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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Apr 16. 2019

우리가 모르는 아시아를 걷다

『아시아 건축 기행』

 우리는 알고 있다,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을. 그리고 둥근 지구에는 6개의 대륙과 크고 작은 섬들이 떠있으며, 그 위에 200여 개의 국가가 아웅다웅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이 세상이 평평하다고 믿던, 그래서 세상의 끝까지 가면 떨어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던 옛 사람들을 마음껏 비웃어줄 만큼, 우리는 스스로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는다. 

 이런 자신감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터치 몇 번으로 세계 구석구석을 징그러우리만치 선명하게 담아낸 위성사진을 간단히 검색할 수 있다. 각종 위키에는 세계 각지에 대한 자질구레한 정보가 그야말로 넘쳐흐른다. 하지만 단순히 ‘알 수 있다’고 해서, 진정으로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알고 있다’는 건 어떤 상태를 일컫는 걸까? 지구에 사는 그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인 ‘앎’이란 게 존재할까?

 예컨대 ‘동양’은 어떨까?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의 책 『오리엔탈리즘』에서 유럽인에게 ‘동양’이란 아나톨리아와 서남아시아(근동/중동)인 반면, 미국인에게 ‘동양’이란 곧 동아시아(극동)라고 지적한다. 똑같은 세계지도라 해도 한국의 세계지도는 동아시아가 중심인 반면, 영국의 세계지도는 유럽대륙이 중심에 놓인다. 내가 누구고 어디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지에 따라, 세계에 대한 이해가 이렇게나 다른 것이다. 

 강영환의 『아시아 건축기행』이 독자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 역시, 세계의 모습은 여럿이라는 평범하지만 중요한 깨달음이다. 이는 책의 제목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책에서 다루는 지역은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국한되지만, 제목에는 별다른 수식어 없이 ‘아시아’만 떡하니 써놓았기 때문이다.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만 다녀왔으면서 『아시아 건축기행』이라니, 한국 독자라면 어딘가 허전하게 느낄 법도 하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우리가 평소 아무렇지 않게 입에 올리던 ‘아시아’는 과연 어떤 ‘아시아’였던가? 말만 안했다 뿐이지, 한국인에게 ‘아시아’란 사실 한국이 속한 동(북)아시아였다. 인도아대륙과 인도차이나반도, 인도양의 수많은 섬들은 한국인에겐 ‘아시아’ 그 자체라기보다는, ‘남’이나 ‘동남’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만 하는 곳이었다. 많은 한국인들은 은연중에 ‘아시아’의 대표는 어디까지나 동(북)아시아고, 나머지 지역은 ‘쩌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영환은 그간 한국에서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라 불리던 지역을 과감하게 ‘아시아’라고 부름으로써, 우리의 좁은 시야를 과감히 열어젖힌다. 그렇다, 저들도 아시아다. 서울에선 동(북)아시아가 곧 아시아겠지만, 프놈펜과 방콕, 자카르타에서는 그곳이 바로 아시아다. ‘남’이나 ‘동남’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시아의 당당한 일원인 것이다. 저자가 자칫 혼란을 줄 수도 있는(예컨대 “어, 이거 중국이랑 일본 얘기 아니었어?!”) 제목을 구태여 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여정은 인도 남부에서 시작해 바다를 건너 스리랑카를 들르고, 자와 섬을 거쳐 다시 인도차이나 반도를 둘러본 후 네팔과 부탄에서 끝을 맺는다. 행선지를 이어보면 길고 비스듬한 타원이 만들어진다. 이 매끄러운 타원은 그냥 나온 게 아닌지, 본래 『경상일보』에 연재된 글을 묶은 것임에도 마치 한 번에 쓴 책처럼 짜임새가 있다. 

 저자는 아시아 곳곳의 종교건축을 소개하는데 책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신을 찬미하고 그 전능함을 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이 장엄한 건축물을 ‘유토피아’라고 볼 수도 있겠다. 유토피아의 의미는 ‘어디에도 없는 곳’인데, 종교건축이란 초월적인 무언가를 형이하의 세계에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종교건축은 ‘어디에도 없는 곳’, 다시 말해 유토피아를 감히 이 땅에 세워보려는 야심찬 시도인 것이다.

 한데 아시아 곳곳에 들어선 이 유토피아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그리 따스하지 않다. 아니, 따스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매섭다. 자이나교의 성지인 인도 스라바나비라골라의 사원과 위압적인 입상 앞에서는 평화공존과 해탈을 추구했던 자이나교의 정신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냐며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자와의 보로부두르를 보면서는 이곳 사람들의 찬란한 고대문명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면서도, 이를 추동한 게 신앙심보다는 왕의 욕심이 아니었을까하고 넌지시 질문한다. 미얀마 양곤에서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편에는 휘황찬란한 황금불탑이, 다른 한편에는 너저분한 시장이 들어선 모습에 부처의 가르침이 진정 무엇이었나를 고민한다. 

 아시아의 종교건축을 향한 저자의 비판은 꽤나 수위가 높은지라, 혹자는 ‘이거 오리엔탈리즘 아니야?’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의 시선을 식민지의 옛 수도를 거니는 백인 제국주의자의 그것과 동렬에 놓을 수는 없다. 저자는 서구, 정확히는 서구 식민국가가 아시아에 남겨놓은 위압적인 관공서와 랜드마크 역시 통렬히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건축이든 식민국가의 개선문이든, 모두 주변을 무시한 채 홀로 우뚝 서서 그 압도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이전까지 결코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결코 다시 나올 수 없는 ‘유토피아’가 되어보려는 그 오만함이야말로 저자가 경멸해 마지않는 것이리라.

 아시아를 거닐며 만난 너무 많은 ‘유토피아’에 기가 빨린 듯, 저자는 책의 곳곳에서 한국 전통건축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낸다. 신비롭고 경건한 석굴암과 이름에 걸맞지 않게 인간다움이 물씬 느껴지는 불국사는, 저자에겐 온갖 기름진 음식에 질렸을 때 들이키는 동치미 한 사발과도 같다. 다른 나라까지 가서 굳이 한국 전통건축을 예찬하는 저자의 모습에 젊은 사람들은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1953년생이다. 그가 한창 커리어를 쌓아가던 시절, 문화예술계 최대의 과제는 ‘한국적인 것’의 영역을 발견하고 개척하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이러한 자부심은 어느 정도 이해해줄 수 있으리라.(오늘날 ‘한국적인 것’이 여전히 의미가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지만!)

 길고 비스듬한 타원을 그리며 펼쳐지는 저자의 아시아 건축기행은 네팔과 부탄에서 끝을 맺는다. 결코 부유하다 할 수 없는 이 작은 나라들에서, 저자는 자신이 꿈꿔온 이상적인 공간을 비로소 마주한다. 네팔 박타푸르의 광장들은 오직 관광객만을 위한 박제된 문화유산이 아니다. 광장은 평범한 주민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면서도, 길이 교차하는 지점마다 탑과 사당이 자리하고 있어 그곳이 신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상기해준다. 성(聖)과 속(俗)이, 인간과 신이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지 않고 광장에서 한데 어우러진다. 그 결과 박타푸르에서는 일상의 행동 하나하나에도 어떠한 영성이 깃들어 있다.

 유토피아는 없다. 장엄한 종교건축이든 휘황찬란한 랜드마크든, 유토피아를 만들어보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사람들의 삶에 자연스레 녹아드는 건축,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위안을 주되 그 삶에 경건함을 불어넣어주는 건축이야말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다. 긴 여행 끝에 저자가 얻은 깨달음은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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