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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수 May 19. 2021

텅 빈 세상(4)

빨간 약을 선택할 용기

 이 세상이 '진짜'라는 증거가 있을까? 사물을 만질 수 있으니까 진짜일까? 1편에서 밝혔듯이, 우리가 만진다고 착각하는 것은 사실 텅 빈 원자 가장자리에 위치한 전자의 전자기적 반발력이다. 우리는 물질을 실제로 만지지 않는다. 볼 수 있으니까 진짜일까? 우리가 본다고 착각하는 것은 사실 사물이 반사하는 빛을 인식하는 것뿐이지 실제로 사물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게다가, 몇몇 인간들은 헛것을 보고 듣기도 한다. 이런 식의 논리라면 과연 우리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 대상이 있을까?


 "cogito, ergo sum."


 르네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이다. 데카르트는 위와 같은 회의주의적인 의심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런 의심을 하는 주체, 생각하는 나(cogito)는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이러한 철학 속에서 시작한다. 


 21세기 초,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지능에게 지배당하게 된 인간은 기계의 에너지를 생산해내기 위한 자원이 된다. 기계는 인간을 생산해내고, 인간을 녹여 다른 인간에게 주입한다. 필요한 에너지를 얻어내며, 그 인간들이 매트릭스 세계에서 꿈속 삶을 살아가게 한다.


 네오는 꿈을 꾼다.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는데, 한 가지는 빨간 약으로 매트릭스 세계에서 벗어나 진짜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고 다른 한 가지는 파란 약으로 매트릭스 세계로 돌아가서 살던 대로 사는 길이다.


 파란 약은 마치, 야훼가 만들어낸 동산에서 무엇이 죄인지 모른 채로 살아갈 수 있는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빨간 약은 이 세계의 진실을 마주하는 길이다. 비록 그 과정에 고통을 알게 되고, 땅을 일구는 노동의 고통도 겪어야 하지만 그것이 이 세계의 진실이라면, 기꺼이 마주하고 타자의 고통, 그 얼굴을 외면하지 않는 길이다. 이 길은 한 번 들어서면 절대로 돌아설 수 없다. 잇쉬와 잇샤가 야훼의 동산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것과 같이, 텅 빈 세상인 매트릭스를 벗어난 네오와 같이!


 나는 인간은 모두 이 빨간 약을 마주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게도 이런 빨간 약이 찾아온 적이 몇 번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외면을 멈추고 선택한 첫 번째 빨간약은 정의를 이야기하는 빨간약은 아니었지만, 나의 삶을 크게 바꾼 것이었다. 


 화학공학을 전공하고 취업을 준비했었지만, 항상 마음속에는 수학을 가르치는 일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20살 때부터 항상 학원 알바와 과외를 하며 언제나 누군가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첫 번째 빨간약을 삼켰고, 지금은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내게 두 번째 빨간 약이 올 것을 알고 있다. 지독한 능력주의 사회에서, 경쟁사회에서 시작조차 허락되지 않은 이들과 함께하는 빨간 약을 기다리고 있다. 비록 지금은 자본주의와 능력주의가 낳은 구조 속에서 노동을 하고 있지만, 그 동산에서 나와 '진짜' 세상을 마주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에게 찾아왔던 빨간 약은 어떤 것들이 있었나? 그리고 앞으로 찾아올 빨간 약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또 그 빨간약이 당신에게 성큼 다가왔을 때, 그 약을 삼킬 용기가 당신에게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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