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차별 vs. 역차별
에이블리즘(Ableism)은 장애가 없는 사람을 ‘표준(normal)’으로 삼고, 그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장애인)을 차별하거나 배제하는 사고방식과 행동, 제도 전반을 의미한다. 인종차별(racism), 성차별(sexism)처럼, 차별의 사회적 구조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에이블리즘은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처럼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차별하려는 의도가 없더라도, 비장애인이 “정상”이라는 기준을 무비판적으로 전제하면 자연스럽게 장애인이 배제되거나 "비정상"으로 취급된다.
물론, 에이블리즘이 다른 차별보다 눈에 띄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다. 우리 사회가 아직까지도 에이블리즘 사회이기 때문이다. 1950년대 미국사회에서 같은 타이틀과 같은 능력을 가진 두 사람 중에, 백인은 50달러를 받고, 흑인은 30달러를 받아도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처럼. 1980년대 한국사회에서 같은 회사의 동기 둘이, 남성은 100만원을 받고, 여성은 70만원을 받아도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처럼. 2025년 지금, 비장애인은 취업을 하고, 장애인은 취업을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이처럼 에이블리즘은 간단히 말하면, 장애가 없는 상태를 정상 또는 이상적이라고 여기고, 장애가 있는 사람은 부족하거나 덜 가치 있다고 보는 사회적 태도나 구조를 말한다. 개인적 차원에서 보면, “장애인이지만 잘한다”라는 말처럼 장애인이라고 낮은 기대치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나, 휠체어 사용자를 보며 “불쌍하다” “대단하다”라고만 반응하는 태도, 또는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사람의 의사소통 방식을 무시하고 “정상처럼 말하게 해야 한다”는 관점 모두 에이블리즘이다.
제도적 사회적 차원에서도, 건물에 경사로나 엘리베이터가 없어 휠체어 사용자가 이동하기 어렵게 만든 환경, 표준화된 시험이나 채용 절차에서 합리적 조정을 제공하지 않는 제도, 교육 현장에서 오직 말과 글 중심으로만 평가해 다른 소통 방식을 배제하는 시스템이 모두 에이블리즘의 사례다. 장애를 개인의 결함으로만 보지 않고, 사회가 만든 장벽(social barriers) 때문에 발생하는 불평등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즉, 문제는 장애가 아니라 장애인을 고려하지 않는 사회 구조라는 시각이다. 이를 '장애의 사회적 모델(Social Model of Disability; Oliver, 1990)'이라고 한다.
*학교에서의 에이블리즘은 겉으로 보기에는 명백한 차별이 아닌 것처럼 보일 때가 많지만, 실제로는 교실 곳곳에서 은밀하고 자연스럽게 행해진다. 특히 교육 현장에서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사고하는 태도는 학생들의 다양성을 지워버리고, 장애가 있는 학생들을 열등하거나 불완전한 존재로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가장 먼저 수업 방식에서 에이블리즘이 드러난다. 수업이 오직 말과 글 중심으로만 운영될 때, 그림이나 보조 기기, 혹은 AAC(보완대체 의사소통)를 활용하고자 하는 학생들은 종종 “정상적인 방식으로 답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또한 모든 학생이 동일한 시간 안에 시험이나 퀴즈를 끝내야 한다는 규칙은, 각 개인이 대답하는 속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말하기가 어려운 학생에게 발표를 억지로 시키면서 그것을 사회성 훈련이라고 포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표면적으로는 교육적 차원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학생의 필요를 외면한 강요일 뿐이다.
교실 환경 역시 장애 학생에게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된다. 휠체어가 들어오기 힘든 교실문이나 복도의 구조, 쓰기 높은 칠판, 계단만 있는 출입구는 물리적 접근 자체를 어렵게 만든다. 또래와 어울리기보다 구석 자리 나 맨 앞에만 앉히는 좌석 배치도 학생을 ‘특별하게’ 고립시키는 방식이다. 심지어 태블릿과 같은 보조 기기를 사용할 때 '특별 대우를 받는다'는 다른 학생들의 시선은 학생에게 낙인감을 심어줄 뿐이다.
