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제, 근대화, 국민주권, 그 너머의 민주주의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사상계》》
지금은 아닌 것도 같지만, 어쨌거나 87년 이후 민주주의는 한국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자 거스를 수 없는 당위로 자리 잡았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간단하다, 교과서를 보면 된다.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만 펼쳐도 1960년 4.19를 거쳐 1980년 5.18에서 좌절했다 1987년 6.29로 '완성되는' 민주주의의 승리서사를 찾을 수 있다.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간단명료한 도식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역사가 경전(canon)화 되었다는 증거다.
흥미로운 점은, 교과서에서 민주화(운동)의 단초를 언제나 선거의 문제로 환원한다는 사실이다. 4.19는 '역사적인' 3.15 부정선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6.29의 핵심은 대통령 직선제고 말이다. 교과서의 도식에 따르면 한국 민주화운동사는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 제대로 된 선거 하나를 위해 고군분투해온 납작한 역사로 쪼그라들고 만다.
물론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단순히 선거나 대의제만으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촛불시위마다 등장하는 구호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서 알 수 있듯 민주주의는 선거에 의해 선출된 대표가 국민의 뜻을 무시할 때 이에 저항하는 명분이 되어주기도 한다. 이 때의 민주주의란 국민의 "총의" 혹은 "주권"이다. 그런가 하면 민주주의는 산업화와 더불어 한국(만)이 이뤄낸 자랑스런 성과이자, 나머지 아시아(여기엔 때때로 일본까지 포함된다!)보다 '앞서' 있다는 자부심의 원천이 되어주기도 한다. 요컨대, 한국의 민주주의란 기능적으로는 대의제요, 실질적으로는 국민주권이며, 수사적으로는 선진 혹은 근대인 셈이다.
이상록의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사상계》》(이하 《자유민주주의》)는 이처럼 대의제, 국민주권, 근대(화)로서 한국 자유민주주의의 기원을 찾아나선다.《사상계》자체에 대한 분석이라기보다는 이를 매개로 삼은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비평"처럼 느껴지는 이 책은, 지은이 이상록의 조금은 재밌는 이력으로 말미암아 지극히 고전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퍽 독특한 지성사 연구서로 거듭났다.
우선 이상록은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대중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 마지막 학술적 논쟁인 2000년대 중반 "대중독재 논쟁"의 메인 플레이어였다. 나는 갓 박사를 수료한 30대 초반의 연구자였던 그가 논쟁의 다른 쪽 당사자인 조희연을 조목조목 매섭게 몰아붙인 글을 잊지 못한다. (정작 나중에 만나본 이상록은, 적어도 내가 이야기를 나눈 역사가 중 가장 부드럽고 따뜻한 인품의 소유자여서 적잖이 놀랐지만.) 또한 이상록은 《일상사로 보는 한국근현대사》(책과함께, 2006)나 《한국현대 생활문화사》(창비, 2016)에 공저자로 참여한, 한국사에 일상사와 생활문화사의 시각을 선구적으로 도입한 연구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두 개성이 맞물려 《자유민주주의》의 텍스트 비평은 도발적이면서도 깊이가 있으며, 지성사 연구가 자칫 빠지기 쉬운 공허한 관념론에 머물지 않고 사상과 현실의 낙차를 민감하게 의식한다. 고전적이면서도 독특한 지성사란 이런 의미다.
이 책에 대한 호의 가득한 서평을 쓴 한봉석의 말마따나 이상록은 얼핏 "백과전서"라 느껴질 정도로 풍부한 한국 자유민주주의의 결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노력한다. 그럼에도 《사상계》지식인의 자유민주주의론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가 가능하다. 첫째, "대의제"다. 여러 학자들이 지적했듯(최근에는 김민철,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 창비, 2023.) 대의제란 명백히 귀족정적 요소임에도 불구하고(그렇기에 김민철은 현대 자유민주주의란 기실 "선거자유주의"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한다), 《사상계》지식인들은 대의제를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으로 이해했다. 한국 국민의 낮은 "민도"에 대한 이들의 한탄이나 4.19를 학생과 지식인이 주도한 시민혁명으로 포장하려는 노력 역시 인민에겐 대표가 필요하다는 신념, 즉 대의제에 대한 믿음의 소산이었다.
