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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Apr 09. 2019

현란한 모델의 설명력, 탄탄한 실증의 묵직함

『판문점 체제의 기원』과『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설 연휴에 두 권의 좋은 책을 읽었다. 김학재의 『판문점 체제의 기원』(이하 『판문점』), 그리고 후지이 다케시의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이하 『사이』). 같은 시기를 다루고 있고, 저자들 사이에도 친분이 있는듯하지만 두 책의 분위기는 상당히 다르다.     

김학재의 『판문점 체제의 기원』

 『판문점』은, 내가 이 책을 처음 접한 <프레시안> 서평에서 이야기하고 있듯 ‘새로운 선을 긋는 연구’다. 저자 김학재는 그간 한국전쟁 연구가 ‘기원’의 규명, 거칠게 말해 북침인지 남침인지에 지나치게 쏠려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가 주목하는 건 ‘전쟁’이 아닌 ‘평화’다. 한국전쟁은 자유주의에 기초한 여러 평화기획이 충돌했던 최전선이자, 일종의 거대한 실험실이었다.

 『판문점』은 서구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끌어와 일방적으로 한국의 사례에 적용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판문점』은 한국전쟁이라는 ‘특수한’ 사건으로부터 평화를 이해하는 ‘보편적인’ 모델을 이끌어낸다. 최장집, 박명림 등 저명한 정치학자들이 『판문점』에 보내는 찬사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내가 가장 감탄했던 건 저자가 제시한 자유주의 평화기획의 두 모델인 ‘홉스적 평화’와 ‘칸트적 평화’가 갖는 엄청난 설명력이었다. 세상을 이해하는 그럴싸한 모델을 만들어낸 책들은 의외로 적지 않다. 중요한 건 그 모델로 저자가 다루는 대상을 얼마나 제대로 설명해낼 수 있는가이다. 아무리 화려하고 정교한 모델을 꺼내든다 해도, 설명력이 떨어지면 외려 그 어색함만 선명히 부각될 뿐이다. 심지어는 엄연한 ‘팩트’를 교묘히 왜곡하여 자신이 만든 모델에 끼워 맞추는 경우도 왕왕 있다. 

 하지만 『판문점』의 경우, ‘홉스적 평화’와 ‘칸트적 평화’라는 모델 자체가 굉장히 신박하기도 하거니와 이 모델로 한국전쟁을 아주 깔끔하게 설명해냈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애초에 두 모델이 먼저 만들어지고 이에 맞게 한국전쟁이 설계된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떻게 공부를 하면 이렇게 무시무시한(!)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저 부럽고 궁금할 따름이다. 

 『판문점』은 2016년,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저명한 학술상인 월봉저작상을 수상했다. 나로서는 『한국경제사Ⅰ』(2017),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2018)에 이어 세 번째로 펼쳐든 월봉저작상 수상작인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2012년 수상작인 『번역과 번안의 시대』도 빌려놓았는데, 월봉저작상에 대한 무한신뢰(?)가 생겨버린지라 기대가 엄청나게 커져버렸다. 이제 두 달 정도 지나면 2019년 월봉저작상 수상작도 공개될 것이다. 올해는 어떤 훌륭한 책이 상을 받을지 벌써부터 아주아주 궁금해 하고 있다.

후지이 다케시의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모델들의 독창성과 설명력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판문점』과 달리, 『사이』는 굉장히 담백한 책이다. 저자 후지이 다케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 역시 심플하다. 대한민국은 뉴라이트의 말마따나 ‘자유민주주의’를 국시로 삼아 세워진 국가가 아니었고, 해방 당시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이념은 다름 아닌 ‘민족사회주의’였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현대사에 약간의 관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별반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후지이는 이 뻔한 이야기를 뒷받침하기 위해 무서우리만치 성실하게 ‘물증’을 쌓아간다. 그간 이범석과 조선민족청년단(이하 족청)에 대한 연구는 주로 개인의 회고록을 중심으로 이뤄졌고, 그 수준 역시 인상비평에 머물렀다. 하지만 후지이는 한반도에서 간행된 신문은 물론이고, 미국과 중국 자료까지 꼼꼼히 읽어가며 족청계의 이념이 나치즘의 모방이나 전근대적 공동체주의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족청계의 이념은 1930년대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민족사회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민족사회주의’라 해도 이범석은 국민당의 군사주의에 영향을 받았고, 안호상은 나치 독일의 혈통적 민족주의를 신봉했으며, 양우정은 가족적 사회주의를 이상으로 생각하는 등 그 결은 상당히 복잡했다. 족청계는 이러한 이념적 배경을 상황에 맞게 적절히 활용해가며 해방공간에 성공적으로 안착했고, 냉전질서가 굳어지기 전까지 무시하지 못할 정치세력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쥐새끼 하나 빠져나갈 수 없는 견고한 성채와도 같은 후지이의 글을 읽다보면, 무언가를 확실히 안다고 말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국시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었다고 얘기하기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은 신문을 읽고 또 읽었을까. 오늘하루 입 밖에 낸 수많은 이야기 중 내가 진짜로 아는 것은 얼마나 될지,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다. 

 사실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는 책의 제목으로는 영 좋지 않다. 일단 너무 길고, 눈에 확 들어오지도 않는다. 분명 후지이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이토록 긴 제목을 고집한 이유는, 아마도 ‘사이’에 대한 감각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족청계는 이념적으로도, 시기적으로도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 놓인다. 어느 쪽으로도 튈 수 있는 불안한 집단이지만, 그만큼의 가능성 역시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혁신계인 조봉암은 끊임없이 족청계와의 연대를 도모했고, 족청계의 몰락 이후 그의 정치적 공간 역시 좁아졌다. 

 <한겨레>에 연재한 칼럼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후지이에게 역사공부란 과거의 수많은 가능성을 발굴해가는 과정이다. 지금의 모습이 ‘최선’이라며 사회를 자연화하는 뉴라이트와는 달리, 그는 현재가 어디까지나 우연히 만들어진 역사의 산물임을 강조한다. 후지이가 주목하는 건 이쪽도 저쪽도 아니었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도 나아갈 수 있었던 과거의 가능성, 다시 말해 ‘사이’다. 

 물론 후지이가 ‘사이’에 놓인 애매함, 그리고 이로부터 비롯된 가능성을 발굴해가는 과정은 아주 꼼꼼하고, 철두철미하다. 그가 물샐 틈 없는 견고한 실증연구를 통해 발견한 것이 결국 ‘애매함’이라는 사실은 꽤 묘하게 느껴진다. 놀라울 정도로 자유분방한 동시에, 숨도 제대로 못 쉴 만큼 깝깝하고 엄격하기도 한 역사학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후지이는 냉전이 고착화된 이후, 미국이 확산시킨 개발 모델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성격의 주체를 연구하는 게 앞으로의 과제라고 이야기하며 『사이』를 끝맺는다. 요즈음 신체적·경제적·사회적 한계를 감안할 때 과연 연구자가 자신의 박사논문 이상의 학술적 성과를 낼 수 있는지 회의하고 있긴 하지만, 후지이라면 분명, 『사이』를 디딤돌 삼아 그보다 더 훌륭한 성과를 얼마든지 남겼으리라고 확신한다. 개인적으로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의 통치성을 각각 ‘나병 모델’과 ‘페스트 모델’에 대응시킨 그의 논문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기도 했고 말이다. 

 물론 그가 ‘글쓴이 후지이 다케시’를 죽이고 한국을 떠난 지금, 이런 얘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굉장히 많아서, 여러 번 글을 썼다 지웠다. 그래도 역시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게 맞는 것 같다. 후지이의 글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많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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