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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여름이 그립다

by 정유쾌한씨

지금은 극장가와 방송가에서 납량 특집이 거의 사라졌지만, 30여 년 전만 해도 무서운 이야기로 가득한 여름을 보냈다.


동네 친구들과 함께 안방에 모여 강시 영화를 봤다. 불을 끈 다음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다리를 뻗으면 안방은 우리만의 작은 극장이 되었다. 기대감에 부풀어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 보면 텔레비전 화면에 검은 모자를 쓴 강시가 나타났다.


강시는 이마에 부적이 붙어 있을 때는 양팔을 앞으로 뻗은 채 가만히 서 있다가 부적이 떨어지면 사람을 공격했다. 주인공이 강시에게 잡힐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강시는 주인공이 숨을 참으면 바로 앞에 있어도 보지 못했다. 도망치던 주인공이 숨을 참으면 나도 그를 따라서 숨을 참았다.


영화가 끝나면 우리는 밖으로 나가 강시 놀이를 했다. 술래가 양팔을 앞으로 뻗고 콩콩 뛰며 강시 흉내를 냈고, 나머지는 술래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까르륵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와 친구들은 무서운 이야기도 좋아했다. 동네 어귀에 삼삼오오 모여 자신이 알고 있는 무서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누가 더 무서운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는지 경쟁이 붙었다. 우리는 서로 돌아가며 이야기꾼이 되었다가 청중이 되었다가 심사위원이 되었다.


그때는 유명한 도시 괴담이 많았다. 한국은행 총재의 딸이 살인을 당해 그 흔적을 돈에 숨겨 놓았다는 김민지 괴담부터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 여자가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닌다는 빨간 마스크 괴담, 한밤중에 자유로를 달리다 보면 눈만 뚫린 여자가 나타난다는 자유로 귀신 괴담, 홍콩으로 가던 할머니가 비행기 사고로 귀신이 되었다는 홍콩 할매 괴담까지 다양했다.


무서운 이야기를 들은 날에는 세수를 하다가도 뭔지 모를 서늘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거나 집 외부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을 혼자 못 갈 정도로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매운맛에 중독되면 더 매운 음식을 찾듯이 무서운 이야기에 중독되어 끊을 수가 없었다.


주말 저녁이면 예능 프로그램에서 폐가나 폐교 체험을 하는 납량 특집을 했다. 아빠, 엄마, 오빠와 함께 둥그런 상에 둘러앉아 통닭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봤다. 귀신 분장을 한 연기자가 어두운 곳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면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치는 연예인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키득키득 웃었다.


무서운 이야기보다 더 자극적인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이 되어서일까. 무서운 이야기로 가득했던 여름이 사라졌다. 무더운 여름날, 뙤약볕 아래에서 땀 흘리며 뛰놀던 친구들과 납량 특집 예능 프로그램을 함께 보던 아빠도 사라졌다. 재개발로 고향이 사라지면서 동네 친구들과 헤어졌고, 아빠는 2년 전에 돌아가셨다.


문득 무서운 이야기를 주고받던 친구들과 딸이 좋아하는 통닭 날개를 건네주던 아빠가 보고 싶다. 무서운 이야기가 가득했던 그때 그 여름, 그 공간과 추억들이 모두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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