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멱살 잡혀 끌려가는 거 좋아하네

프로시작러의 "암 뤠디 폴 2025 "

by 나들

부은 눈이 이번에는 가라앉지를 않고 있다.


갑상선기능저하증이 있어 워낙 쉽게 붓기는 해도, 매일 아침 기상과 동시에 신지로이드라는 이름의 알약을 한 알씩 챙겨 먹는 일을 몇 년째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아침마다 바지런을 떨며 샐러드 도시락도 싸가지고 점심으로 먹는 일도 꾸준히 하고 있고 말이다. 나름대로 관리하며 그럭저럭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이렇게 오래 부은 거울 속 내 얼굴을 보며 더럭 겁이 난다. 왜지. 뭐가 문제지?

왜긴. 이유는 이미 알고 있다. 범인은 언제나 내부에 있다.


일 년 가까이 매일같이 러닝을 했고, 너무 더운 여름부터는 헬스장을 등록했으며 큰 마음먹고 피티도 받았다. 샐러드 도시락을 싼 것도 그 무렵부터였으니, 효과는 제법 시너지를 냈다. L까지 갔던 바지 허리사이즈가 M사이즈로 내려왔고 아침에 붓는 날도 줄었다. 그런데.

과연 내 작심은 반년을 가지 못하네. 겨울 핑계를 대본다. 한기에 불행함을 느끼는 나는 추위와 동시에 나태해졌다. 퇴근해서 들어온 다음에는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기 싫었다. 일단 효과 조금 봤고 당장 몸에 이상 없다 싶으니 바로 해이해지는 것 봐라. 요거요거.


방점을 찍은 것은 이번 여행이었다. 5일간 대만으로 가족여행을 마치고 엊그제 돌아왔다. 대만은 미식의 천국, 뭐니 뭐니 해도 식도락 여행이라고들 한다. 대만이 세 번째지만 아이들과 다 함께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간 혼자 여행을 다닐 때는 사실 식도락이라는 매력으로 대만을 느낀 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혼자서는 여러 메뉴를 시킬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미식가라 자부해도 대식가는 못 되다 보니 애초에 식도락에 초점을 두고 여행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 달랐다. 초고학년 아이 셋과 우리 부부. 무적의 다섯 명으로 합체해 돌아왔다. 대만을 경험한 사람들 중 꽤 많은 이들이 현지에서 '대만향'이라고 말하는 특유의 향 때문에 잘 먹지 못한다고 한다. 나 빼고 대만이 처음인 네 사람은 그러나 대만향이 뭔데? 먹는 거야? 하며 열린 여행자의 자세로 임했다. 한계를 모르고 먹고 다녔다. 덥고 습한 나라 특성상 조리법은 대개 튀기거나 볶는 방식이어서 거의 모든 음식이 기름졌으며 식사 중간중간에도 끊임없이 달고 단 간식의 향연이었다. 참으로 맛있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무리는 힘이 세다. 혼자서는 딱히 음식에 탐닉하지 않지만 우리는 다섯이다. 메뉴판에 있는 대로 죄다 시킬 수도 있다. 다채롭게 맛본 후 제일 맛있는 걸로 다시 시킨다. 같이 먹으면 더 맛있고 더 많이 들어간다. 여행하는 동안은 샐러드로 관리해 온 지난날은 기억나지 않는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즐긴다. 종일 걷는데 왜 살이 쪘지? 하는 의문을 갖는 것은 비양심이다. 종일 먹잖아. 그래서 몸무게는 애초에 재지 않는다. 외면하고 먹는 쪽을 택했다.

현지 먹방은 여행에서 돌아오는 순간 타의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신에게는 오픈런으로 한 시간 줄 서서 사온 누가크래커 열 상자가 있나이다. 이 간식은 칼로리를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묵직함이 있다. 알면서 얄궂게도 손이 가요 손이 가. 최소한의 양심과 자제력이 없다면 혼자 한 상자는 무리 없이 해치울 것이다. 그렇지만 거울 속 부은 얼굴을 보며 더 이상 '최소한' 가지고는 안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중독적인 크래커, 동날 때까지 안 먹을 자신 있어? 없어. 닷새 내내 기름지고 고소하며 달달한 음식들과 간식들로 형성한 내 몸매와 혈관, 건강하다 할 자신 있어? 없어. 도톰한 눈두덩이가 귀여움을 담당하던 한때처럼 지금 부은 눈을 여전히 매력이라 말할 수 있어? 없어.

없으면 붙들어 매, 정신.







정신 붙들어 매고 몇 달 만에 헬스장을 찾았다. 문 앞에서 흠칫했다.


'지금 안 하면 평생 못한다'


팩폭이 이런 건가. 뭔가를 마음먹으면 세상만사가 나를 향한 말로 들리고 보이는 마법이 펼쳐진다. 스스로 다짐한 것과는 또 다른 자극이다. 맞아도 쌀 때 맞는 건 쾌감이 있다.


들어서는 나를 발견하고 관장님이 알은체를 한다.

"어! 오랜만에 오네요!"

씩씩하고 단단한 그의 음성에 새삼스럽게 놀라며 쭈뼛쭈뼛 웃어 보인다.

