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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Apr 28. 2019

한반도의 ‘근대’를 사랑하는 법

『3월 1일의 밤』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진부하다, 세상에 널리고 널린 연애소설만큼.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낡은 말에 기꺼이 속아주는 이유는 ‘운명적인 사랑’에 대한 갈망이 그만큼 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정말로 첫눈에 반해서라기보다는, 그럴 수 있는 상대방이 나타나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마치 주문처럼 저 말을 되뇌고 또 되뇐다. 하지만 그런 마법 같은 일이 과연 실제로 벌어질까? 설사 처음 만난 누군가에게서 강렬한 스파크가 튄다 해도, 그걸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해보지 않은지라 이런 말 꺼내기 민망하지만, 사랑이란 익숙한 존재가 문득 낯설게 느껴질 때 비로소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생전 처음 느끼는 낯설음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도 잠시, 나는 어떻게든 그를 알아보려 아등바등한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만 늘어갈 뿐임에도 이 공부가 전혀 헛되게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알아가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고, 다음 만남이 기다려진다. 그를 만나면 만날수록 나는 이전과는 다른 빛깔로 채워져 간다. 

 낯설음에 놀라워하고, 알아감에 기뻐하는 이런 사랑은 비단 사람만을 향하지 않는다. 사람은커녕 생물도 아니고, 심지어는 형체조차 없다 해도 우리는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출간된 권보드래의 『3월 1일의 밤』 역시 3.1 운동이라는 사건을 이렇게나 아름답게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권보드래의 오랜 팬으로서, 나는 그가 언제쯤 자신의 숙제라 이야기하던 3.1 운동의 문화사를 퍼낼지 늘 애가 달던 터였다. 책을 읽고 나서야 나의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음을, 그가 이런 글을 쓰려고 그토록 오랜 시간 공을 들여왔음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저자 본인도 이야기하듯 『3월 1일의 밤』은 3.1 운동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앎”을 더하고자 쓰인 책은 아니다. 학술서가 아니기에 서술은 때때로 중구난방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저자의 목소리에 감정이 한껏 실려 있는 대목도 적지 않다. 하지만 감히 이야기하건대, 이 책의 가장 훌륭한 점은 바로 이러한 두서없음이다. 저자는 기존의 미끈한 내러티브를 답습하는 대신, 3.1을 둘러싼 복잡하고 모순적인 목소리들을 모두 끌어안는다. 고작해야 유관순 ‘누나’에 머물러 있던 우리의 3.1 이해는 불안과 희망, 냉소와 기대, 욕망과 숭고가 뒤엉킨 무수한 꿈들 앞에서 설 자리를 잃는다.

 3.1 운동을 새롭게 알아가기 위해, 그럼으로써 그를 보다 깊게 사랑하기 위해 저자는 렌즈를 돌려가며 줌아웃과 줌인을 반복한다. 세계사의 맥락 속에 3.1을 위치 짓는 동시에, 개개인의 삶 속에서 3.1이 어떤 의미였는가를 파고드는 것이다. 오지 않은 미래를 끌어와 이 자리에 펼쳐 보이는 1부 1장 <선언>에서 이미 지나간 과거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4부 4장 <후일담>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세계와 개인을 분주히 오고가며 3.1 운동에 너비와 깊이를 부여한다. 

 저자에 따르면 1910년대는 세계적인 혁명의 시대였다. 1910년 멕시코혁명을 시작으로 1911년 신해혁명과 1917년 러시아혁명, 1918년 핀란드와 독일, 헝가리혁명에 이르기까지 세계각지에서 기성체제를 타파하려는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운동이 잇따라 발생했다. 또한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은 당시 사람들에게 단순한 종전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문명’을 자임하며 전 세계에 오만하게 군림하던 유럽은 누구보다 추하게 자멸했다.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른 미국과 소련은 각각 자유의 제국과 정의의 제국을 자임했다. 체코, 아일랜드, 인도, 이집트 등 세계 각지의 식민지와 속령에서 독립의 움직임이 들끓었다.

 이처럼 혁명의 에너지가 넘쳐나던 1910년대, 일본의 지배에 놓인 조선만은 유독 고요하고 안온했다. 뜻밖에도 식민통치는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총독부는 조선인에게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기쁨을 누리는 소박한 양민(良民), 개인과 가족 외에는 일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착실한 선민(善民) 되기를 요구했다. 게으르고 불결한 조선인이라는 모욕을 받아들인다면, 공적인 일에 목소리를 내려는 욕구를 억누른다면, ‘내지’가 위험에 처할 경우 가장 먼저 내쳐질 신세라는 사실에 눈을 감는다면 충분히 괜찮은 세상이었다. 

