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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Sep 17. 2023

사상사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

이상민, 『여말선초 덕·형 절충과 유교 이념의 제도화 과정 연구』

교화를 통해 조선의 “유교화”를 들여다보다     


 두고두고 부끄러운 글이 있다. 대학원 학업계획서다. 졸업 후 입학한 교육대학원은 나와 잘 맞지 않았고, 뒤늦게 “이 산이 아닌가벼” 싶어 도망치듯 일반대학원 입학을 준비했다. 문제는 도무지 학업계획서를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연하지, 공부하고 싶은 게 없었으니까. 그래도 어떻게든 대학원엔 가야 하므로 벙벙하게 한 사회의 “OO화”를 공부하고 싶다는 내용으로 글을 썼고, 어찌어찌 붙었다. 나중에 내 학업계획서를 본 후배는 비난이나 조롱의 의도는 하나도 없이 “형, 이렇게 써도 대학원 붙는군요?”라며 감탄했고, 교수님들도 어이가 없으셨는지 면접 때 “이런 식으로 학업계획서를 쓴 사람은 없는데, ‘OO화’가 뭔지 설명 좀 해주겠어요?” 하고 물으셨지만 말이다. 아깝다, 그때 떨어뜨리셔야 했는데.   

   

 물론 대충 쓴, 부끄러운 학업계획서라 해서 거기 담긴 내용까지 부끄러운 건 아니다. “OO화”는 학부 시절부터 이어온, 내 오랜 관심사니. 그게 유교든, 문명이든, 근대든, 민주주의든, 페미니즘이든, 한 사회가 “OO화” 되었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OO”의 논리나 체계가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적인 원리가 되었다는 뜻인가, 아니면 사회 구성원의 사소한 행동거지 하나하나까지 “OO”에 따라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뜻인가? 나아가 단순히 “OO”이 소개되고 수용되는 수준을 넘어, 사회의 “OO화”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과 실천이 필요한가?     


 여말선초 사상사를 공부하는 이상민 역시 사회의 “OO화”, 그 중에서도 “유교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진 연구자다. 그의 따끈따끈한 박사논문 『여말선초 덕·형 절충과 유교 이념의 제도화 과정 연구』(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3.)는 조선 전기 사회의 “유교화”를 도모한 다양한 시도와 노력, 충돌과 굴절을 “교화”에 초점을 맞춰 보여준다. 왜 하필 교화냐고? 글쎄, 이상민의 의도를 오롯이 파악하긴 어렵겠지만, 아마도 교화야말로 조선사회의 “유교화”가 이뤄지는 구체적인 과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소재여서가 아닐까?     


나라가 만든 유교 지식인의 “새사람 되기(自新)” 프로젝트 


 익히 알려졌듯 고려 말의 혼란이란 한반도 역사에서 몇 안 되는 왕조교체를 이뤄낼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농업생산력은 발전했지만 토지는 몇몇 권세가의 손 안에 들어갔고, 민(民)은 농지를 떠나 유민이 되었으며, 가족 사이에서도 토지를 둘러싼 쟁송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러한 혼란은 당시 유학자들에게 “인륜의 위기”로 받아들여졌는데,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이들 “유교 지식인”이 탄생한 배경이다. 이상민은 유교 지식인이 (“신진 사대부론”의 말마따나 자생적으로 성장한 지방의 중소지주가 아니라) 국가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무신 집권기부터 문벌 관료를 견제·대체하고자 과거시험의 횟수와 합격자 수가 대폭 증가했고, 뒤이은 원 간섭기에도 일종의 명예직인 “첨설직”을 받은 인물들이 늘어나며 관직은 있지만 할 일은 없는 “한량” 집단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나라가 만든’ 관료 예비군(a.k.a. 룸펜)이 성리학을 수용하고, 조선사회의 유교화를 이끌었다는 사실은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했을 때 퍽 흥미롭게 느껴진다. 일찍이 피터 볼이 이야기했듯 송대 중국에서 성리학은 과거에 급제할 가능성이 없는 지방 지식인에게 중앙에서 관직을 맡지 않아도 천하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길을 제공했다. 약간 다르긴 하지만, 와타나베 히로시나 박훈의 말마따나 에도시대 일본에서도 성리학은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었던 하급 사무라이들에게 자신들도 “공론(公論)”의 대변자라는 효능감을 심어줬고 말이다.      