헬스장에 입장해서 어색할 땐 뭐니 뭐니 해도 유산소지. 러닝머신에서 20분간 몸을 푼다. 어깨운동, 덤벨 팔운동, 스쾃를 이어하고 천국의 계단 20분으로 마무리했다. 바로 이 맛 아닙니까. 막상 하면 이토록 상쾌하고 뿌듯한 것을, 집 밖을 나오기가 왜 그리 힘든 건지. 집에 돌아와 씻고 보니, 부기도 좀 빠져 있다. 기분 탓이다.


머리를 닦으며 새로운 톡을 확인하는데, 롸? 브런치작가 그리다 살랑 님이 작심삼일의 대모로서 각오를 다지며 단톡방을 만들어 초대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늘 작심하는 글쓰기를 삼일까지 하고 하루 쉬고 다시 작심하여 삼일 이어가는, 그야말로 작심삼일을 일삼을 자들의 방이다. 시작은 프로급이요 끝을 못 맺고 자책하는 아마추어인 나에게 최적화된 프로젝트라 할 수 있겠다. 한 달을 목표로 한다는데, 한 달을 끝내고 나면 대모님 살랑 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릴 속셈이다.

봐봐요. 만사가 나를 향한 외침과 손짓으로 들리고 보이는 마법이 펼쳐지고 있다니까요. 봄도 아닌데 살랑살랑한 바람처럼 가볍고 상콤한 이 유혹들은 심지어 무척 바람직한 것이어서 하등 마다할 이유가 없다.

"저 부르셨나요. 프로시작러 입장했습니다."

너스레를 떨며 마법 양탄자에 냅다 올라탔다.






올 한 해 동안 다이어리를 쓰고 인증하며 으쌰으쌰 했던 소모임에 또한 속해 있었다. 창시자이자 운영자인 므니 님이 올해를 끝으로 이 방의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전했다. 울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감사인사인지 시상식 소감인지 헷갈리는 말들을 남기며, 한편 불안했다. 내년은 어떡하지. 끈 떨어진 뒤웅박처럼 어찌할 바 모르겠다. 이곳-일명 다이어리 인증방에, 므니님에게, 함께 있던 작가님들에게 꽤 의지했었다는 걸 비로소 실감하면서 말이다. 매년 다이어리를 사고 열심히 적다가도 하반기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텅텅 빈 속지를 둔 채 찜찜하게 마무리하곤 했던 과거의 나를 떠올린다. 인증방에 붙어 있으니 그나마 올해는 꾸역 꾸역이라도 끝까지 기록한 다이어리를 가지게 되어 영광스러웠는데. 이제 어쩐담. 늘 그렇듯 혼자여도 시작은 자신 있다. 강제성 없이 끝까지 지속해 나갈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자신 없다.

그렇게 약간의 상실감에 젖어 있었다. 다이어리 인증방 멤버 다몽박작까 님이 역시 아쉬워하다, 2025년 다이어리 인증방을 손수, 직접 만들어 초대한 게 아닌가. 와우 이 언니들 추진력들 좀 보소!(멋지면 언니.) 뜻하는 바를 한 발 앞서서 캐리해줄 근사한 언니들이 이렇게나 포진해 있다. 앞장서기에는 다소 새가슴인 나는 이 언니들을 쭐래쭐래 따라갈, 그리고 함께할 준비가 기꺼이 되어있다. 미적거리던 다이어리 주문을 단숨에 완료한 것은 소심한 추진력이라 할란다.






작심삼일 방에 들어가면서 대모님에게 말했다.

"1월 1일이 아니라 12월에 시작한 점이 매우 흡족하고 고맙습니다."

그녀가 물었다.

"매우 흡족한 이유가 궁금하네요."


헬스장에 다시 출입한 것, 작심삼일 프로젝트를 시작해 글쓰기에 다시 불을 붙인 것, 끈 떨어질 뻔했던 다이어리 인증방에 몸담아 새해 다이어리 생활을 이어가는 것 등 모두 새해 목표로 삼은 것들이다. 새해 목표라 해서 1월 1일부터 마음먹고 시작하면 늦다. 나는 시동에 오래 걸리는 사람이라 그렇다. 미리 초석을 다져놓고 새해를 맞이하는 편이 간지 난다.

직장에 8시 58분 59분에 헐레벌떡 출근하는 직원이 있다. 나도 철없을 시절 그런 적이 있기에 한심하게 여겨지지는 않는다. 앞으로 알게 될테지. 십 오 년 차 직장생활에 겨우 철든 한 가지가 있다면 일찍 출근하기다. 빈 사무실에 들어설 때의 짜릿함은 한 번 겪으면 웬만하면 양보하기 싫다. 책상 먼지 한 번 닦고, 컴퓨터 켜고, 커피 한 잔 내려 다만 오 분, 십 분이라도 여유있게 하루를 준비하다 동료들을 맞으면 오늘 좀 괜찮게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멋진 언니들에게 자의로 멱살 잡힌 덕에 간지나는 연말과 새해를 보내게 되었다. 이쯤 되니 갑상선기능저하증인지 누가크래커인지 때문에 좀체 가라앉지 않던 내 부은 얼굴에마저 감사할 지경이다. '살려고' 집 밖을 나와 헬스장으로 향하게 해 주었으니.


구구절절한 사연이야 어쨌든 나 지금,

암 뤠디 폴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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