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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들 Oct 26. 2023

흰머리 줄게 도파민 다오.

뽁, 뽁, 을매나 재밌게요.

뽁.

뽁.

 시원해.


거울 앞이다. 거울 안으로 들어갈 기세로 바싹 붙어 있다. 특정 부위를 거울에 아주 갖다 대다시피 했다. 손에는 미용 집게가 들려있다. 집게 끝이 야문 아이로 잘 골랐다. 한두 번 뒤적거리며 흰머리를 기어코 찾아낸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집게 끝으로 집은 후, 그게 흰머리가 맞는지, 혹여나 검은 머리이거나 검은 머리와 같이 잡힌 것은 아닌지 최종 확인한다. 자체 결재가 나면, 뽁. 깰꼼하게 뽑혔다. Vwow. 속 시원한 것.


언제 시작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추측하건대 쌍둥이 낳고 복직한 이후가 아닐까. 출근길 운전 중 신호에 걸렸을 때, 무심코 본 거울에서 발견했다. 못 볼 걸 보았지 싶다. 가르마 사이에 톡 튀어나와 있는 흰머리 한 가닥. 하. 그 하찮은 것이 얼마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지! 신호에 걸려 멈출 때마다 거울에 비추며 엄지와 검지로 잡아서 뽑으려 애를 썼다. 짧고 굵은 그것은 두 손 끝에 힘을 있는 대로 주어도 여간해서 뽑히지를 않는다. 연신 미끄러져 놓치기 일쑤다. 결국 사무실에 도착해 집게를 구한 후에야 시원하게 뽑아냈다. 후아.

그것이 시발점이 되었는지, 전에는 신경 쓴 적 없던 것이, 그날부터 간혹 눈에 띄기 시작했다. 왠지 놀리는 것 같아 괘씸한 마음이 든다. 리를 뽑고 말아야 하루가 편안하다. 출근 가방  파우치에는 아예 미용 집게가 자리 잡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흰머리를 대하는 나의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더러 까꿍, 모습을 보이면 그것만 집어 뽑던 소극적인(!) 자세였는데, 점차 보다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샤워할 때나 세수할 때 등 욕실에서 거울에 (面) 들여다볼 일이 있을 때면('얼굴을 본다'는 말이 왜인지 쑥스럽다. 글자로도 쓰기 '면구'하다.) 머리카락을 뒤적여본다. 이리저리 새로운  가르마를 만들어가며 찾는다.

하? 오올치! 내가 나서서 탐색해 놓고선, 마치 그것이 나를 골탕 먹이느라 숨어있기라도 한 양, 쏙 드러낸 그것을 발견한 순간이, 꽤나 통쾌하다.


그랬다. 나는 중독되었다.

흰머리는 나를 미치게 했다. 보이는 족족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릴 때 아빠가 누워서 티브이를 보는데 내가 아빠 흰머리를 보고 말했다.

"아빠, 흰머리 있다. 뽑을까?"

아빠가 대답했다.

"그래. 하나 십 원."

"아싸!"

열심히 해쳐가며 뽑았다. 하나하나 같이 수를 세고, 아빠에게 짤랑짤랑 용돈을 받았다. 지금 꼽아보니 그때의 아빠는 지금 내 나이보다도 훨씬 젊었다. 그러니 자신 있고 여유 있게 뽑게 두었겠지. 지금 우리 아빠 머리카락은 백발인데.


한편 생각한다. 내 흰머리는 내가 뽑아야지. 왜? 이 짜릿함을 아껴 즐기고 싶어.






왜 그리도 이 행위에 혈안이 되어있는지 되짚어보았다.

나이 들어 보여서? 음. 감각 있는 스타일과 매끈한 피부를 자랑하는 여성도 희끗희끗 흰머리가 섞여 보이면 확실히 '외적인' 매력이 반감되는 게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젊어 보이기를 원하고, 노력한다. 그래서 이쯤 되면 염색을 하는 거고. (실제 내 친구들 대부분은 주기적으로 뿌염을 한다.)

열심히 흰머리를 뽑고 있는 나도 공감 안 하는 바가 아니다.

 

커트를 하러 어떤 미용실에 갔다.

"허억! 염색 안 하세요? 아이고, 염색하셔야 돼요~."

패션 염색 아니고 새치 염색을 권하는 말이었다. 무려 커트를 하는 짧은 시간 동안 미용사는 그 말을 여섯 번이나 했다. 무엇보다 '허어억!'에 빡쳤다. 계산하고 미용실을 나서는 내게 그녀는 다시 한번 밝게 외쳤다. "염색하러 한 번 꼭 오세요~!"

안다고요, 나도. 포착되는 흰머리 수가 해가 다르게 늘고 있다는 거. 잊을 만하면 뒤적거리는데 내 머리카락 상황을 내가 왜 모르겠는가.

기분이 나빴던 건, 그 미용사 말이 하나 틀리지 않은 말이어서겠지. 이제 염색할 때가 되었다는 거, 흰머리가 늘고 있다는 거. 그걸 아는데 염색을 안 하고 버티면서 염색 권유에 기분은 나쁘다.

모순 덩어리 같으니.






내게 이유가(변명거리가) 있다.

희열이다. 재미 말이다.

바쁘고 힘든 세상을 헤쳐나가면서 사람들은 각자 일 말고 살 궁리를 한다. 취미를 갖거나 놀거나 쉰다. 게임을 하고, 티브이나 유튜브를 보고. 

꼭 유익한 일만 하면서 살라는 법은 없다.  내게 흰머리 뽑기는 재미있는 '놀이'의 하나인 듯하다. 신중하게 골라 집어 아랫부분 쪽으로 '잘' 뽑았을 때 머리카락 끝에 반투명 흰색의 모근이 붙어 나온 것을 확인하는 그 순간,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내게 붙은 온갖 불순한 것들이 응축하여 달려 나온 듯,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도파민 공급처 중의 하나라 할 수 있겠다.

생각난 김에 도파민의 장단점을 찾아본다. 도파민이 부족하면 우울증을 유발할 수 있고, 과다하면 중독 증상을 보인단다. 뜨끔. 그러나 안심해도 될 것 같다. 흰머리를 뽑는 것이 감당이 안 될 만큼 수가 많아지면 그때는 미루지 않고 '뿌염'에 맡겨야 할 테니. 중독은 그때 자연히 해결되리라.

 

곧 다가올 '그날'을 떠올리니, 중독의 자연 소멸에는 안심하면서도, 아아, 조금, 슬퍼진다.

천천히 오렴, 시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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