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찬근 Apr 09. 2019

교양서여, 독자와 ‘맞짱’을 떠라!!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

  “한국어로 쓰인 좋은 교양서가 없다!!” 어쩔 수 없는 한국어 화자이자 중증의 활자중독자인 내가 한국 출판계에 갖는 불만 중 하나다. 의외일 수도 있겠지만, 한국어로 된 좋은 학술서는 사실 적지 않다. 생각해보라. 한국에 대학이 몇 개고 연구자가 몇 명인데, 이들이 쓴 박사논문 중에 건질 만 한 게 없겠는가? 심지어 훌륭한 연구자와 명민한 출판사가 만나면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만 잘 엮어도 훌륭한 학술서 하나를 뚝딱 만들어낸다. 

 반면 교양서의 경우는, 안타깝지만 좋은 책을 찾기 쉽지 않다. 어쩌면 당연하다. 교양서가 학술서보다 쓰는데 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같은 ‘선수들’ 사이에서 읽히는 걸 전제로 하는 학술서와 달리 교양서의 독자는 말 그대로 ‘교양시민’, 그러니깐 새로운 지식과 깨달음에 목말라 있는 일반인이다. 이들 ‘교양시민’에게 지식의 첨단을 요령 있게 소개해야 할 뿐 아니라, 보다 깊은 공부로 나아갈 수 있게끔 신선한 자극을 주는 일이 교양서 저자의 의무다. 아, 간결하고 우아한 문장도 빠질 수 없다. 그러니까 좋은 교양서 쓰기란 무지하게 어려운 일인 것이다. 

 이 어려운 일을 보란 듯이(?) 해내는 강양구 기자님이 최근 또 한 권의 훌륭한 교양서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을 내셨다. 그런데 이 책, 조금 이상하다. 우선 새빨간 표지부터 뭔가 불온한(!) 기운이 물씬 풍긴다. 내용은 더 자극적이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과연 제대로 작동하는지, 미세먼지가 정말 중국 탓인지, 시골이 도시보다 친환경적인지 등,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겨온 통념에 거침없는 질문을 던진다. 

 좋다, 여기까진 참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책, 이런 수상한 질문들을 꺼내고 있는 걸로도 모자라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며 자기 생각을 밝히는데 거리낌이 없다. 아니 이게 교양서, 그것도 고등학생을 상대로 쓴 글(《고교독서평설》)에서 가당키나 한 일인가? 본디 교양서의 ‘사명’이란 지식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전달이 아니던가! 혹시 저자가 교양서의 이름을 빌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고등학생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주입하려는 건 아닐까? 

 이에 대한 내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지식의 전달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수업평가에서 학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얘기 중 하나가 “선생님이 정치적으로 편향된 내용을 가르쳐요”인 것만 봐도 우리가 얼마나 ‘객관’과 ‘중립’을 신봉하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과연 ‘객관’과 ‘중립’이 가능할까?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특수’하고 ‘편향’된 입장에 불과하다. 이를 숨기고 자신만이 ‘객관’이고 ‘중립’이니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라는 태도야말로 오히려 내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오만이며, 다양한 생각을 억누르는 폭력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남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만큼 순진무구하지도 않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선생님이 ‘정치적’이라는 불만이 그렇게나 많이 터져 나오는 모습은, 학생들이 선생님의 생각에 전혀 ‘감화’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히려 교사의 ‘편향된’ 주장은, 그간 막연한 느낌으로만 존재했던 학생들의 생각을 보다 단단히 영글게 하는 촉매의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요컨대, 가르치는 쪽이 말을 ‘쎄게’ 할수록 배우는 쪽에게 도움이 된다. 

 저자가 “우물쭈물 얼버무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7p.)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으로 대충 글을 마무리 짓지 않는다. 대신 온갖 흥미진진한 주제들을 풀어놓고는 “난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는 어때?”라며 독자에게 질문을 건넨다. 전지전능한 선생님의 자리에서 내려와, 독자와 눈을 맞춘 채 스파링이나 한 판 뛰자며 주먹을 쥐어 보이는 저자라니! 없던 호기심도 절로 생기지 않을까?