교사와 학생의 태도에서도 에이블리즘은 자주 나타난다. “장애가 있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는 낮은 기대치는 학생에게 학업적 도전을 줄 기회조차 빼앗는다. 또 “장애인인데도 잘한다”라거나 “보통 애들처럼 행동한다”라는 말은 의도는 칭찬일지 몰라도, 사실은 장애를 열등 기준으로 전제하는 차별적 발언이다. 교사가 친구들 앞에서 “얘는 힘드니까 많이 도와줘야 해”라고 말하는 순간, 그 학생은 능동적 학습자가 아니라 수동적 존재로만 인식된다. 또한, 또래 학생들은, 함께 배우는 친구라고 인식하기보다, '아, 장애인은 도와주고 배려해야 하는 대상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아이들에게 다양성과 평등을 알려주기도 전에, 불균형한 관계의 역할을 먼저 가르치는 셈이다. 장애가 있는 학생이 도전행동을 보여 반 친구들을 다치게 해도 제대로 설명해 주거나 고쳐주지 않고, "얘는 장애인이니까 네가 참아"라는 무책임한 말은 장애인 비장애인 학생 모두에게 잘못된 메세지를 준다.
학교의 에이블리즘은 제도적 차원에서도 드러난다. 학교가 표준화된 시험만을 강조하고 대체 평가 방식을 인정하지 않을 때, 장애 학생들은 본질적으로 불리한 경쟁 구조에 놓인다. 자폐나 ADHD가 있는 학생의 행동 특성을 단순히 문제행동으로만 보고 동일한 기준으로 징계하거나 과하게 비난하는 것도 구조적 차별의 한 예이다. 또한 IEP(개별화 교육계획)와 같은 제도가 존재하더라도 실제 교실에서 학교의 지원이나 교사의 능력 문제로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제도적 에이블리즘이라 할 수 있다.
결국 학교에서의 에이블리즘은 대놓고 “장애 학생은 안 된다”라고 말하는 형태가 아니라, 비장애인을 ‘정상’의 기준으로 놓고 교육이 굴러가고 그 외의 방식은 배제되는 데서 비롯된다. 문제는 이러한 기준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교실에서 공평함과 공정함은 모두에게 똑같이 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특성과 강점을 살려 다르게 기여하게 하는 데 있다. 그러나 학교가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할 때, 에이블리즘은 계속해서 학생들의 가능성을 억누르게 된다.
따라서 교사와 학교가 먼저 공정함의 올바른 의미를 재정의해야 한다. ‘모두 똑같이’가 아니라 ‘각자 다르게, 그러나 동등하게’라는 인식이 자리 잡을 때 비로소 교육은 진정으로 포용적이 될 수 있다. 에이블리즘을 교실 속에서 찾아내고 그것을 바꿔내는 일은 단순한 배려의 문제가 아니라, 학생들의 배움과 성장, 그리고 교육의 본질적 정의를 지켜내는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미국에서는 1990년에 제정된 미국장애인법(ADA)과 장애인 교육법(IDEA)을 통해, 학교, 공공기관, 직장, 교통, 웹사이트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accommodation(합리적 조정)을 법적의무로 규정하고 있으며, 학교와 직장 같은 실제 현장에서도 '시험 시간 연장', '대신 문제 읽어주기', '일대일 시험 환경', '소음 차단 헤드폰 제공', '대체과제나 보조기기 허용', '출입구 접근성', '알림장치', '유연근무', '장비 및 보조기술' 또는 '보조인력'등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앞에 예로든 학교 안 에이블리즘은 소송의 나라 미국에선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다. 오늘 이글에서 내가 집중하고자 하는 부분은 미국이 아닌, 한국 사회에 대한 현실이다.
얼마 전 “장애인의 이동권”이라는 주제가 정치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한창 출근길 시위가 이어지던 시기, 뉴스 인터뷰에 누군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장애인도 같은 시간에,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같은 직장에 다닐 권리가 있다.” 그러자 그 뉴스 아래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대중교통 이용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같이 일하는 것까지 바라는 건 너무 민폐 아닌가?”
정부가 장애인이 원하는 만큼 이동권을 확대시켜주고 나면, 그 뒤에는 또 어떤 것을 바랄 것이냐는 댓글들이 있었다. 기업과 사회가 휠체어 사용자가 건물 안에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구조를 바꾸고, 청각장애인을 위해 수어 통역사를 두고, 발달장애인이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훈련을 제공하면, 도대체 어디까지가 권리고 어디부터가 호의냐며 볼멘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었다.