 요컨대, 중국과 일본 모두 성리학은 1. 경제가 성장하고 출판문화가 발전했지만, 2. 나름의 제약(중국은 한정된 관직, 일본은 신분제) 앞에서 좌절하던 지식인층에게, 3. 정치참여를 정당화하는 강력한 도구가 되어주었다. 반면 한국은 1. 중국이나 일본처럼 드라마틱한 경제성장이나 출판문화 발전이 관찰되지 않는 상황에서, 2. 나라가 남발한 관직을 갖고는 있었지만 딱히 할 일은 없었던 관료 예비군이, 3. 사회혼란을 타개할 방책으로서 성리학에 주목했다. 이러한 차이가 한국의 유교화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라 생각하지만, 일단 우리의 주제인 교화로 넘어가도록 하자.     


 나라가 만들었든 어쨌든 간에, 고려 말 유교 지식인(피터 볼의 오글거리는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의 사”)은 성리학이야말로 사회혼란을 잠재우고 나라를 평안케 할 도구라 여겼다. 문제는 성리학적 질서를 사회 곳곳에 뿌리내릴 방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교란 기본적으로 “무위(無爲)”의 정치를 이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무위가 무엇인가, 행함이 없이 다스리는, 작위(作爲)를 지양하고 오로지 덕에 의존하는 정치다. 그러니까 우리의 유교 지식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역설에 직면한 셈이다. 


 물론 유교 지식인들이라고 마루야마 마사오의 단정처럼 “주자학적 낙관주의”에 빠져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매우 치열하게, 무위의 이상 정치론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사회를 성리학적으로 ‘개조할’ 방법을 모색했다. 교화란 바로 이러한 고민 끝에 발견한 해답이었다. 백성을 잘 가르쳐 ‘알아서’ 따르게 한다면 구태여 지배층이 무언가를 ‘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의 단계에 이르러 구체화된, “새사람 되기(自新)”란 여말선초 유교 지식인의 지향점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처럼 무위의 이상 정치를 지향하고, 이를 위해 민의 교화에 집중하기로 한 이상 제도=형벌은 당연히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제도=형벌이라는 ‘작위적인’ 수단은 무위와 교화를 정면으로 거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제도=형벌을 지양한다 해도, 이를 통치에서 완전히 배제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 만큼 교화의 이상과 형정의 현실을 양립시키는 일은 조선전기 통치의 중요한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고려 말까지만 해도 원의 법제(法)와 고려의 제도나 풍속(人) 사이의 조화를 의미했던 “인법병용(人法竝用)”이라는 말이, 세종 대에 이르면 조선의 법제(法)와 이른 운용하는 지배층(人) 사이의 관계를 조화해야 한다는 의미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이 시기 형정의 적용, 구체적으로 이를 교화의 이상과 최대한 배치되지 않게끔 운용하는 일이 고민거리로 떠올랐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조선 전기 지배층은 형정을 교화를 위한 보조적 수단으로 명확히 규정하면서도 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디까지 적용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심하고 논쟁을 벌였다. 이상민의 말마따나 이들에게 형률이 궁극적으로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교화적 형률”이었다 해도,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저마다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다른 생각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논의되고, 충돌하며 나름의 방향을 잡아간 때가 (적어도 논문을 읽고 느낀 바로는) 세종 시대였다. 특히 세종과 허조의 대립이 두드러지는데, 둘 사이의 전선은 민의 도덕적 능력에 대한 신뢰나 교화의 가능성만 놓고 그어진 것은 아니었다. 민이 직접 신정하는 신문고 제도가 여러 기관을 거쳐 임금의 재가에 이르는 형벌 처결의 프로세스를 어그러뜨릴 수 있다고 우려한 데서 알 수 있듯, 허조는 민의 교화만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자칫 제도의 일관성과 체계성이 무너질 여지가 있다고 보았다. 반면 세종은 민의 윤리적 심성을 신뢰한다는 전제에서, 이들이 교화를 통해 “새사람”이 될 여지를 주려면 제도=형정은 탄력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쪽에 가까웠다. 결국 세종과 허조의 논쟁은 유교국가 조선에서 법이란 무엇이어야 하는지, 제도적 완결성이 우선인지 아니면 교화를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의 탄력성은 필요한지 역시 겨냥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논문을 읽으며 세종 시대를 상징하는, 나아가 세종 자신에게 가장 필요했던 신하는 황희나 장영실, 박연이 아니라 허조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시백 화백은 그를 “미스터 쓴소리”라 평가하며 당시까지 그 별명으로 불리던 조순형 의원의 얼굴을 본 따 그렸는데, 허조에겐 단순히 꼬장꼬장한 보수주의자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중에 이상민이 “허조 평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대한 재미있는 인물평을 써주면 좋겠다.)      