 물론 저자와 독자의 ‘체급 차’는 굉장히 큰지라, 아무 것도 없이 ‘맞짱’을 뜬다면 어느 쪽이 질 지는 너무나 뻔하다. 따라서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은 상세하고 친절하게 배경지식을 설명해 줌으로써 둘 사이의 ‘밸런스’를 맞춘다. 특히 각 챕터 끝부분에 더 읽어보면 좋을 책들을 소개한 <확장해서 읽기>는 저자의 꼼꼼함과 배려심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비단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책 뿐 아니라, 이와 반대되는 책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위험한’ 선거에 반대한다」에서 저자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비판하며 제비뽑기 민주주의를 대안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대의제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샤츠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출판사는 무려 후마니타스다!!) 역시 <확장해서 읽기>에 들어가 있다. 마찬가지로 「‘집단 지성’인가, ‘집단 바보’인가」는 ‘우리’가 ‘나’보다 멍청한 판단을 내릴 위험을 경고하는 글이지만, 저자는 집단 지성의 가능성을 긍정한 『대중의 지혜』도 친절하게 소개해놓았다. 판을 깔아줄 테니 제대로 ‘맞짱’ 한 번 떠보자는 저자의 진심이 느껴진달까?

 이처럼 독자들을 향해 도발적인 물음을 던지기를 마다하지 않는 저자가 바라는 건 “더 많은 ‘수상한 질문’과 ‘위험한 생각’이 넘쳐 나는”(8p.) 세상이다. 우리 몸 속 약 39조 마리에 달하는 세균들은 저마다 중요한 면역 기능을 담당하는 ‘공생자’라고 한다.(「요구르트의 꿈, 김치의 꿈, 유산균의 꿈」) 마찬가지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상한 질문’과 ‘위험한 생각’이야말로 세상을 보다 건강하고, 활기차고, 흥미진진하게 만들어주는 세균들일 것이다. 

 ‘수상한 질문’과 ‘위험한 생각’을 온 세상에 퍼뜨리는 매개체로서는 뭐니 뭐니 해도 책만 한 게 없다. 저자가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챕터 역시 책을 향한 저자의 뜨거운 애정이 느껴지는 <들어가며>였다. 『사자와 마녀와 옷장』을 읽으며 책 읽는 재미를 깨달았다는 저자의 경험담에선 치과진료를 기다리며 흑백판 『먼나라 이웃나라』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겹쳐 보여 조금 뭉클하기도 했다. 

 물론 세상은 우리 같은 독서 중독자들에게 그리 녹록하지 않다. 저자가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지적했듯 몇몇 ‘셀럽’들의 책이 베스트셀러를 독점하는 쏠림 현상이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새롭고 참신한 책들이 담고 있는 ‘수상한 질문’과 ‘위험한 생각’은 ‘셀럽’들의 책에 가로막혀 독자에게 채 가닿지도 못한다. 저자는 책 동네의 역동성이 사라져가는 이러한 현실에 우려를 금치 못하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는다. “지하 토굴에서 비밀 회합을 이어가던 초기 기독교가 화려하게 부상해서 세상을 점령했듯이 책 읽는 사람들 사이의 느슨한 연결이 쌓이고 쌓여서 책읽기가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감을 과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글쎄, 나는 저자가 올린 게시물을 읽고 책 읽는 사람의 지위가 로마제국의 가혹한 박해를 받아 숨어 지내던 기독교도에 비견될 정도로 추락했구나 싶어 조금 우울하긴 했다. (공교롭게도 오늘 도서관 서가에서 뽑아든 책의 제목은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이다.) 그래도 “다른 어떤 수단보다도 넓고 깊은 경험”을(6p.)을 선사하는 독서의 가치와 즐거움을 굳게 믿는 사람으로서, 나는 책이라는 숙주를 거쳐 온 세상에 ‘수상한 질문’과 ‘위험한 생각’들이 우글거리기를 꿈꾼다.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이 질문하기를 가르치지 않는 사회, 책 읽지 않는 시대에 자그마한 균열을 낼 수 있는 짱돌이 되었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저물어간 철학의 왕국에서 무엇을 취하고 버릴 것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