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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와 차별 그리고 결핍

하면 좋지 않은 것들

by 민감성



사람들은 살면서 자의든 타의든 비교를 하거나 당하게 된다. 특히 한국 사회는 남들과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사회 같았다. 인스타 혹은 다른 SNS들을 보면 늘 멋진 장소, 맛집, 고가품 등을 올려 자랑하듯 보여주기로 비교를 하게끔 만든다. 이번는 개인적으로 느낀 안 좋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어렸을 당시 나는 동네 어른들로부터 많은 비교를 당하며 살아왔다. 어릴 적 동생과 놀러 나가든 동네 슈퍼로 심부름을 가든 길 위에서 또는 만나는 곳에서 어른들은 동생과 나를 두고 늘 외모 비교를 해왔다. 그들은 늘 내게 이렇게 말했다.


“동생은 엄마를 닮아 잘생겼는데 너는 아빠를 닮았네”


주위의 어른들은 물론 친척들까지도 이런 비교를 했다. 어린 나는 이런 생각과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왜 내게 이런 말을 하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나는 왜 엄마의 외모를 닮지 않고, 아빠를 닮았단 이유만으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나. 매번 이와 같은 말을 듣게 되니 짜증이 났고, 때로는 엄마의 외모를 닮은 동생이 미웠다.


시간은 흘러 8살이 되어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서 좋았지만 학교란 곳에선 새로운 비교가 시작되는 곳이었다. 이제는 가족이 아닌 남과 비교가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공부 잘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 잘 사는 학생과 못 사는 학생을 은연중에 다르게 대했다. 똑같이 잘못을 해도 잘 살거나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게는 다그치기만 하고 나머지 학생들에게는 회초리를 들거나 수업 시간 내내 손을 들고 수업을 들어야 했다. 그때는 이것이 비교를 넘어선 차별인지 몰랐다.


커가면서 자연스레 친구의 생일이 되면 초대를 받아 친구 집에 놀러 갔다. 그때 처음으로 모든 집이 우리 집과 같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집의 크기와 방의 개수며, 외국에서 사 온 여러 기념품들과 게임기 그리고 장난감들이 우리 집에 없는 것들이 친구 집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있었다. 내가 살던 세계는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친구 집에 놀러 갔다 오면 이상하게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친구 집과는 너무나 다른 누추한 우리 집이 보기 싫을 정도였고, 장난감 하나 없는 내가 싫었다. 그 당시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우리 집은 왜 가난할까?”


이때 처음으로 결핍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그 후로 내게는 늘 이 결핍이라는 부분을 채우기 위해 쓸데없는 것들을 사거나 필요한 것에 지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산 건 아닐까 하는 부정적인 감정이 지배적으로 따라다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다행스럽게도 시간과 사람이 해결해 주었다. 세월에 지나 어른이 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하나씩 하나씩 경험하며 알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하느님이 내게 필요한 것을 이미 다 주신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태어난 것에는 모든 이유가 다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동생과 비교하면 나는 잘생기지 않았다. 허나, 친숙한 외모와 외향적 성격 덕분에 어느곳에 가서도 적응을 잘했고, 사람들과 거부감 없이 잘 지냈다. 어떻게 보면 지금 하고 있는 일에도 나의 존재 자체가 많은 도움이 된다. 게다가 가족 중 가장 건강한 몸을 물려받았다. 운동으로 인한. 부상을 제외하면 한 번도 아픈 적이 없다.


스무 살 중반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 전 경험자들로부터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종차별은 어디까지나 그 나라의 문화를 각자 잘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따른 인식에 대한 문제였다. 일본에서도 언어를 빨리 배워 일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보니 서로가 가진 문화에 대한 오해가 있었을 뿐 사람들이 가진 생각은 나라를 떠나 서로 같았다. 때로는 서로 가진 다른 문화의 차이를 오히려 더 좋아하는 일본인들도 있었다.


일을 마치고 집 근처 놀이터에서 거의 매일 축구 연습을 했다. 어느 날 우리가 흔히 히키코모리라 부르는 늘 집안에만 머무는 사람을 놀이터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 사람의 입장(히키코모리)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일본어. 연습을 해보자” 마음먹고 말을 건넨 적이 있었다. 내가 말을 걸자마자 허겁지겁 도망치는 그의 눈빛을 보며 내가 뭐 잘못했나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후로 항상 같은 시간에 놀이터에서 축구 연습을 하던 나와 종종 마주쳤는데 매번 나의 눈치만 보면 자리를. 피하던 그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에게 그가 눈치 못하게 조용히 음료수를 건넸다. 한참을 망성이던 그는. 음료수만 받고 바로 자리를 떠났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그의 어릴 적 꿈도 축구 선수였다고 한다. 내가 항상 같은 놀이터에서 축구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곤 지난날의 자신을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던 그는 학창 시절 이지메라는 집단 따돌림을 당해 스스로의 감옥에 갇혀 살았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세상에는 차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부모를 제외한 최초의 한 사람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호주 유학 당시 가진 것이 없는 내게 많은 도움을 준 호주 아버지가 계셨다. 그는 함께한 2년이란 시간 동안 때로는 아버지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지내며 그동안 내가 가지지 못했던 부분들을 채워 주었다. 그 덕분에 내게는 더 이상 결핍이란 감정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사람은 누구나 그 사람에게 필요한 조건으로 태어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들을 발현하는 삶을 살아가면 된다. 비교와 차별 그리고 결핍으로 가득했던 내 지난날을 돌이며 보면 지금 변화된 삶을 사는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지난날 모자람과 부족함을 경험하게 하여 그것들을 새롭게 배우게 했기에 가능했지는 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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