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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Jan 02. 2022

새해를 맞이하며

2021년의 교양서 Best 10

 기필코 2021년이 다 가기 전에 올해의 책 결산을 올리겠노라 다짐했건만, 미루고 미루다 결국 2022년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언제나 게으르고 내실없게 살아왔지만, 2021년은 특히 더 그랬습니다. 친구들은 하나둘 자리를 잡고 나름의 성과를 만들어가고 있는데, 저만 별달리 해놓은 게 없네요. 늘 이런 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면승부 할 자신이 없으니 우회로를 찾다 오히려 더 꼬이고, 쉽게 가려고 꼼수나 부리다 제 꾀에 넘어가고 말이지요.

    

 2021년은 책도 많이 읽지 못했네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100권을 채우지 못할 뻔했습니다. 하지만 (실제와 달리) 제가 ‘책벌레’ 이미지가 워낙 강한지라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요 며칠 열심히 페이지를 넘겨가며 겨우겨우 101권을 읽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권수 채우기에 목숨을 거는 게 무의미하단걸 알지만, 책이라도 읽지 않으면 정말로 해놓은 게 없는지라 조금 욕심을 부렸습니다.

     

 이렇게 얼렁뚱땅 지나가버린 2021년이지만, 그래도 한 가지 즐거운 일이 있다면 좋은 교양서를 정말로 많이 만났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좋은 교양서를 쓰는 게 꿈인 사람으로서(좀 더 속물적으로는 한국출판문화상 교양부문 수상!) 책을 읽으며 무척이나 즐거웠고, 자극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단순히 어려운 주제를 알기 쉽게 요약·정리하는데 그치지 않고 교양서가 주는 자유로움을 십분 활용해 대담하고 발랄한 질문을 던지는 책들이 많아 반가웠습니다.

      

 한 사회의 품격은 모어로 쓰인 좋은 교양서가 얼마나 많이, 다양하게 나오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2021년의 한국사회는 제 생각만큼 망가지진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그래도 희망을 가져볼 구석이 있다는 기대를 걸어봅니다. 물론 그 좋은 교양서들이 얼마나 많이 읽히느냐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요. 어떻게 하면 좋은 교양서가 좋은 시민을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2021년의 책 열권은 전부 교양서로만 골라봤습니다. 2021년에 읽은 좋은 학술서는 나중에 긴 서평을 쓸 일이 있겠지요. (물론 교양서도요!)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하 반말, 가나다순)


『대치동』


1. 『대치동』

 대치동은 아마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법정동일 것이다. 사람들은 대치동의 높은 교육열에 혀를 차면서도, 한편으론 자녀의 입시가 다가오면 어떻게든 대치동에 발을 들이려고 한다. 조장훈의 『대치동』은 대치동을 향한 과도한 선망과 질시를 걷어내고, 이 별난 동네가 어떻게 한국 사교육 일번지로 자리 잡게 되었는가를 분석하는 종합생태보고서다. 사교육과 부동산이 맞물리고, 입시정책이 급변하는 가운데 다품종 소량생산의 이점을 살려 전국의 학생과 학부모를 끌어 모은 대치동 생태계의 형성과정이 흥미롭게 읽힌다.

 지은이는 인류학을 전공했다지만, 부르디외를 자주 인용하는 것도 그렇고 사회과학자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도표까지 집어넣는 등 정작 책은 지극히 사회학적이다. 글의 구성부터 대안 제시까지, 논술선생님으로서의 에토스가 진하게 묻어나는 점도 재미있다. 이 책과 더불어 대치동 원주민으로 이제는 손주의 입시를 진두지휘하는 70대 할머니, 서울 변두리 자가를 팔고 대치동에 전세로 왔는데 집값이 폭등해 쫓겨날 위기에 놓인 40대 부부, 명문대 출신의 커리어 우먼이었지만 자녀교육을 위해 일을 그만둔 30대 어머니, 저 멀리 용인에서부터 매일같이 대치동 학원을 오가는 고3 수험생 등 대치동 생태계를 이루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대치동 앤솔로지”가 한 편 나와도 좋을 것 같다.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


2.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

 “밥 꼭 먹고!” 내가 집을 나설 때마다 엄마는 이렇게 얘기한다. 그만큼 밥은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걱정과 애정을 전하는 수단이자, 인간다움을 이루는 핵심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먹는 밥이 어디서,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는지 잘 알지 못한다. 아니, 정확히는 관심이 없다. 기껏해야 고도화된 시장과 발전한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 낙관하거나, 농촌과 먹거리에 대한 목가적 환상만을 끊임없이 소환할 뿐이다.

