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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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바람이 멈췄다. 내 감정은 멈춘 바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내 모든 것과 세상 모든 것이 멈추었다. 나와 나의 세상은 그곳에 멈춰 섰다.
바람이 멈추었다. 모든 걸 아사 가듯 거세게 불던 바람이 한순간에 멈췄다. 그 바람 속에서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러던 바람이 일순간에 역풍이 되어 다시 불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곳에서 한줄기의 빛이 막막한 어둠 속을 뚫고 혁명을 일으켜 나타나 보이기 시작했다.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발밑은 아직 현현만이 가득했다. 그 심연 속에서 발끝의 감각만을 의존한 채 한 걸음씩 겨우겨우 내디뎠다. 내디딜 때마다 발에 무언가 닿아야만 안도의 한숨과 함께 다른 발을 내딛는다. 그렇게 한 발짝 한 발짝에 겨우 숨을 고른다. 지금이 아니면 다신 없을 기회인 것을 알기에. 두려움 앞에서도 망설임 없이 발걸음은 나아간다.
드디어 숨통이 트였다. 삶의 의지가 되살아나서 였을까? 허기가 진다. 눈앞에 흰쌀밥과 조미 김이 떠오른다. 이성의 갈증도 느껴졌다.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아 차분히 연필을 깎는다. 하지만 뻣뻣한 소리와 함께 오랜만에 깎는 연필은 현재의감정과 세상처럼 내가 원하는 모양대로 깎이지 않았다. 훼손된 감정 앞에선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다.
몸은 상당히 지쳐 있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재즈 음악을 틀고 두 눈을 감는다. 재즈 음악을 들으면 잠이 온다. 귀는 서서히 잠들어 가는데 코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비 냄새가 느껴졌다. 이어 빈 음 사이사이로 창가에 부딪치는 빗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분명 이 비가 필요한 곳에도 내리길 바랐다.
환한 빛이 세상을 밝히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면 어렴풋이만 기억되는 그것이 늘 아쉽게 느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앞에 흰 종이와 연필이 있었다. 이것은 꿈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바람이 멈추고 봄이 왔다. 이제 세상이 원래 모습대로 돌아가려 한다. 내게 봄은 4월이 되어서야 찾아왔다. 산과 들에 나비와 꽃이 보인다. 세상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들린다. 이제 내게 세상의 모든 것이 보이고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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