성종의 교화, 굴절인가 완성인가     


 세종 시대 여러 논쟁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꾸준히 추진된 “새사람 되기” 프로젝트는, 세조를 거쳐 성종의 시대에 들어서며 그 성격이 달라진다. 성종과 관료들은 인륜을 거스르는 강상죄야말로 나라의 기간을 뒤흔든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했고, 가급적 형벌을 관대하게 적용코자 했던 이전까지의 분위기를 뒤집어 형벌을 엄정히 집행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교화적 형벌”을 통해 민을 뉘우치게 하고, 궁극적으로 “새사람”이 되게 한다는 세종 시대까지의 이상 역시 보다 정교하고 체계적인 매뉴얼을 갖게 되었다. 체포 이전에 죄를 스스로 고백하는 자수와 자백이야말로 “뉘우침(自新)”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한 절차라는 인식아래, ‘진정한’ 자수란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이 마련되기 시작한 것이다.     


 성종 시대의 이러한 ‘달라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는, 아마도 이상민의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일 것이다. 일단 이상민은 이를 무위와 덕치라는 이상과 형벌이라는 현실이 “보다 체계적으로 결합”하고, 그 내용이 “실질화”한 과정으로 설명한다.(p.192.) 문제는 덕과 형의 ‘체계적인’ 결합이, 과연 세종 시대까지 왕과 관료들이 바라던 바였냐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논문을 읽다보면 성종 시대에 이르러 이른바 “덕형절충”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화한다는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적어도 세종 시대까지 왕과 대부분의 관료들은 형벌이 가급적 피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하는 ‘필요악’이라는 인식아래, 굳이 형벌을 써야만 한다면 가급적 민이 “새사람”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사용하자는 공감대를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성종 시대에는 어떻게 하면 형벌과 교화를 체계적으로 결합할지, 나아가 어떻게 형벌을 통해 교화를 실현할지가 지배층의 주된 관심사였다고 느껴진다. 이상민의 말마따나 특수한 사례일 뿐이지만, 또한 성종이 아닌 세조 대 이야기긴 하지만 “형벌을 쓰는 지극한 덕(用刑之至德)”이라는(p.196.) 표현까지 등장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지배층이 형벌을 불가피한 ‘필요악’이 아니라, 오히려 덕을 실현하는 유용한 수단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단면일 수 있다.   

   

 감형의 성격 변화 역시 논쟁적이다. 세종 시대까지는 감형이 민을 “새사람(自新)”으로 만드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었다면, 성종 시대에 이르러서는 민이 정말로 뉘우쳤는지(自新) 체계적인 검증을 거친 뒤에야 감형이 이루어진다. 다소 거칠게 도식화하자면, 감형이 교화의 ‘수단’에서 ‘결과’로 변화한 것이다. (이상민이 “自新”을 세종 시대까지는 “새사람”으로, 성종 시대부터는 “뉘우침”으로 번역하는 것 역시 퍽 의미심장하다.) 아울러 형정 운영에서 임금이나 수령의 임의적 판단이 아닌, 여러 법원(法源)들을 검토해가며 매뉴얼에 따라 결정하는 절차가 확립된 것 역시 다르게 이해할 여지가 있다. 문외한의 입장에서 논문만 읽고 하는 이야기라 조심스럽지만 세종 시대까지는 ‘일부러’ 매뉴얼을 만들지 않았다고, 다시 말해 임금과 수령의 임의적 판단이 개입할 여지를 마련해야 오히려 교화가 가능하다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성종 시대의 엄격한 법집행과 체계적인 매뉴얼의 확립은 덕·형 절충의 ‘자연스러운’ 귀결인가, 아니면 세종 시대로부터의 단절 혹은 변화인가? 만일 후자라면, 이러한 단절 혹은 변화를 이끌어낸 원인은 무엇인가? 결국 이는 세조 시대에 대한 평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이상민은 세조 시대의 ‘뒤틀림’을 굉장히 자세하게, 특히 군역 문제와 관련지어 설명한다. 구체적으로 세조는 군역 평준화·군액 증가를 위한 정책을 추진했는데, 이는 군액은 크게 증가시켰지만 원래 의도와 달리 양인을 줄이고 노비를 늘리는 역효과를 초래했다. 세조~성종시기인 15세기 후반 『실록』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전국적으로 준동하던 도적 떼는 이러한 민의 유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이상민은 진단한다.      


