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시간』
최근 한국사 연구의 트렌드는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 역사학”이다. 국민국가를 당연한, 주어진 것으로 여기는 “방법론적 민족주의”를 벗어나, 네이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주체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중시하는 흐름이다. 현대사는 아마도 고대사와 더불어 ‘트랜스내셔널한’ 접근이 가장 활발한 시대일 것이다. 어쩌면 당연하다. 현대란 어떤 나라도 외따로 존재할 수는 없는, 필연적으로 다른 나라나 국제기구, 기업 등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시대니 말이다.
그렇다면 현대사 연구에서 ‘민족’이란 더 이상 유의미한 변수가 아니게 된 걸까? 그렇진 않다. 방법론, 다시 말해 역사를 이해하는 틀로서 의미가 없어졌을 뿐 ‘트랜스내셔널한’ 현대사회에서도 ‘네이션’은 여전히 중요하다. 특히 (이젠 “2민족 2국가”란 얘기도 나오지만) 하나의 민족이 두 개의 국민국가와 세계 각지의 디아스포라 공동체로 나뉜 “코리아”라면 더더욱. 한국 현대사는 이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굉장히 ‘글로벌하게’ 이뤄졌다는 점에서, ‘네이션’과 ‘트랜스내셔널’은 상충하기보다는 오히려 함께 간다고 봐야 맞을지도 모르겠다.
김종철의 『야만의 시간』 역시 민단계 재일코리안 사회단체인 한통련(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50년사를 통해 ‘네이션’과 ‘트랜스내셔널’이 복잡하게 얽힌 한국 현대사의 빛과 그림자를 보여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지은이는 한통련이 “반국가단체”로 낙인찍혀 무고한 사람들이 숱하게 고통 받고 오늘날까지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아픈 현실에 집중한다. 하지만 이 책의 주제의식을 보다 잘 나타내는 말은, 제목보다는 뒤표지에 적힌 “대한민국 국민은 한통련에 큰 빚을 지고 있다”에 가깝다. 한통련은 한국의 통일과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고, 그로 인해 말 못할 고초를 겪었으나, 아직까지 대한민국 국민은 그 빚을 갚지 못하고 있다.
한통련은 그 탄생부터 한국 현대 정치사와 밀접히 얽혀있다. 한통련의 기원 중 하나인 재일한국청년동맹(한청)부터가 4·19혁명에 큰 자극을 받아 “4월혁명의 이념을 자신들의 이념으로 삼아 그 이념을 실천해가는 조직”으로 스스로를 정의했다. 또 다른 기원인 “유지간담회” 역시 5·16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며 “민단의 여당화”를 꾀한 단장 권일에 맞서 김재화와 배동호가 주축이 돼 결성한 민단 내 개혁파였다. 이들은 한국 내 학생운동 세력 및 야당과 연대해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벌이는 등 민단과 한국의 민주화를 나눠서 생각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찬반과 맞물린 민단 내 대립은 1967년 한국 총선을 기점으로 폭발한다. 공화당이 권일을 전국구 의원으로 공천하기로 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신민당의 유진산은 김재화를 공천하겠다 약속했는데, 유지간담회가 신민당에 보낸 4,000만 엔을 정보부가 총련의 공작 자금으로 몰고 간 것이다. 급기야 1971년 민단 정기대회에서 정보부는 사실상 조작된 것이나 다름없는 녹음테이프를 근거로 유지간담회 측이 조총련과 함께 한국 정부를 전복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며 단장 선거를 파행으로 몰고 갔다. 결국 1972년 7월 7일 민단 중앙은 유지간담회의 거점인 민단 도쿄본부와 한청, 한학동을 “민단 와해를 기도하는 불순분자”로 규정하며 산하단체에서 제외했다.
갈 곳을 잃은 (구)민단 개혁파는, 역시 박정희 정부에 의해 해외를 떠도는 망명객이 된 김대중을 만나며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1973년 3월 21일 김대중의 하코네 연설을 계기로 이들은 민단과 한국의 민주화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의기투합했다. 당시 7·4남북공동성명의 여파로 재일코리안 사회에서도 민단과 총련 사이에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나, (구)민단 개혁파는 총련과 선을 긋고 “선민주 후통일”을 분명히 해달라는 김대중의 요구를 수용하면서까지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한통련의 전신) 일본지부 결성에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이 납치되는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구)민단 개혁파는 일본 시민사회에 이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나 자작극이 아닌 박정희 정부에 의해 벌어졌다고 호소하며 김대중 구명운동을 벌였다. 그렇게 한민통은 김대중 구출운동의 중심이 됨으로써 일본사회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알리고,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김대중을 한국 민주화운동의 얼굴로 부각시킬 수 있었다.
김대중과의 만남은, 그러나 한민통에겐 크나큰 시련이기도 했다. 김대중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군사정권은 그가 의장을 맡았던 한민통에 “반국가단체”라는 낙인을 찍었다. 박정희 정권은 일본에서의 차별에 낙담해 ‘고국’을 찾은 재일코리안 청년들을 간첩으로 몰아갔고, 이들과 별다른 접점도 없던 한민통은 보안사에 의해 총련의 지령을 받고 한국에 간첩을 파견한 반국가단체로 탈바꿈했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김대중을 사형시키기 위해 그의 한민통 의장 경력을 국가보안법에 따른 반국가단체 수괴 혐의로 둔갑시켰다.
