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때 나는 엄마가 차린 구제 옷가게의 일을 가끔씩 도왔다. 사장인 엄마가 바쁘거나 아파서 출근이 늦어질 때 대신 가게를 보는 일이었다. 손님들은 나를 좋아했지만 엄마를 향한 애정과 신뢰에는 비할 바가 못 됐다. 모두 그녀가 출근하기만을 기다리며 옷을 골랐다. 그녀의 덕과 품으로 굴러가는 가게이기 때문이었다. - 이슬아 산문집 「심신단련」의 ‘모녀와 출판사’ 중 -
시내에 오랜만에 나왔다.
‘여름이니까’(가을이니까~ 봄이니까~) 아주 오랜만에 머리를 했고, 별다른 볼일은 없었으니 그대로 귀가하면 되었다. 그렇긴 하지. 한데. 입가가 식 올라간다. 볼일은 만들면 되고, 설레는 일에 깊은 고민은 필요 없다.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발길은 도울뿐.
소도시. 학창 시절 가끔 친구들과 괜히 시내 구경을 나올 때면 이십 분이면 웬만한 구경이 다 끝나는 이 코스를, 서로의 팔짱을 끼고 수도 없이 돌며 몇 시간을 수다로 채웠다. 그만큼 아담하고 소박한 곳이다.
그 작은 시내 안에 작은 골목이 있다. 좁고 짧은 골목 양옆으로 규모가 크지 않은 옷가게가 줄지어 있다. 골목으로 들어서니 바로 보인다. 저들 중 한 곳, 나의 단골 옷가게.
가게 앞에 상, 하의를 맞추어 서너 벌 진열해 둔 게 보인다. 아, 문 열었다(오늘이 휴무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면서도). 열린 작은 문으로 고개를 빼꼼, 그리고 발을 들인다.
사장님이 환하게 반긴다. 그녀의 맞이가 좋다. 익숙함에서 오는 애정인지, 그 ‘좋은 느낌’에 단골까지 된 건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이제는 이래저래 다 좋다는 건 확실하다.
우리 사장님은 늘 약간 수줍은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그 위에 입혀지는 색채는 뭐라도 튀지 않는다. 가게 안 옷들을 둘러보다 어딘가 시선이 더 머문다 싶으면 가만히 다가와 “이거 괜찮죠?” 말하며 내려 건넨다. 많은 설명 대신에 어울릴만한 코디를 해 쓱 대준다. 편안하고 조심스러운 가운데 센스는 또 그만이다.
십오 년여를 봤지만 늘 처음 본 사이 같달까. 잘 알면서도 모른다. 취향은 피차 꿰고 있지만(좋아서 오는 거니) 그 외 개인에 대해선 아는 바 없다. 나이도 몰라요~ 성도 몰라~
어차피 나야 사장님이라 부르면 그만이고, 사장님에게 손님은 손 위아래 할 것 없이 언니로 통칭된다. 굳이 묻지 않고 알 필요도 없지만 저절로 ‘짐작 정도’ 하게 되는 일은 있다.
통 넓은 바지가 유행하기 시작할 때였다. 가게에 들어온 바지를 입어봤는데 “어, 뭐지, 쿨 유리!” 나의 너스레를 사장님이 “채리나!”하고 받는다. 물론 내가 쿨 멤버 유리나 디바의 채리나 같은 핏이었다는 건 아니고(오히려 반대라 빵 터졌나). 그녀들이 짧고 타이트한 상의에 바닥을 온통 쓸고 다니도록 길고 통이 크다난 바지를 간지 나게 펄럭이며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바로 그 시절, 우리도 한창때를 보냈으니까(나의 한창때는 고등학생 시절이다). 이 느닷없는 동질감. 최소 십년지기다.
옷을 고르고 사고 하는 잔잔한 대화 중에 어쩌다 아이와 육아가 주제로 등장했다(엄마들의 병이다). 수다 끝에 사장님이 첫째에 대한 미안함과 애틋함으로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우리는 골라놓은 옷을 계산하다 말고 마주 서서 한바탕 눈물을 쏟았다.
사실 둘 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아이들과 동행한 채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담백하도다.
주말 내내 열던 가게였는데 언제부턴가 일요일에 가면 낯선 직원이 가게를 지키는 것이었다. 종종 또 다른 낯선 직원으로 바뀌기도 했다. 평일에 출근하는 나는 주말에만 쇼핑을 할 수 있었으니, 영문 모르고 잘못 걸릴(!) 때가 있었다. 처음에야 어찌 됐든 들어가 어색하게 구경을 했다. 나중에는 사장님이 없는 것을 보면 슬그머니 돌아오곤 했다. 옷이 필요했으니 옷만 사면 되는데 말이다. 얼마 지나 일요일에는 가게문에 '휴무'가 걸렸다. 그리고 어린이도서관에서 아이와 함께인 사장님을 마주치고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모두 그렇지는 않지만 보세 제품을 파는 가게란 주인의 취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매력이 있다. ‘개취’와 딱 맞는 가게를 찾았을 때의 희열과 만족감이란. 이 작은 가게는 사장님이 자신의 안목으로 직접 골라온 옷들로 채워진다. 당연하게 그의 취향이 진하게 묻어나고, 손님들은 그것을 좋아하면서 각자 다른 그들만의 느낌과 필요로 소화하고 구매한다. 단골들은 어찌 보면 '그녀'를 믿고, 그녀의 간택을 받은 옷들을 신뢰하는 것일 테다.
최근 그녀와 이런 대화를 했다. 최근 약하게나마 매너리즘이 와 힘들었단다.(나 역시 직장에서 15년 차에 접어드는 시점이라 몹시 공감되었다). 그러나 적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이십여 년을, 내 가게를 찾는 손님들을 보며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오랜 손님들이 어디 다른 새로운 데 가서 또 자기 스타일에 맞는 가게를 찾아야 할 텐데, 나이 들수록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고. 그 대화를 떠올린다. 같이 나이 들고 서로에게 맞춰진 손님들. 단골가게를 잃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어려움을 떠올리고 공감하고 그리하여 걱정하는, 사장님의 마음을 곱씹는다. 그 정이 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