 이상민의 말마따나 당시 지배층은 빈발하는 도적, 그리고 군역을 피하고자 산간이나 섬으로 도망하는 피역민(避役民)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추측컨대 이들은 도적과 피역민이 세조 시대의 부정적인 유산이라는 점 역시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민은 이러한 치안 위기가 “지배방식으로서의 덕·형 절충에 보다 실질적이고 체계화된 대안”을 요구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p.242.) 그렇다면 결국 세조 시대의 ‘뒤틀림’이야말로 종래의 덕·형 절충에 변화를 가져온 원인이라는 이야긴데, 그 ‘뒤틀림’을 보다 정교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쉽게 말해, 단순히 “어우 세조 시대 보법 때문에 도적이 너무 많이 늘어나네, 형벌을 좀 더 엄격히 적용해야겠어!”인가, 아니면 “법을 느슨하게, 탄력적으로 적용해서 민의 교화를 기대하는 건 세종 같은 성군의 시대나 가능한 일이었어. 세조 같은 폭군의 시대에는 느슨한 법이 오히려 폭정을 부르는구나. 차라리 누가 왕이 되던 큰 변화가 없게끔 법을 체계적으로 정비하자!”인가? 

     

 아직까지도 교과서에서는 조선의 제도 및 문물 정비가 개국 이래 큰 단절 없이 이어져 성종 시대에 ‘완성된다고’ 설명하곤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사 연구자 사이에서는 (그 성격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세조 시대 크나큰 ‘뒤틀림’이 있었고, 그 부정적 유산이 이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었다는 데 대충 의견의 일치를 본 듯하다.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이상민의 논문을 읽으며 성종 시대 일단락된 ‘제도화’가 이전부터 일관되게 추진되어온 게 아니라 세조 시대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뤄진, 다시 말해 같은 ‘제도화’라도 세종 시대까지의 그것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으리라는 인상을 받기까지 했다. 물론 문외한의 인상비평이지만, 비단 덕·형 절충뿐 아니라 조선전기 전반을 이해하는 데 세조 시대의 ‘뒤틀림’이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은 확실한 것 같다. 그 점에서 이상민의 논문은 세조와 뒤이은 성종 시대를 새롭게 바라보는 흥미로운 논점들을 여럿 던져주는, 무척이나 재미있고 또 독특한 연구다.      


사상사의 역설을 돌파해내는 법     


 혼자서 “사상사의 역설”이라 부르는 게 있다. 사상사는 잘 쓰면 쓸수록 오히려 비판받기 쉽다는, 일종의 자조이자 푸념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상사란 해당 시대를 살아간 지식인들이 남긴 관념의 세계를 다룬다. 그런 만큼 아무리 지식인의 삶과 사상을 정치하게 분석한들, 지식의 지도를 세밀하게 그려낸들, 독자는 “그 바깥엔 뭐가 있었지?”하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최인훈의 『회색인』 속 독고준이 아무리 모더니티니, 내셔널리즘이니, 식민지니 어렵고 장황한 얘기를 한들, 당시 한국인 태반이 조선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는 한마디면 끝이란 이야기다. “그래 사상사 좋아, 근데 그게 전부야?”는 심지어 글을 읽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그러나 반박하기 쉽지 않은 강력한 “가불기(가드 불능 기술)”다.     