 정은정의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은 시장/기술만능론과 낭만적 생태주의가 보지 않는, 혹은 보지 못하는 농촌과 먹거리, 환경의 문제를 따뜻하지만 예리하게 짚어낸다. 농촌에서 생산된 농산물은 유통업자의 트럭을 타고 도시로 실려와 자영업자의 손을 거쳐 따뜻한 밥이 된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이러한 과정 속에 어떤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지, 어떻게 누군가의 작은 편의가 누군가의 큰 고통이 되는지를 지은이는 조곤조곤 담담하게 풀어낸다. 사회학이 사실상 통계학이 되어버린 지금, 숫자를 거의 쓰지 않고도 이토록 사회를 잘 실감케 하는 글쓰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사회학과 신입생 필독서로 지정하면 좋겠다.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가다』


3.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가다』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조선 사신단의 북경체험은 『열하일기』를 넘어서지 못한다. 삐딱한 양반 도련님이 청나라의 번화한 문물을 체험하고 폐쇄적인 화이관을 탈피하는, 딱 그 정도 수준에 머무른다. 미국 중국학의 기틀을 놓은 페어뱅크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부지기수건만, 정작 중화질서에 엄밀한 의미의 외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은연중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손성욱의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가다』는 조선인들이 한가한 유람이 아닌 치열한 외교를 위해 북경에 갔음을, 나아가 양반이 아닌 중인의 교유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로선 도달 가능한 세계의 중심인 동시에 그 세계 바깥을 보여주는 유일한 창이었던 북경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은 저마다의 기대와 희망, 욕망을 이루고자 고군분투했다. 

 지은이는 19세기 조청관계 전문가로, 이미 훌륭한 논문과 서평을 여럿 내놓았다. 흔히 서세동점의 ‘전환기’로 이해되곤 하는 19세기 후반, 이 시기의 조청관계를 이해하는 틀은 ‘근대’와 ‘전통/수구’라는 이항대립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지은이가 이 틀을 훌쩍 뛰어넘는 새로운 관점에서 19세기 조청관계사를 써주기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겠다.



4. 『살아생전 떠나는 지옥 관광』

 지옥은 두려움만큼이나 호기심의 대상이다. 죽기 전까진 가볼 수도 없거니와, 자신이 지옥에 떨어질지 아닐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아주 오래 전부터 인류는 지옥에 대한 상상력을 무럭무럭 키우며 불안을 달래고, 호기심을 채워왔다. 

 김태권의 『살아생전 떠나는 지옥 관광』은 동서고금의 다양한 지옥을 넘나들며 지금까지 머릿속으로 생각만 할 뿐 차마 말하지 못했던 궁금증을 해결해준다. 지옥은 어디에 있을까? 지옥의 악마는 나쁜 사람을 벌주는데 왜 악하다고 여겨질까? 여러 종교를 믿으면 지옥에 떨어질 확률이 적어지지 않을까? 지옥의 일상은 어떻고 형벌은 언제쯤 끝날까?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온갖 기상천외한 질문에 그럴싸한 대답을 마련하는 지은이를 보노라면, 역시 번뜩이는 상상력은 풍부한 독서에서 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곱씹게 된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일본 만화 《엉덩이 탐정》이 함께 등장하는 건 아마 전 세계에서 이 책이 유일할 것이다. 한국의 에라스무스라는 수식어가 부족하지 않은 지은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대담한 상상과 엮어 읽기야말로 교양서만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그 점에서 이 책은 올해 읽은 가장 교양서다운 교양서다.


『신냉전 한일전』


5. 『신냉전 한일전』

 어느 나라나 그렇겠지만, 한국과 일본이 서로에게 품는 생각은 특히 재밌는 구석이 있다. 한국은 한일관계가 프랑스-영국관계와 비슷하다 느낀다. 반면 일본은 한일관계를 아일랜드-영국관계로 생각한다. 물론 실제로 한일관계가 어떻게 흘러왔느냐고 묻는다면, 한국보단 일본의 생각에 가까웠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고, 해방 뒤에도 한국은 미일동맹의 하위 파트너로 냉전의 최전선에 내몰렸으니까. 그러나 지난 20여 년 간 한국의 국력이 크게 성장한 반면 일본은 상대적으로 정체했고, 문재인 정부의 출범과 함께 한국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한일관계를 뒤바꾸려는 모험에 나선다.

