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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들 Nov 30. 2023

어쩌다 진상 엄마가 되었다


그는 유연한 몸놀림으로 빠르게 물 밖으로 나오더니,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통창을 사이에 두고 내 앞에 멈추었다. 그리고는 양손가락으로 사진을 찍는 모양을 만들더니 다시 그 손으로 엑스자를 만들어 보였다.
말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큰 손동작과 표정은 그보다 단호할 수 없었다. 그 단호함은 고함이나 욕보다 강력해서 나는 사자 앞의 쥐처럼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얼른 아이들 쪽을 보았다. 첨벙첨벙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다행이다.





아홉 살 쌍둥이가 수영을 시작한 지 딱 한 달이 되었다.

나도 아이들도 첫 경험이었기에, 수업 첫날은 대기실에서 다른 보호자들처럼 수영장 내부가 훤히 보이는 통창을 통해 아이들의 수영 수업을 지켜보았다. 걱정도 되고 궁금하기도 하니 처음에만 지켜보다 나머지 시간에는 책을 읽어야겠다 생각했고, 습관처럼 챙겨 온 책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그 애들이 너무 예쁘고 귀여운 것이 아닌가! 수영모를 쓰고 수영복을 입은 두 아이는 뭔가 좀 달라 보였다. 평소보다 더 쪼꼬만 해 보였고 머리카락도 옷도 배제된 모습이 아기처럼 느껴져 나는 그만 생뚱맞게 울컥했다. 십여 명의 아이들 속에서 숨 쉬는 연습, 물속에서 걷는 연습, 나란히 앉아 첨벙첨벙 발차기하는 연습 등 기초적이고 단순한 동작의 반복인데도 그 애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슬쩍슬쩍 고개를 들어 아이들을 보다 결국, 아예 책을 엎어 버렸다.

그렇게 아주 넋을 놓은 채 한 시간을 보냈다.

 

월수금, 일주일에 세 번이었다. 한 시간 수업에다 왔다 갔다 라이딩까지, 한 번에 세 시간 가까이 소요된다. 오래 고대하던 수영을 하게 되었으니 귀한 기회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은 아이들의 기회. 분리해야 한다. 시한부 휴직자 신분이기에 조급한 심정으로 하루를 쪼개 쓰는 내게 하루 세 시간이라니.

당장 체육관 2층에 있는 헬스장에 등록했다. 아이들을 들여보내고 나 역시 한 시간 운동을 했다. 그렇게 각자의 운동을 시작했고 이제 한 달이 되었다.






컨디션이 안 좋았던 어제, 헬스장 대신 수영 대기실로 향했다. 아이들이 수영 배우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려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첫날 거기 있었던 보호자들이 역시나 통창을 향해 죽 앉아 있었다. 나도 한 구석에 자리 잡았다. 

첫날 우왕좌왕하고 어리둥절하던 아이들이 한 달 지났다고 제법 익숙하고 편해 보인다. 선생님과도 부쩍 친해진 모습이었다.


딴 길로 새는 감이 있지만, 언급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선생님이 차암~

아이돌이나 배우 해도 되겠다 싶게 차암 잘 생겼으며, 저렇게 뽀얄 수 있나 싶게 피부가 맑다. 현직 수영 선수라 해도 믿을 큰 체격에 요즘 사람이라 그런지(!) 두상을 어찌 그리 작은지? 티브이 아니라 내 근처에서는 보지 못한 비현실적인 형체의 사람이 신기하여 속으로 연신 감탄한다.

얼평, 몸평 아니고 그저 보는 그대로의, 팩트에 입각한 순수한 시선이니 오해 없길.

계속하여 아줌마 특유의 찬사가 주절주절 머릿속에 나열된다.

'몸이 저렇게까지 되려면 을매나 수영을 열심히 했을꼬. 인간적으로 대단하다. 참 잘~ 컸어. 엄마가 얼마나 대견할꼬. 우리 애들도 저렇게 멋지게 자라면 좋겄네.'


스펀지라는 흔한 표현처럼 아이들은 그 짧은 기간에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다. 키판을 잡은 채 한 손씩 떼 팔을 둥글게 저으며 '음파'까지 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니 또 뭉클해지고 만다. 나이 들어 그런가 시도 때도 없이 울컥하는 엄마는 서둘러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담아야 해, 이 순간을. 지나면 다시 안 오니까.'

당연스럽게 카메라의 화면에 아무도 잡히지 않는지 확인하고 잽싸게 찍었다. 그러고는 바로 휴대폰을 가방에 주섬주섬 집어넣었다. 단 한 번이었고 딱 한 장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선생님과 딱 눈이 마주쳤다. 

(먼 거리에서도 눈이 마주칠 정도로, 유리가 이토록 청결한 필요가 있니. 애꿎은 유리를 탓해본다.)