이는 김대중 개인에게도 큰 불행이었지만, 한민통에게도 그만큼의 비극이었다. 한민통이 반국가단체로 규정됨으로써 한민통에서 활동한 사람들에게도 여러 차별과 제약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여권을 발급받지 못해 입국도, 투표도 할 수 없는 한통련 의장 손형근, 한국전쟁 당시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출전했음에도 한민통 활동 경력 탓에 보훈보상금을 받을 수 없게 된 곽동의, 한통련 회원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이어오던 거래처마저 빼앗긴 허경민은 한통련(한민통은 1989년 한통련으로 개편)에 새겨진 반국가단체라는 낙인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프게 보여준다.
이처럼 한통련(한민통)의 50년 역사는 한국의 국가폭력, 그리고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대한민국 국민이 한통련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물론 한통련의 목표가 오로지 한국의 민주화였던 것만은 아니다. 『야만의 시간』에서 가장 가슴 벅찬 대목 중 하나인, “보통의 일본인”이 되고 싶었던 오사카의 재일코리안 고등학생 김창오가 ‘의식화’되는 순간은 이를 잘 보여준다. 평범한 고등학생답게 멋 내기에만 관심이 있던 그는 도쿄 우에노공원의 판다를 보여준다는 형의 꼬임에 따라간 한청 집회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김종철과의 인터뷰에서 그때의 기억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제가 아는 조선 사람은 가난한 집에 살면서 육체노동을 하고 술 취해서 집에 오면 부인과 아이들을 때리는 그런 가난하고 야만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런 인상밖에 없었는데, 거기 모인 동포들이 당당하게 자기 나라의 장래를 이야기하는 걸 보고는 정말 충격이었어요. 그 모습을 보고는 한청에 가입했죠.”(p.209.)
김창오에게 한청이란 단순히 한국의 민주화를 지원하는 단체가 아니었다. 그동안 부끄럽게 여기던 조선/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새롭게 긍정할 수 있게 해주는, 나아가 조선/한국인으로서 일본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히 목소리를 내며 살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 지원이라는 대의와 일본사회 내 마이너리티로서 재일코리안의 존엄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서로 맞물려 있었던 것이다. 그 점에서 재일조선인(그는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다) 3세 역사학자인 정영환이 재일코리안을 의도적으로 ‘민족’과 떨어뜨려 서술하려는 최근의 연구경향과 거리를 두며, 이들에게 조국에 대한 공헌과 외국인으로서 권리 획득이 별개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지적한 것은 곱씹을 가치가 있다.
그렇다고 한통련(한민통)의 50년 역사가 전적으로 ‘민족’이란 틀 안에 갇히는 것은 아니다. 기실 한통련(한민통)의 “눈부신 성과”는 국제사회의 연대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한민통은 윤이상의 소개로 1977년 도쿄에서 열리는 사회주의인터내셔널 정상회담에 참석한 빌리 브란트를 만났고, 그에게 한국 민주화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듬해 6월 본과 런던에서 열린 한국 민주화에 대한 국제회의는 그 결실이었다. 사회주의인터내셔널이 1980년 6월 오슬로에서 열린 간사회에 한민통을 공식 옵서버로 초청한 것 역시 그 연장선 위에 놓여있다.
한민통이 주최하지는 않았지만, 김대중이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자 일본연락회의가 주도한 집회에 일본 시민 1만 7000여 명이 참가해 김대중의 석방을 외치기도 했다. 김대중의 1심 선고가 있던 날 전일본국철노동조합은 일본의 모든 기차역에서 항의의 기적을 울렸으며, 전일본항만노동조합도 일본의 모든 항구에서 한국 선박의 선적과 짐 내리기를 거부했다. 김종철의 말마따나 “이웃나라의 민주화운동을 위해 한 나라의 시민이 이처럼 깊이 연대투쟁을 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전례가 드문 일이었다.”(p.235.)
요컨대 한통련(한민통), 나아가 한국 현대사는 전적으로 ‘내셔널하지도’, 그렇다고 전적으로 ‘트랜스내셔널하지도’ 않다. 같은 민족을 뿌리로 삼는 두 개의 국민국가, 그리고 해외의 여러 디아스포라 공동체에게 민족이란 굉장히 중요한 정체성이었으며, 이를 둘러싼 협력과 경쟁이 국가의 경계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앞서 이야기했듯 애초에 한국 현대사의 ‘트랜스내셔널한’ 교류 대부분이 ‘네이션’을 매개로 이뤄진 것이기도 했다. 물론 미국과 일본을 비롯해 정말로 ‘다른’ 네이션들이 미친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만큼 한국 현대사를 이해할 때는 민족과 세계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진부한 얘기지만) 양자를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문제의식과 시선이 필요하다. 지은이가 의도한 바인지는 모르겠지만, 『야만의 시간』은 내게 그런 한국 현대사 연구의 가능성을 제시한 책처럼 읽힌다. 나 같은 얼치기 역사학도의 기를 죽이는, 기자의 취재란 이런 것임을 보여주는 촘촘한 서술도 인상적이다. (좋아하는 선생님께선 늘 역사학도가 기자를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더랬다.) 재일코리안 연구는 물론 국가폭력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연구할 때도 중요하게 언급될 이 책을, 『역사문제연구』나 『역사학연구』, 『역사비평』 같은 훌륭한 학술지에서 다뤄주길 바라는 건 그래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