제의식에 공감할 수 있지만, 이야깃거리가 상대적으로 풍부하지 않다는 점이 호락논쟁을 21세기 한국인의 삶으로 끌고 들어오기 어렵게 만드는 문제였던 것이다. 『조선, 철학의 왕국』(이하 『철학의 왕국』)은 ‘이야기’라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이러한 어려움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대범함을 보여준다.
저자 이경구는 호락논쟁의 쟁점들을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가기보다는 이를 두고 벌어진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논쟁의 당사자인 한성의 낙론과 충청의 호론, 논쟁을 중재해야 했던 영조와 정조, 논쟁 바깥에 비켜서서 이를 객관적으로 관찰했던 남인과 소론 등 ‘호락논쟁’을 키워드로 다양하게 뻗어나가는 이야기를 읽다보면 어느새 조선후기 사상사의 전체상이 들어온다. 단순히 글이 좋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너무나 단정하고 아름다워 탐이 날 지경인 저자의 문장 역시 독자로서 누리는 과분한 호사이자 즐거움이다.
이처럼 술술 읽히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철학의 왕국』의 가장 큰 매력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철학의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성리학이란 무엇이며, 호락논쟁은 무엇을 두고 벌어졌는가를 서술한 2장이라 생각한다. 누구나 그 이름만 들어도 머리를 싸매는 성리학(!!)을 알기 쉽게 정리해 놓았을 뿐 아니라, 이쪽 분야의 책으로는 퍽 이례적으로 주자학의 양면성을 제대로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땅에 무려 500년 넘게 뿌리를 내려온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이었던지라, 나를 비롯한 많은 한국인들은 주자학을 평정심을 갖고 차분히 바라보지 못한다. 학자들 역시 다르지 않은지라, 자신이 생각하는 조선이 “오래된 미래”냐 “북한의 조상”이냐에 따라 주자학에 대한 평가가 널을 뛰곤 한다. 하지만 사람이란 모름지기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인데, 주희 선생이 아무리 꼼꼼하고 똑 부러진다 한들 우리와 얼마나 다르겠는가!!
콩알만 했을 때부터 저 하늘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 했다던 조숙한 소년 주희는 불교와 도교의 도전에 맞서 송대 유학을 집대성하고, 하나의 체계를 세운 위대한 사상가였다. 그는 리(理)의 보편성을 근거로 만인의 성인됨을 옹호했는데, 김상준이나 미야지마 히로시는 이를 근거로 주자학에 근대성의 맹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동시에 주자는 기(氣)의 차별성을 내세워 금수와 이민족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그는 여진족의 금에게 중원을 빼앗겼다는 열패감에 시달리던 남송의 한족 이데올로그이기도 했던 것이다. 주자학은 중화와 야만, 성인과 범인을 구별 짓고 차별하는 이데올로기라고 여기는 계승범의 경우 바로 이러한 차별적 성격을 강조한 것이리라.
요컨대 주희는 김상준과 미야지마 히로시 식으로도, 계승범 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지금의 우리가 그렇듯이 상당히 다면적인 인물이다. 그가 집대성한 주자학 역시 아무리 체계적이라 한들 평등과 차별의 양 측면을 모두 갖고 있고 말이다. 호락논쟁이란 결국 주자 자신보다도 주자를 완벽히 이해하고자 했던 조선의 유자들이, 주자학의 어느 한 측면에 주목하여 이를 정밀하게 다듬어가는 과정에서 불거진 대립인 것이다.
조선 최대의 이데올로그였던 송시열의 제자들은 만물의 본성에 대한 문제를 두고 분화를 시작했다. 충청도의 권상하를 중심으로 단단히 결집한 호론은 인간과 동물, 성인과 범인의 본성이 다르다며 차별을 정당화했다. 한성의 김창협을 중심으로 느슨한 네트워크를 형성한 낙론은 만물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며 평등을 주창했다. 호론과 낙론이 벌인 치열한 논쟁은 굉장히 흥미진진하며, 진리를 향한 그들의 열정과 노력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특히 낙론을 부흥시킨 김원행과 그 제자들이 속세와 거리를 두고 마치 종교인처럼 몸과 마음을 갈고닦는 모습은, 세속주의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우리 근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허나 시간이 흐르며 호락논쟁은 초기의 역동성과 건강함을 잃고 논쟁만을 위한 논쟁, 아니 극단적으로 말해 상대방을 파멸시키기 위한 정쟁으로 변질되고 만다. 글을 읽어가며 이들이 과연 얼마만큼 실제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자신들의 사유를 전개해가고 있는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애초에 호론과 낙론 모두가 사상적 지반으로 삼고 있던 주자학이 가장 강조했던 게 다름 아닌 “경전 공부”였음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논쟁이 주자를 들어 주자를 비판하는 공리공론으로 흐르는 건 어쩌면 예정된 파국인 것이다.