그는 유연한 몸놀림으로 빠르게 물 밖으로 나오더니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통창을 사이에 두고 내 앞에 멈추었다. 그리고는 양손가락으로 네모로 만들어 사진을 찍는 시늉을 하더니 다시 그 손으로 크게 엑스자를 만들어 보였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커다란 손동작과 표정은 그보다 단호할 수 없다. 그 단호함은 고함이나 욕보다 강력해서 나는 사자 앞의 쥐처럼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을 느낀 건 잔뜩 주눅 든 나의 기분 탓이라 생각하고 싶다.

본능적으로 얼른 아이들 쪽을 보았다. 첨벙첨벙 연습에 여념이 없다.

다행이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어색하게 반 정도 웃어 보이며, 나름으로 죄송하다는 내색을 했다.

다시 아이들에게 돌아가는 선생님의 넓은 등짝을 흐린 배경으로 하여, 그제야 대기실에 붙은 '사진 촬영 금지' 안내가 눈에 들어온다. 그제야.

  







딸내미가 한창 조잘조잘할 무렵, 엄마는 뭐가 제일 좋아? 뭐가 제일 싫어? 어떤 사람이 제일 좋아? 싫어? 어떤 음식이 제일 좋아? 제일 싫어? 이런 류의 질문을 수도 없이 했다. 내 대답의 일부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녀는 '제일'이라고 물었으면서 '또?''또 다른 건?' 하면서 결코 하나의 대답으로 끝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는데, 그리하여 여러 대답을 내놓으면서도 내겐 몇 가지 고정불변의 답변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어떤 사람이 제일 싫어?'라는 물음에 꼭 들어가는 대답은, '쓰레기 아무 데나 버리는 사람'이었다.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의 어린이 맞춤 대답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폐 끼치는 사람' 또한 늘 포함되었는데, 어찌 보면 비슷한 맥락이다.


공중도덕 : 공중의 복리를 위하여 여러 사람이 지켜야 할 도덕.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지켜야 할 사회적 규범.

민폐 : 민간에 끼치는 폐해. 흔히 개인 또는 다수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말함.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지켜야 할 규범'이 공중도덕이며, 이를 지키지 않았을 때 결론적으로 개인이나 다수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생긴다. 쓰레기 아무 데나 버리지 않기, 공공장소에서 조용히 하기, 공중화장실 올바르게 사용하기 등등, 의무 교육인 초등학교 때까지 모두 배우는 것들이다. 다 배웠으면서 알면서 때로 지켜지지 않아 피해가 된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아도 살아가면서 생활에서 익히는 공중도덕도 있다. 공동주택에서 시끄러운 소리 내지 않기도 한 예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강조되는 것도 있다. 앞서 예를 든 층간 소음도 그렇거니와, 저작권 혹은 타인의 초상권을 존중해 주는 것이 그렇다. 바로 내가 오늘 지키지 않은 그것 말이다.


예전보다 인권과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한편 이를 위반하고 악용한 범죄가 늘면서 초상권이 공중도덕 개념으로 중요하게 여겨지게 되었다.

나 역시 여행지든, 놀이터든, 음식점이든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사진 찍을 때 각별히 유의한다. 다른 사람이 원치 않게 사진이나 영상에 찍히지 않도록.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내 아이가 소중한 만큼 타인의 초상권 역시 지켜져야 함을 유념했다.




남에게 피해 주는 것을 경계하며 그 누구보다도 공중도덕을 철칙으로 삼는 내가, 어제 수영장에서는 떡 하니 붙은 금지 안내에도 불구하고 내 새끼 예쁜 사진 찍겠다고 카메라를 들이댄 진상 엄마가 되었다.

(이 장면을 대기실에서 본 누군가가 맘카페에 올리지 않았으면 다행이다.)


이 세상 어느 어미에게나 새끼는 물고 빨게 예쁘고, 귀한 순간을 놓치기 아까워한 것도 누가 탓할까. 다만 그곳은 수영장이었다. 수영복이라는 복장 특성상 신체 노출이 많다. 수영복을 입는 것이 저어 되어 수영 배우기를 고민하는 글도 온라인에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내겐 별 일 아니며 아무 의도 없다 할지언정, 촬영을 '당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불쾌할 수 있는 일일 뿐 아니라, 허락 없이 촬영되지 않을 권리를 침해당한 일이다. 

나의 평소 삶의 모습과 가치관이 어떠했든 간에 제삼자로서 알 바 아니며 그들이 보았을 때 나는 '맘충'일 수 있다. 내 아이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딱 한 발짝 잘못 내디뎠을 뿐이지만, 선을 넘었을 때 나도 맘충이 될 수 있구나, 아찔한 경험이었다.


정신이 번쩍 든다. 

아이들을 한껏 사랑하는 엄마일 뿐 아니라,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이고 싶다.

(멋진 선생님에게 혼나는 바람에 정신이 더 번쩍 든 건 안 비밀.)



*사진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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