나는 그 댓글들을 읽으며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에 쏟아졌다. 장애인이 같이 일하는 것이 왜 ‘민폐’일까? 이 사람은 장애가 있는 사람과 함께 일해 본 적이 있을까? 만약 정말 그 사람이 민폐라고 느껴졌다면, 그것은 장애인 동료의 탓일까, 아니면 직장 문화나 시스템의 탓일까? 직장이 제도적으로 장애인 동료를 위한 합리적 조정(reasonable accommodation)을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민폐를 끼친다고 느꼈다면, 그건 장애인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사람 사이의 문제라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비장애인 동료가 민폐였던 적은 없었나? 비장애인 동료와 트러블이 생기면 그것은 대인관계의 문제이고, 장애인 동료와 트러블이 생기면 그것은 장애의 문제인가? 이 사람은 자라면서 장애가 있는 학생과 친구였던 적이 없나? 자신의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장애가 있는 학생이 일반학급에서 같이 공부하려고 하는 것도 민폐라고 생각할까? 그런 생각을 하는 부모 밑에서 큰 아이들은 어떤 사회를 이루며 살게될까?
이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하게 하는 댓글은 그 사람 하나만이 아니었다. 많은 댓글들에서 “배려” “민폐” “진상” “호의” “특혜”라는 단어들을 발견했다. 그 어느 댓글에도 “당연한 권리”나 “합리적 조정”이라는 단어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온라인상에서 이 무지막지한 말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정말 오프라인에서도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일지가 나는 아직도 제일 궁금하다. 정말 한국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지금껏 학교가 장애인을 배제하며 교육하고, 사회가 장애인을 배제하며 일했지만, 우리 사회와 국가가 잘 성장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태껏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안 해봤으니 괜찮았다고 착각한 건 아닐지 생각해 볼 문제다. 함께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고, 무엇을 성장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무엇을 얻지 못하고 있는지조차 감도 못 잡고 있는 것이다.
앞서 설명했듯, 사회학적으로, 장애는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사회적 장벽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개인이 "장애"라고 느끼는 점을 없애기 위해선, 개인의 "결함"을 보정할 것이 아니라, 사회의 "장벽"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합리적 편의제공/조정(reasonable accommodation)은 사회적 장벽을 제거하는 방식 중 하나다. 또한, 장애를 개인의 결함으로만 치부하려는 사회문화적 변화의 시작점은 합리적 조정(accommodation)을 향한 시민들의 인식(perception)과 태도(attitude)에 있다.
국제 인권법인 UN 장애인권리협약 (UN CRPD, 2006)에 따르면, 합리적 조정(reasonable accommodation)을 “장애인이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모든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향유하고 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적절한 수정과 조정”으로 정의하였다. 즉, 어커모데이션(합리적 조정)은 권리 실현의 필수조건이지 특혜가 아니란 뜻이다. 한국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등에 관한 법률(장차법, 2007) 제4조에서도 '정당한 편의제공(reasonable accommodation)의 거부를 차별로 규정하였다. 한국에서도 법적으로 어커모데이션(합리적 조정)은 의무이지 선택적 배려가 아님을 명백히 한다.
안경을 낀 학생을 가리키며, "왜 쟤만 글씨가 더 잘 보이게 안경을 허락해요? 눈이 나쁘게 태어난 건 사회나 학교의 잘 못이 아니니, 태어난 그대로 잘 안 보이는 상태로 공부하고 시험 보는 게 모두에게 공평하죠! 안경을 허락하는 것은, 안경을 끼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역차별이에요"라고 말하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가 아직 그만큼 발전하지 못해서 혹은 배우지 못해서 지금껏 사용하지 않던 새로운 어커모데이션(합리적 조정)을 들여올 땐, 꼭 이런 바보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중학교 사회 시간에 교과서에서 감명 깊게 읽은 부분 중에 하나가 바로, 절대적 평등과 상대적 평등의 정의이다. 절대적 평등은 개인의 배경, 능력, 상황 등 어떤 차이도 고려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무조건 똑같이 대우하는 것이다. 인권, 참정권, 선거권 등이 절대적 평등에 속한다. 상대적 평등은 각 개인이 처한 상황과 필요에 따라 합리적인 차등을 인정하는 것이다. 남녀의 다른 신체조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이, 저소득층 학생의 장학금등이 이에 속한다.