 그러나 침묵은 결코 무기력한 순응을 의미하지 않았고, 지난 10년간 차곡차곡 쌓여간 저항의 에너지는 결국 1919년 3월 한꺼번에 폭발했다. 조선의 사람들은 처음으로 자신과 가족을 넘어 다양한 타자들과 연대했고, 비로소 ‘사회’를 상상할 수 있었다. 식민권력은 일체의 사회단체를 허용치 않았기에 운동을 지휘할 지도부가 부재했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대표자 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전달했다. 바야흐로 너도나도 대표를 자임하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오직 자신만이 자신을 대표하는 세계의 문이 열리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저마다의 꿈을 그야말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화정을 지지했지만, 독립을 지키고 정국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선 왕정복고가 불가피하다 여기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공화정이라 해도 그 구체적인 모습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었을 것이다. 

 비단 정체(政體)에 대한 이야기만 오고간 것이 아니다. 제 1차 세계대전을 근거로 서구문명의 종언을 고하는 거대담론과 공동묘지가 아닌 선산에 부모를 묻겠다는 소박한 요구가 같은 시공간에 나란히 존재했다. 사람들은 ‘일제의 폭력’과 ‘근대의 폭력’ 모두에 저항했고, 양자를 굳이 구분하려 들지 않았을 뿐더러 그럴 수도 없었다. 독립(獨立), 개조(改組), 도의(道義), 공존(共存), 균분(均分)과 같은 말들이 희망과 불안을 머금은 채 거리를 부유했다.

 물론 가능성은 가능성으로만 남았을 뿐, ‘개벽’은 결코 도래하지 않았다. 조선은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고, 세계 역시 공존공영의 길로 나아가지 못했다. 3.1 운동과 함께 터져 나온 무수한 말과 글들도 현실화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3.1이 소중한 이유는, 그것이 ‘중심’과는 다른 ‘주변’의 근대를 개척하고자 고군분투한 생생한 증언록이기 때문이다. 

 아주 오랫동안, 주변의 근대는 ‘수탈’과 ‘개발’이라는 이항대립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주변이 황폐화되었든 윤택해졌든 간에 이를 실현한 x변수는 결국 중심이라는 점에선 ‘수탈’과 ‘개발’이 다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주변의 ‘모던함’에 주목하는 문화사나 중심(제국)과 주변(식민지)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려는 제국사라는 새로운 사조가 등장하긴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중심의 역사를 그대로 주변에 이식한 것 아니냐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권보드래는 이 x(중심/제국)→y(주변/식민지)라는 도식 자체에 손을 대지는 않는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는 게 보다 정직한 표현일 것이다. 중심의 그림자를 애써 걷어내려는 시도는 결국 꼴사나운 자기연민이나 광기에 찬 폭주로 이어지기 마련이므로. 대신 그는 y가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벡터에 주목한다. x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해서 y가 이를 그대로 답습하는 건 아니다. y, 즉 주변이라는 위치 자체로부터 비롯된 힘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변은 거의 언제나 중심에 비해 미숙하고, 중심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위치 덕에 주변은 중심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3.1을 전후해 터져 나온, 설익었지만 생생히 살아 있는 목소리들이야말로 한반도의 근대인 것이다. 김수영의 말마따나 우리는 이 근대에 거대한 뿌리를 박아야 한다, 제3한강교의 철근기둥도 좀벌레의 솜털로 느껴질 만큼 거대한 뿌리를. 

 아울러 다른 주변과의 접점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야 한다. 단순히 3.1 운동이 5.4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식으로 x→y의 도식을 그대로 반복할 게 아니라, 세계 각지의 y들이 만들어낸 변화무쌍한 벡터를 넓은 시야로 아울러야 한다. 저자가 3.1에 닿기 위해 프랑스혁명과 아이티혁명,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 라틴아메리카와 인도차이나의 역사를 공부한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친구가 그랬던 것 같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결국 그와 함께 있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친구도 필시 어느 소설이나 영화에서 들었던 것이겠지만, 이제 와서 출처는 그리 중요하지 않지 싶다. 『3월 1일의 밤』을 읽으며 나는 한반도의 근대를 조금 더 사랑하게 되었다. 물 수 없으면 짖지도 말라던 윤치호나 민족개조를 외친 속물교양 이광수뿐 아니라, 일제가 나무를 꺾어가지 못하게 한다고 독립만세를 외쳤던 무명씨까지 말이다. 

 잘못 쓴 거 아니냐고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르겠다. 부끄럽지만 제대로 쓴 게 맞다. 그동안 내가 마음을 주고 관심을 쏟아온 대상은 어디까지나 윤치호나 이광수 같은 사람들이었다. ‘트랜스내셔널’한 코스모폴리탄으로 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하는 내 모습이 이들 식민지 지식인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아, 물론 윤치호와 이광수는 아주 똑똑한 사람들이라 나랑 비교하는 게 실례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윤치호와 이광수는 물론이고, 이들을 좌절케 하고 끝내는 ‘흑화’시킨 식민지 조선 역시 사랑하려고 한다. 주변이라는 좌표로부터 비롯된 가능성과 한계를 낯설게 봄으로써 한반도의 근대를, 나아가 한국어 화자로서의 나를 조금 더 좋아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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