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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May 07. 2024

기예로서 돌봄과 지속가능한 자기계발 혹은 자기착취

『장인과 닥나무』,『우리의 관계를 돌봄이라 부를 때』,『울산 디스토피아』

이정 선생님의 『장인과 닥나무』는 생각할수록 훌륭한 책이다. 펼쳐볼 때마다 정말 다양한 각도에서 오밀조밀 뜯어볼 여지가 많다며 감탄하게 되는데, 요새는 우리가 ‘위대한’ 발명과 혁신만큼이나 ‘일상적인’ 유지·보수·관리에도 주목해야 한다는 대목을 곱씹고 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내가 조교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다음 학기부터는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조교는 가르침을 보조한다는 뜻에서 알 수 있듯 정말 유지·보수·관리만을 위해 만들어진 자리다. 비유하자면, 교수와 학부생, 대학원생, 대학(원) 행정팀 사이에 적절하게 파이프를 뚫어주는 배관공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사실 조교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난 예나 지금이나 돈 내고 하는 일보다는 돈 받고 하는 일이 훨씬 힘들고, 그런 만큼 대학원생은 직장인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조교가 중요한 일이 아니냐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비록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아니지만, 이미 존재하는 무언가가 매끄럽게 돌아갈 수 있게끔 여러 방면에서 신경을 쓰며 발품을 팔아야 하는 일이니 말이다. 다른 원생들과도 하는 이야긴데, 조교 일이란 집안일과 비슷하다고 종종 생각한다. 그만큼 돌봄노동의 성격도 강하고.     

 

생각해보면 내 군생활도 전형적인 유지·보수·관리의 영역에 있었다. 나는 유치원에서 장애를 가진 어린이를 돌보는 일을 했는데, 비단 돌봄노동뿐 아니라 유치원이라는 조직의 성격상 거의 모든 일을 다 했다. 사실상 유치원 소사 아저씨...같은 존재였는데, 이 역시 적성에 꽤 맞았다. 한 번 쓴 종이를 버리지 않고 북방의 추위를 견디는 겨울 외투로, 가벼운 밥그릇으로, 튼튼한 신발로, 아름다운 공예품으로 재활용한 조선 사람들처럼 나도 유치원에서 끊임없이 심고, 뽑고, 고치고, 만들고, 붙이고, 쓸고, 돌봤다. 물론 열심히 해도 크게 티가 나는 일은 아니었지만, 조교 일과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돌아가게 하는’ 재미가 있었다.      


오늘 (아주 늦게) 《유레카》에 서평 원고를 넘긴 『우리의 관계를 돌봄이라 부를 때』 역시 일상적 유지·보수·관리의 기예로서 돌봄의 가치에 새롭게 주목한다. 돌봄이란 서로 관계를 맺고, 상대방의 다름을 헤아리며 부족함을 채워주는 일이다. 돌봄이 곧 관계인만큼, 정확히 관계를 맺는 이상 돌봄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만큼 돌봄은 곧 삶이나 다름없다. 물론 돌봄은 아무런 경제적 가치도 만들어내지 못하지만, 돌봄이 없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그렇기에 두 지은이는 말한다, 지금까지는 “돌봄 때문에 일을 못해!”라 말해왔다면 이제는 “일 때문에 돌봄을 못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돌봄 때문에 일을 못하는 게 아니라, 일 때문에 돌봄을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란 어떤 사회일까? 적어도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리고, 서로를 연결해주며, 무언가를 ‘돌아가게 하는’ 능력이 지금보다는 훨씬 값지게 여겨지는 사회일 것이다. 대단한 발명이나 혁신만큼이나 일상의 소소한 유지·보수·관리 역시 중요할 테고 말이다. 요새 고민하는 게 바로 이런 시민의 덕목, 혹은 기예로서 돌봄이다. 우리는 인간이 사회적/정치적 동물이란 말을 너무 자명하게 받아들인 나머지 그러한 사회성/정치성이 마치 자연스레 주어지는 양 착각하곤 한다. 내가 생각하기엔 돌봄, 혹은 유지·보수·관리 역시 적잖은 노력과 연습이 필요한 일이다. 어느 정도는 재능의 영역이기도 하고.      


기예로서 돌봄을 생각할 때마다 턱턱 걸리는 책이 양승훈 선생님의 『울산 디스토피아』다. (언젠간 꼭 긴 서평을...) 이 책은, 물론 나 혼자만의 생각인 것 같지만, 결국 자기계발에 대한 이야기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자면, 『울산 디스토피아』는 자기계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간 자기계발의 방식과 대상이 아주 한정적이었다는 게 문제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그간 한국에서 자기계발이 가능했던 집단은 수도권/남성/인서울/화이트칼라뿐이었고, 나머지(비수도권/여성/지방대/블루칼라)는 사실상 방치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그간 자기계발이 일부 집단에게나 겨우 허락되었다는 사실은 자기계발을 할 수 없었던 나머지 집단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에도 큰 비극이다. 이제는 이들 역시 치열하게 자기계발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한국의 성장과 번영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울산 디스토피아』는 수도권/남성/인서울/화이트칼라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자기계발을 할 수 있게끔, 다양한 자기계발의 루트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수도권/남성/인서울/화이트칼라가 아닌 나머지의 미래는 물론, 대한민국 전체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울산 디스토피아』를 읽는 내내 가장 강하게 느껴졌던 감정은 이대로는 망한다는 위기의식이었다. 양승훈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간 내버려둔 “6~25등”의 아이들도 치열하게 자기계발, 혹은 자기착취를 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마련해주지 않는다면 한국은 곧 중국에게 뒤처지고, 끝내 주저앉고 만다.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1~5등”의 아이들만 달달 볶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물론 이는 비단 대한민국뿐 아니라 “6~25등”의 아이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중·고등학교부터 교육은 그들에게 적절한 목표를 준 적이 없고 부족한 점을 채워준 적이 없다.”(양승훈, 「6~25등 이야기」, 《경향신문》, 2017. 07. 02.) 자기계발과 자기착취는 엄밀히 구분되지 않는다, 고 생각한다.      


요컨대, 『우리의 관계를 돌봄이라 부를 때』와 『울산 디스토피아』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대로는 망한다!”를 외치고 있으며, 파국에 맞서기 위한 나름의 해결방안을 제시한다. 『우리의 관계를 돌봄이라 부를 때』는 돌봄 위기, 나아가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돌봄 인프라’가 되어 시민의 의무로서 돌봄을 나눠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신 경제적 생산성이나 효율성은 어느 정도 내려놓아야 하고 말이다. 반면 『울산 디스토피아』는 대한민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지속가능한 자기계발 혹은 자기착취의 프로세스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새 비관적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어쩌면 한국의 비극은 상충하는 듯 보이는 두 주장 모두 무척이나 ‘맞는 말’이라는 데서 오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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