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넷상에서 퍽 화제를 모은 만화 《극락왕생》을 읽었다. 일단, 재밌다. 관음보살의 자비로 고3이었던 2011년을 한 번 더 살게 된 주인공이 조력자와 함께 구천을 떠도는 귀신들의 고민을 해결해준다는 무난한 이야기를 무난하게 풀어나간다. 《기동아 부탁해》나 《학교괴담》을 보고 자란 투니버스 세대라면 어디선가 한 번은 보거나 읽은 것 같지만 배경은 한국인 이 만화를 편안하게 즐길 수 있겠다, 마치 《연의 편지》처럼.
〈작가후기〉에서 혜화역 시위를 언급한데서 알 수 있듯 작가 고사리박사는 꽤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인 듯한데, 의외로 스토리상에서는 그게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 작가의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는 건 오히려 인물 구성 쪽인데, 정말 집요하리만치 모든 인물을 여성으로 설정해놓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모조리 여성만 나온다고 해서 페미니즘 창작물이 될 수 있는지는,,,, 음, 잘 모르겠다, 일본 쪽 창작물의 고질적인 병폐(?)가 ‘여자 그려놓고 남자라고 우기기’라면, 그 역도 꼭 좋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 말이다. 물론 이해는 간다만...
사실 기모노의 꽃무늬를 수놓은 ‘퓨전한복’같은 스토리나 페미니즘 서사보다도 흥미로운 건, 이 작품이 공공연히 내세우는 ‘한국 판타지’라는 정체성이다. 《극락왕생》은 불교적 요소를 적극 끌어들여 이야기를 풀어 가는데, 문제는 이게 그다지 ‘한국적’이지 않다. 만화에 깔려있는 불교적 세계관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그리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뿐더러 약간의 이질감마저 느껴졌다. 만일 비단 나뿐 아니라 만화를 읽은 대다수의 독자들 역시 그렇게 느낀다면, 《극락왕생》은 ‘불교 판타지’일지언정 ‘한국 판타지’는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형) 판타지’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일단 나는 현대 한국을 지배하는 세계관은 기독교, 그것도 개신교라고 생각한다. 몇 년 전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영화 홍보 차 한국에 와서 불교식 합장을 했을 때 왜 그리도 많은 사람들이 분개했겠는가? 코로나 때문에 이래저래 욕을 먹고는 있어도, 굽시니스트 말마따나 한국은 집사님, 권사님들이 굴리는 나라다. 나는 대다수 한국인의 역사관마저 지극히 개신교적이라 느끼는데, 이들은 한국이 예전엔 가난했을지언정 부유해지리라 예정된 반면, 라틴아메리카는 한때 부유했을지언정 결국 가난해지리라 예정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아니 근데, 솔직히 아르헨티나는 그렇다 쳐도 멕시코는 무시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
그리고 개신교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한국에서, ‘판타지’가 들어설 자리는 지극히 협소해진다. 물론 우리는 지금도 일부 개신교도가 (적어도 외부자의 시각에선) 미신과 주술에 의존하는 모습을 많이 보곤 하지만, 판타지와 미신은 다르다. 한국 개신교의 미신과 주술은 오컬트라면 모를까 판타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차라리 오랜 세월 ‘이단’과 씨름해온 만큼 온갖 판타지적 요소가 혼재된 천주교가 한국의 주류였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지만, 이쪽도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발붙인 시기가 너무 늦었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대충 17세기 중후반에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약으로 조선에서 천주교 포교가 허용되었다면 재밌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을 텐데, 아쉽다. 키배에는 이골이 난 조선이니만큼 전례논쟁이 터졌을 때 바티칸으로 사절단도 보냈을 테고, 그러다 정약용의 주도로 ‘(가칭)상제회’를 조직해 떨어져 나왔을 수도 있고. 기층 차원에선 천주교의 성인과 관우를 함께 숭배한다거나(伯多祿 사당 충분히 가능할 것 같지 않은가!), 『정감록』의 정도령을 무슨 재림예수처럼 여겼을 수도 있겠고 말이다.
여하튼 한국은 하필이면(?) 천주교도 아닌 개신교가 지배하는 동네인지라 판타지를 만들래야 만들 수가 없을 것 같지만, 이 척박한 토양에서도 판타지적 ‘전통’을 발굴해내려는 시도가 미약하게나마 존재한다. 《극락왕생》처럼 불교를 적극 끌어들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한국에서 불교적 세계관은 결코 주류가 아니기에 주로 옛 문헌에서 기이한 현상이나 괴물들을 발굴해내는데 주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도 문제가 발생하는데, 한국은 그런 ‘전통’마저 상당히 부실하기 때문이다.
곽재식 작가의 『한국 괴물 백과』 목차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괴물들의 이름이 대부분 고유명사라기보다는 그 특징이나 행동을 그대로 옮겨온 데 불과하다는 것이다. 가령 기남삼인(奇男三人)은 말 그대로 기이한 세 남자란 뜻이고, 목여거(目如炬)는 눈이 횃불 같다는 뜻이다. 이건 특징이나 행동이지, 이름이 될 수 없다. 유명한 김춘수의 시를 빌리자면, 한국의 괴물들은 이름이 없어 다만 하나의 몸짓에 그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럼 이들이 왜 꽃이 되지 못했느냐 묻는다면, 역시 이름을 불러주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잘은 알지 못하지만, 유럽과 일본에서는 대략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정도 되면 세간에 떠도는 풍문과 전승들을 채록하려는 시도가 등장한다. 본격적으로 ‘근대’가 도래하기 전에도 이미 ‘전통’을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이다. 반면 이들 지역과 비슷한 인구밀도와 생활수준을 영위하던 동시대의 조선에서는, 그런 시도가 거의 없었던 듯하다. 조선의 상업발전이나 출판문화가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는 점이 중요한 이유겠지만, 그럼에도 이해하기 어렵다. 왜 개성과 평양의 부호들은 이런 ‘덕질’에 몰두하지 못했을까, 혹은 않았을까?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의 강력한 자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걸까? 잘 모르겠다.
정리하자면, 전근대엔 판타지적 ‘전통’ 자체가 미약했고 근대, 늦어도 현대 이후엔 개신교적 세계관이 사람들의 일상을 급속도로 잠식해갔기 때문에 이른바 ‘한국(형) 판타지’란 불가능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어쩌다보니 전혀 언급하지 못했는데,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 유교의 영향 역시 지대했으리라.) 한국인이 한국어로 쓴 판타지의 정수로 평가받는 이영도의 『눈물을 만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도 한국적 요소를 가미한 것이지, 결코 ‘한국(형) 판타지’가 아니다. 그냥 이영도라는 개인의 경이로운 창작물일 뿐이다. 한국에서 나올 수 있는 건 《곡성》이나 《사바하》지, 결코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가 아니다. 역시 한국은 판타지보다는 오컬트에 어울리는 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