 그런 만큼 사상사 연구자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주제 연구자에 비해 자기 연구의 쓸모를 예민하게 의식할 수밖에 없다. 사상사 연구자가 보다 ‘중요하다’ 여겨지는 정치나 경제를 사상과 엮는 건 그래서다. 적어도 순수한 사상사보다는 쓸모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럴 경우 자칫 사상이 정치나 경제와 같은 위상을 갖고 병렬적으로 놓이거나, 심지어는 정치나 경제의 종속변수로 다뤄짐으로써, 명색이 사상사를 내걸었음에도 사상사가 아닌 무언가가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잘 쓰면 그게 무슨 쓸모가 있냐는 질문을 받고, 쓸모를 증명하면 사상사가 아니게 되어버리다니, 아마도 이래서 다들 사상사를 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상민 역시 내가 알기론 누구보다 사상사의 쓸모를 깊이, 그리고 힘들게 고민해온 연구자다. 특히 그는 “김자(金子)” 김용섭의 영향이 여전히 남아있는, 사회경제사의 전통이 강한 연세대에서 공부한 만큼 자기 연구의 쓸모를 증명하는 일은 ‘실존적’ 차원의 문제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상민의 박사논문이 무척이나 반가운, 그리고 (앞으로 공부를 할지 안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상사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적잖은 위로가 된 건 그래서다. 그는 (추측컨대) 자신을 오랜 시간 괴롭혔던 사상사의 쓸모를 누구보다 멋지게 증명해냈다. 제목만 보면 얼핏 제도사처럼 느껴지지만, 그의 논문은 지극히 ‘사상사적’이라고 감히 자부한다. 사실 나는 그가 일부러 제도라는 ‘딱딱한’ 주제를 골랐다고까지 느껴지는데, 성리학이라는 사상이 조선사회에 어떻게 수용·정착·굴절되는가를 보여주기엔 제도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유교란 기본적으로 무위의 정치를 지향한다. 물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에, 결국 현실정치에선 어떻게 작위의 불가피성을 최대한 줄여나가며 무위를 실현할지가 관건이 될 수밖에 없다. 제도란 이 무위와 작위를 둘러싼 치열한 고민과 투쟁이 벌어지는 장(場)이다. 동시에 제도는 성리학이라는 추상적인 이념이 구체적인 현실에 뿌리내릴 수 있게끔 해주는 매개이기도 하다. 제도를 통해 우리는 “손 안 대고 코 풀기”에 버금가는 난제를 풀고자 고군분투한 성리학자들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의 생각이 현실과 마주하며 어떤 화학작용이 일어나는지도 지켜볼 수 있다.   

  

 실제로 이상민은 교화를 둘러싼 당대 A급 지식인들의 생각과 논쟁을 정교하게 풀어내면서도(먹물들의 현학적인 말장난에 감탄하는 일 역시 사상사의 묘미 아니겠는가!), 그것이 제도를 거쳐 현실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는 과정 역시 세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가령 세종과 허조가 민의 교화 가능성이나 법질서의 일관성·체계성을 두고 논쟁한 대목은 지극히 ‘고적적인’ 사상사의 문법을 따른다. 하지만 이상민은 돈이 없어 향교의 교원조차 제대로 파견하지 못한 국가, 그리고 지배층의 의도와 달리 손가락을 자름으로써 효행을 증명코자 한 백성들을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교화를 향한 유교 지식인의 노력이 헛짓거리였냐면, 그건 아니다. 백성들은 다만 자신의 방식으로 교화를 실천했을 뿐이다.     


 요컨대, 이상민은 무위의 이상이 제도를 통해 현실화하는 과정에 집중함으로써 사상사가 가장 자주 그리고 쉽게 받는 비판인 “현학적인 말놀이”의 혐의를 성공적으로 피해갔다. 동시에 그는 “(추상적인) 사상이 (구체적인) 현실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라는, 사상사를 사상사답게 만들어주는 문제의식 역시 성공적으로 지켜냈다. “새사람 되기(自新)”과 “덕·형 절충”처럼 자신이 야심차게 제시한 개념을 중간에 흐지부지 뭉개버리지 않고 끝까지 밀고나가는 점 역시 인상적이다. 감히 말하자면 그의 논문은 사상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너무나 멋지게 보여준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이상민의 논문은 조선의 “유교화”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일단 확실한 건 “유교화”란 단번에 이뤄지는 전환이 아니라, 오랜 세월이 소요되는 굉장히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비단 “유교화”의 (일단은) 대상인 민까지 갈 것도 없이, 이를 기획하고 실행한 유교 지식인 역시 저마다 “유교화”에 대한 생각이 다 달랐다. 치열한 논쟁과 고민을 거쳐 조정의 방침이 정해진들, 지방의 유교 지식인이나 민이 이를 받아들이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그럼 “유교화”란 기실 아무 것도 아니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진지한 신념에 의해서든 세속적 욕심에 의해서든 도덕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혹은 그렇게 보이고자 하는 열망은 지배층에서 민까지 널리 퍼져갔다. 아울러 개인의 도덕성을 객관적으로 증명하고 평가할 수 있다는 믿음 역시 성종 시대를 거치며 자리잡아갔다. 그렇다면 이러한 열망과 믿음은 이후 조선사회를 어떠한 방식으로 바꿔갔는가? 그 역동적이고 변화무쌍한 과정이야말로, 아마도 이상민의 다음 관심사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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