이렇듯 우리 사회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권리를 보장하는 절대적 평등을 기본 원칙으로 삼고 사회 질서를 구축하지만, 각 개인의 처한 상황과 능력을 고려한 상대적 평등을 통해 사회 정의를 실현한다. 즉, 원칙적으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절대적 평등으로 모두의 기본 권리를 보장하고, 상대적 평등으로 그 권리를 실질적으로 모두가 누리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평등의 기본 정의조차 구분하지 못해, 쓸 곳 안 쓸 곳을 분간하지 못하고 뒤섞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학자 T.H. Marshall(1950)은 유명한 저서 '시민권과 사회계급(Citizenship and Social Class)'에서 건강한 민주주의는 시민 모두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불평등을 조정해야 한다고 했다. 정치 철학자(Political philosopher) John Rawls(1971)는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에서 불평등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을 조정해 모두가 공정하게 기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라고 보았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말하는 평등이란, 단순히 동일 대우가 아니라, 모. 두. 가 참여하고 기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은 국제인권법에서도 제도적 근거를 가진다. UN 세계인권선언 제7조와 UN 장애인권리협약(CRPD)은 형식적 평등(formal equality)을 넘어서, 실질적 평등(substantive equality)을 보장할 것을 각국에 요구한다. 이는 교육 또는 고용 등에서 합당한 조정(reasonable accommodation)을 통해 모두가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할 법적 의무로 발전했다. OECD(2012)는 이를 “공정성(Equity)”이라 정의하며, '모든 개인이 출발선에서 동등한 기회를 갖도록 지원하는 것'이 교육과 사회의 핵심 가치라고 설명했다.
사회가 공평, 공정, 평등의 정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올바른 방향으로 굴러가기가 힘들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장애에 대한 편견, 즉, 에이블리즘이다. 에이블리즘은 장애인을 무조건 비장애인보다 '못한다'라고 전제하는 태도이다. 예를 들어, 흔히들 장애인을 고용하면 일의 효율이 낮다던가 팀에 부담이 된다는 걱정을 한다. 그러나, 다양한 인재가 배제될 때, 사회는 혁신의 기회를 잃게 된다. 즉, 에이블리즘은 장애인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업, 사회, 국가 경쟁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재를 선발할 때, 기본적으로 채용의 기준은 본질적 업무, 즉 핵심 역량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자료분석가를 뽑는데 종이 박스를 옮기거나 정수기의 물통을 가는 일을 능력의 기준으로 삼는 건 불필요한 배제이다. 부수적 업무는 팀 내 재분배나 적절한 장비 도입으로 해결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회사는 잡무와 예외 상황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특히, 한국의 조직 문화 특성상, 각 직무마다 업무분장의 경계가 모호하고, 그 선을 상사라는 이유로 또는 사회생활이라는 이름으로 넘나 들며, 누군가는 일을 더 맡아서 하기도 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러나 에이블리즘을 철폐하자는 관점은 그 상황을 이유로 장애인을 배제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시대와 세상이 변했으니, 업무의 본질과 부수적 업무를 정확히 분리하고, 조직 차원에서 역할 재분배와 Accommodation(합리적 조정) 같은 시스템 보완을 책임지라고 요구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실천하는 방법은 명확하다. 채용공고에 불필요한 요건을 넣지 말고, 직무 설계 시 보조장비를 반영하거나, 보조인력을 고용하고, 상황에 따른 매뉴얼을 디테일하게 만든다. 조직문화에서는 공정성은 똑같이가 아니라 각자 다른 방식으로 동등하게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리더십은 투명하게 원칙을 공유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도맡아 하는 게 리더십이다. 장애인을 고용하더라도, 법에 따라 Accommodation(합리적 조정)을 제공하여, 그 누구도 ‘내가 대신 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비용을 생각할 것이다.