 길윤형의 『신냉전 한일전』은 한국의 뒤집기와 일본의 굳히기가 엎치락뒤치락한 지난 4년의 역사를 샅샅이 살핀 끝에, 이 승부의 패자는 한국이라고 담담히 선언한다. 한국은 북미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함으로써 한미일 삼각구도를 깨뜨리고자 했다. 하지만 이제 무언가를 되게 할 힘은 없어도 아직 안 되게 할 힘은 있었던 일본은 한국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고, 끝내 역사적인 하노이회담의 좌초에 일조했다. 

 한일관계의 파탄엔 한국의 책임도 크다는 지은이의 ‘중도적인’ 입장은 “《한겨레》답지 않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과의 분단체제 해소를 한국 외교의 사명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지은이는 지극히 《한겨레》적이다. 다만 이를 위해 일본과의 관계도 중시해야 한다는 ‘각론’의 차이가 도드라질 뿐. 이는 뒤집어 생각하면 대북관계 개선을 최우선 목표로 여기지 않는, 가령 중국을 보다 중시하는 《중앙일보》같은 곳이라면 “신냉전”의 정의 역시 확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신냉전은 구냉전과 어떤 점에서 다르며, 한국은 북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중 어느 나라를 수단으로, 어느 나라를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가? 이 책은 우리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다.


『오답이라는 해답』


6. 『오답이라는 해답』

 과학사란 으레 ‘정답’을 향해 달려가는 끝없는 진보의 과정으로 이해되곤 한다. 그렇기에 한 나라의 과학사, 가령 한국과학사는 한국이란 나라가 정해진 답을 다른 나라보다 얼마나 빨리 찾아냈는가를 자랑스레 선전하거나, 반대로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얼마나 뒤쳐졌는가를 열을 내며 성토하는 기록이 되어버리곤 한다. 물론 비단 한국뿐 아니라 특정 국가의 과학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쿨하게 선언해버리는 방법도 있지만. 

 김태호의 『오답이라는 해답』은 과학엔 정답이 있다는 통념을 거부한다. 과학이란 세상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한 설명 혹은 이야기인 만큼, 시대와 지역에 따라 얼마든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기준에선 오답으로 처리될 무수히 많은 과학‘들’이 그 시대, 그 지역에선 얼마든 해답이 될 수 있었다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지은이는 한국과학사에 대해서도 새로운 생각거리를 안긴다. 근대를 일본의 식민지로, 현대를 미국의 점령지로 시작했던 만큼 한국의 과학연구는 두 나라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과학사가 일본과 미국의 혼종인 “도란스(ドランス, trans의 일본식 발음)”적 존재에 그치는 건 아니다. 제국의 보편적 지식이 한국이라는 특수한 장소를 만나며 상상도 못한 화학작용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동전의 양면인 자주-독자 프레임과 아류-열등 프레임에 말려들지 않으면서도 ‘한국의’ 과학사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너무나 발랄하고 명랑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7.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물론 사회적, 혹은 폴리스적 동물이란 해석도 있지만 넘어가자) 여기까진 다들 잘 알고 있다. 다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인 만큼 정치에 열심히 참여해야 한다는, 실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을 찍어달라는 납작한 결론으로 곧장 넘어가버려서 문제지. 

 김영민의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는 다르다. 인간이 정치적 동물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정치에 참여해야 할 필연적인 당위가 생겨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지은이는 말한다, 정치란 거대한 허구라고, 선거도, 투표도, 이를 가능케 하는 국가니 국민주권이니 하는 것도 전부 허구라고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허구를 통해 인간은 살아갈 힘을 얻고, 무리를 이루고, 질서를 유지하며, 조금씩이나마 앞으로 나아간다. 요컨대, 정치란 허구고 인간은 바로 그 허구가 있기에 비로소 살아간다. 그렇기에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인 것이다.



8. 『전국 축제자랑』

 누군가 “K-”를 묻는다면, 고개를 들어 이 책을 보게 하라. 김혼비와 박태하가 쓴 『전국 축제자랑』은 단순한 지역축제 탐방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지역축제를 통해 바라본 한국사회 해부도에 가깝다. 사람이 줄어가는 지역을 어떻게든 살려보려는 지자체의 눈물겨운 몸부림, 담당 공무원들의 헌신과 (의도된) 무심함, 지역주민보다 관광객을 우성한 구성, 온갖 요소가 맥락 없이 섞여 들어가는 혼돈의 도가니, 넘실대는 욕망과 밥벌이의 어려움, 그 가운데서도 나름의 의미와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 정말이지 “K-”하지 않은가! 