물론 저자는 이러한 독자의 반응을 예상한 듯 5장의 한 챕터를 할애해 당시 조선이 이전과는 다른 흐름 속에 놓여 있었고, 호론과 낙론 역시 이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건 저자의 문제가 아니라 호락논쟁 자체의 문제이며 동시에 조선이란 국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철학의 왕국』이라는 제목을 처음 접하자마자 떠올랐던 건, 조선은 고도의 관념국가였다는 이영훈의 일갈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철학의 왕국’과 ‘관념국가’ 사이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던 나의 조선상은, 6장에 이르러 결국 후자로 기울고 말았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 아마 누구라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요컨대 호락논쟁의 당사자들이 인식하고 있던 “사회”란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사회란 말이 풍기는 근대의 냄새가 영 어색하다면, 생활세계 정도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당시 조선 유자들에게 사회란 지리적으로는 궁궐 혹은 넓게 잡아 사대문 안이고, 인적으로는 같은 양반에 국한되는 왜소하고 폐쇄적인 공동체였으리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최근 한국에서 가장 핫한(!) 지식인인 김영민은 얼마 전 『일본비평』에 통념과 달리 조선은 중앙정부와 사회가 모두 약한 국가였다는 문제적인 논문을 개제한 바 있다. 그의 냉정한 분석은 적어도 내겐 꽤 타당하다고 느껴진다. 한성의 중앙정부에서 활동하던 호락논쟁의 당사자들은 궁궐 바깥의 사회를 이해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 형식화·교조화된 호락논쟁은 파국으로 치달았고, 이와 더불어 철학의 왕국 조선 역시 황혼을 맞이한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김종필은 2004년 총선에 출마하며 해는 지더라도 서쪽하늘을 붉게 물들인다는 말을 남겼다. 노회한 정치인이 자신의 욕심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수사에 불과하지만, 조선의 19세기는 이 멋들어진 말이 꽤 어울리는 시대가 아니었나 싶다. 호락논쟁이라는 해는 저물었지만, 그 붉은 빛이 주변으로 널리 퍼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의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성리학을 다룬 2장이라면, 19세기의 변화를 다룬 7장은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중앙 유자들의 논쟁은 활력을 잃었지만, 이 시기에 이르면 오히려 유학이 민간으로 널리 전파되어 집마다 학설을, 사람마다 의견을 내세우는 수준에 도달한다. 19세기란 결국 이와 같은 “인민의 유교화”가 진행되는 시기였던 것이다.
최근 학계에서는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착실히(?) 이루어진 전 사회의 유교화가 이후 한국의 근대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밝히려는 연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물론 주자학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유교화에 대한 평가 역시 극과 극으로 갈린다. 혹자는 인민의 유교화란 사실상 가족 단위의 신분상승에 몰두하는 “온 나라 양반되기”에 불과했다고 단정한다. 이로부터 비롯된 한국의 근대는 결국 혈족공동체의 지원을 받은 개인들이 중앙을 향해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의 사회”였으며, 그 에토스는 “연대 없는 평등주의”였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반면 인민의 유교화를 만인이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갖추고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군자”가 되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입장도 있다. 이들에 따르면 식민지시기의 독립운동과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건 다름 아닌 “군자들의 행진”이었다.
저자는 19세기 인민의 유교화가 결국 한국의 근대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주제가 호락논쟁인 만큼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리라. 저자가 여백으로 남겨놓은 부분을 채워가는 건 독자인 우리들의 몫이다. 물론 저자에게 바라는 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작년에 한국어로 번역되어 잔잔한 파장을 몰고 온 와타나베 히로시의 『일본정치사상사』와 같은 훌륭한 통사를 저자가 써주었으면 한다. 물론 길고 지난한 과정이 되겠지만 『철학의 왕국』을 주춧돌로 삼는다면 아예 불가능한 작업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