둘째, "국민주권"이다. 이상록이 책에서 여러 번 언급한 정치사상사 연구자 문지영이 《지배와 저항》(후마니타스, 2011.)에서 이야기했듯 장준하를 비롯한 《사상계》지식인들은 민주주의를 누리는 주체를 "국민"이나 "민족"처럼 하나의 집단으로 이해했다. 개인의 개성과 자율성이 들어설 자리는, 적어도 《사상계》 지식인의 민주주의론에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무척 좁았다. 물론 "국민주권"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론은 6.3항쟁에서처럼 박정희 정부가 국민의 뜻을 무시했을 경우 강력한 투쟁의 명분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박정희 정부가 "국민주권"을 내세워 유신을 단행한 데서 알 수 있듯, 이는 다분히 양가적인 것이었다. (유신체제에 대한 분석이야말로 "대중독재" 연구자로서 이상록의 진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셋째, "근대화"다. 봉건과 정체, 낙후로부터의 탈피는 (그것이 정당했는가와는 별개로) 당시의 "시대적 과제"였던 만큼, 《사상계》 지식인들은 근대(화)라는 문제를 민감하게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산업화가 민주화에 선행한다고 여기든, 산업화와 민주화를 병행할 수 있다고 여기든 이들은 결코 산업이나 발전, 근대를 의식하지 않는 자유민주주의를 상상하지 못했다. 《사상계》지식인 사이에서도 민주주의를 수단으로 여기는 입장과 목적으로 여기는 입장이 공존했지만, 결국 근대라는 최종심급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상계》 지식인"이면서도 이러한 흐름에서 빗겨난 인물이 있다. 바로 함석헌이다. 역시《사상계》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썼고 이 책에 대한 애정어린 서평을 쓴 김건우가 예리하게 지적했듯, 함석헌에 대한 이상록의 관심은 어딘가 독특한 구석이 있다. 책의 저본이 된 박사논문에서는 따로 하나의 장을 마련했고 이 책에서는 본문 곳곳에 흩뿌렸다는 차이는 있지만, 김건우의 말마따나 "무리를 무릅쓰고서라도 함석헌의 비중을 도드라지게 서술"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김건우, <《사상계》를 연구하려는 이들이 통과해야 할 하나의 문>, 《역사비평》132, 2020, p.402.)
아닌 게 아니라 함석헌에 대한 이상록의 시선은 굉장히 따뜻하면도, 동시에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냉정하다. 함석헌은 장준하를 비롯한 다른 《사상계》 지식인들과 달리 개발/발전/근대로 수렴하지 않는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모색한 사상가지만, 그의 "민중"이란 실제 역사에 기반하지 않은 다분히 종교적인 개념이었다. 그런 만큼 현실의 민중이 함석헌의 기대와 조금이라도 어긋날 경우 자칫 (다른 《사상계》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민도"나 탓하며 이들에 대한 실망과 회의로 돌아설 위험이 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유신체제보다 더 강력한 "대중독재"의 가능성도 열어 놓고 있었다.
함석헌이라는 여러 모로 '튀는' 인물이 가진 빛과 그림자를 이상록은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가 글의 통일성을 깨뜨리면서까지 함석헌을 조명하는 이유는, 추측컨대 《사상계》바깥의, "자유"가 붙지 않는 "민주주의"로 나아갈 연결고리를 마련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김건우는 "개인적으로 이에 대해 저자와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다"고 했는데,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지 궁금하다.)
한봉석과 김건우 모두 이아기했듯 《자유민주주의》는 2011년에 나온 이상록의 박사논문을 저본으로 한다. 박사논문을 내고 이를 토대로 책을 내기까지 10여 년의 시간 동안, 이상록은 한국 현대사에서 대의제, 국민주권, 근대화로 수렴하지 않는 또다른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끝없이 모색해왔다. 선출된 대표 없이 인민이 스스로를 통치하고, 국민이나 민족이라는 집합적 주체의 이름을 빌리지 않으며, 근대의 개발주의와 발전주의를 문제시하는 민주주의란, 곧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문제제기에 다름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이상록의 "일상사 연구자"로서의 면목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인, 4.19 직후 인민이 학생과 지식인의 '지도'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간 과정은 그 점에서 퍽 의미심장하다. 이상록이 보여주고 싶었던 건 어쩌면 이 작은 저항과 전유의 조각들이 아니었을까.
이상록은 시종일관 민주주의란 그 자체로 선이 아니며,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자행된 부조리와 폭력 역시 직시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는 민주주의를 대의제, 국민주권, 근대화라는 속박에서 해방시킴으로써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열어젖히려는 시도로 읽힌다. 옛날 영화 제목을 빌리자면 "민주주의 일병 구하기"랄까. 그리고 그는 이미 또 한 권의 두툼한 단독 저서를 내도 될 정도로 훌륭한 연구를 숱하게 쌓아놓았다. 한국 현대 지성사 연구자에게는 든든한 밑천이자, 두려운 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