 “PC함”이 풍자와 익살을 말살한 21세기 판 성리학으로 공격받는 이 시대에, 정치적으로 올바르면서도 배꼽 빠지게 웃긴 이 책의 존재는 퍽 소중하다. 톨스토이가 그랬다던가,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고. 적어도 이야기만큼은 반대인 것 같다. 재미없는 이야기는 모두 비슷한 이유로 재미없지만 재밌는 이야기는 저마다의 이유로 재미있다. 농담과 재미의 결이 이렇게나 다양하단 걸 이 책을 통해 비로소 깨달았다.


『전라디언의 굴레』


9. 『전라디언의 굴레』

 고등학생 시절 5.18을 맞아 광주로 답사를 갔을 때 가장 놀랐던 건 5.18을 기억하는 성숙한 시민의식도, 멀리서 온 학생들을 반갑게 맞아주는 친절함도 아니었다. 바로 1980년에 멈춰버린듯한 도시풍경이었다. 아버지가 부산 출신인 친구는 어떻게 호남에서 가장 크다는 도시가 이리도 낙후할 수 있냐며, 자기는 그 때 지역차별의 문제를 처음으로 느꼈노라고 아직도 얘기하곤 한다. 일베발(發) “호남드립”이 이제는 20대 사이에서 하나의 유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전라도 출신에 대한 혐오와 멸시도 여전히 뿌리깊다. 이른바 “호남문제”는 지역차별과 계급차별이 밀접히 얽혀있는 셈이다.

 조귀동의 『전라디언의 굴레』는 호남의 낙후와 저발전, 그리고 지역차별의 기원을 파헤친다. 지은이는 단순히 박정희 정권이 공장을 많이 짓지 않아서 전라도가 못 살게 된 게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1950~60년대 내내 호남 출신이 정치권에서 소외됨으로써 기업을 키우기 위한 자원을 배분받지 못했고, 따라서 지역에 산업생태계가 조성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라도판 자민당 혹은 제도혁명당으로 군림하는 민주당이 중앙정부에서 받아온 떡고물로 겨우겨우 연명하고, 폰팔이와 건설사가 지역에서 가장 큰 기업이 되어버린 현실은 그 결과다.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고, 지은이는 이야기한다. 다만 동남권 식의 “메가시티”는 해결책이 아니다. 지역 간 연계가 밀접한 동남권과 달리 호남은 군산, 익산, 전주, 광주, 목포, 여순광 등의 도시가 따로 놀기 때문이다. 일단은 선거제도의 비례성을 높여 지역정계에서 민주당 일당제를 깨뜨리고, 지방국립대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통해 산업생태계를 조성하는 것만이 시도해봄직한 유일한 대안이다. 문제제기에서 대안제시까지, 어디하나 흠잡을 데 없는 독특하고 인상적인 책이다. 지은이가 쓴 “김대중 평전”을 읽어보고 싶다.


『지속가능한 나이듦』


10. 『지속가능한 나이듦』

 노화는 방 안의 코끼리다. 모두 그 존재를 알지만, 애써 모른 척 하고 싶어 한다. 몸은 점점 예전 같지 않아지고, 신도시 상가를 채우는 노인보호센터는 늘어만 가건만 아무도 이를 공론화하려 들지 않는다. 정희원의 『지속가능한 나이듦』은 이제는 노화라는 코끼리를 마주해야 한다고, 노화를 위한 사회계약을 마련하자고 제안한다. 복잡하게 엉켜버린 이어폰 줄을 풀어가듯 지은이는 사회와 개인, 노인과 비노인을 아우르며 각 층위에 맞춤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노화에 대한 진지한 관심은 물론이거니와, 과도한 공포나 낙관에 휘둘리지 않고 앞으로 도래할 사회문제를 직시하고,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지은이의 현명함이 무엇보다 인상적이다. 이른바 “민주시민교육”이란 이처럼 객관적 데이터를 근거로 논의를 위한 공통의 지반을 확인하고, 그 위에서 합리적 해결책을 도모하는 역량을 길러내는 과정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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