미국 Job Accommodation Network(JAN)의 조사에 따르면, 59%의 Accommodation(합리적 조정) 비용이 전혀 들지 않으며, 평균 비용도 500달러 이하라고 보고하고 있다. 한국도 그정도의 비용만 들까? 한국의 건물들은, 건물을 처음 설계하고 건축할 때부터 법을 지키지 않은 건물들이 너무 많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야 뒤늦게 장애인 접근성이나 물리적 어커모데이션을 들이려면, 당연히 돈이 더 들 수밖에 없다. 이건 어찌 보면 자업자득이다. 접근성을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은 사회가 그 대가를 뒤늦게 치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사람들은 그 비용이 들어가는 현실을 보며 “장애인 때문에 돈이 더 든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장애인의 탓이 아니다. 법을 어기고 설계한 과거의 사회 탓이다. 당장 돈이 들어간다고 소방법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회에서, 장애인 직원을 위해 시설을 더 설치해 줄 리가 만무하다. 장애를 개인의 불편함으로 돌리고, '우리 사회의 설계 오류'를 구조적으로 은폐하는 방식이다. 참으로 비겁하고 챙피한 일이다.
이렇듯 어코모데이션은 비용보다는 사회가 이를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적용하느냐에 달려있다. 결국 문제는 제도의 부재이기 전에, 사회적 인식의 결여에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장애인에게 제공되는 Accommodation(합리적 조정)을 종종 '특혜'나 '호의' 라고 부르며 역차별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단순히 배려심 부족 때문이 아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Accommodation(합리적 조정)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이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까? 가장 큰 이유는, 법을 어기는 사회학적 구조나 도덕경제의 왜곡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한국의 집단주의 문화의 특성 때문이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유교적, 집단주의적 뿌리를 가지고 있어, 개인보다 집단의 조화를 중시하는 사회이다. 이런 문화에서는 내가 조금 불편해도, 모두가 편해야 한다는 규범이 강하게 작동한다. 그런데 이 질서가 소수나 약자의 행동권까지 제한하는 방향으로 흘러도, 공동체의 질서와 타인의 시선을 우선시 하는 것을 '덕'이라 여기고,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는것을 '폐'가 되는 행위로 여긴다.
서구권에서는 불편함이 발생하면 문제를 고쳐야 할 신호로 받아들이지만, 한국에서는 불편함을 감수하면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이고, 불편함을 표현하면 참지않는 자기중심적 행위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한국은 특이하게도 약자의 권리주장은 늘 권리의 문제이기 보다 도덕적 문제로 오해를 받아왔다. 장애인 이동권 시위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경우, 장애인 이동권은 ADA(1990)법에의해 권리로 명확히 규정되어 있어, 아무리 공동체의 '불편'을 끼친다고해도, 그것은 법의 문제로만 논의된다. 애초에 정부가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일이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반면, 한국은 법에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배려의 문제', '선의의 문제', '공동체를 위협하는 민폐의 문제'로 법의 언어가 아닌, 도덕감수성의 언어 또는, 감정적인 언어로 반응한다. (무려) 정부가 법을 지키지 않았어도, 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조용히 해결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한국사회는 법과 제도보다 감정과 분위기로 움직이는 사회라는 뜻이다.
감정에 따라 움직이면, 법이 무엇이었는지, 제도가 무엇이었는지, 단어의 정의가 무엇이었는지, 무엇이 우선순위고 무엇이 본질이었는지, 알맹이는 없어진채, 껍데기만 가지고 매번 탁상공론이나 하고 앉아있게 된다. 문제의 본질만 놓고보면 1년이면 해결 될 일을, 감정싸움, 이념싸움, 정치싸움으로 10년을 끌고갈 필요가 있겠는가. 결국 따지고 보면 그것이 공동체에 불편을 끼치는 일 아니겠는가.
이러한 집단주의적 문화는 한국의 조직문화에도 뿌리가 깊어, 어커모데이션(합리적 조정)이 들어오기가 힘들다. 우리 사회가 애초부터 업무와 역할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은 채,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대처하고, 불필요한 능력까지 당연히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사회적 관습과 조직 내 관례가, 계약된 업무외에 “다 같이 해야 하는 일” “다같이 보내야 하는 시간”이라는 이름으로 쓸데없이 개인의 시간과 노동력을 낭비해 왔다. 이러한 모호한 지반 위에 어커모데이션을 얹으려니, 사람들은 늘 혼란을 느낀다. 결과적으로 “왜 저 사람만 예외냐?”라는 불만이 터져 나오고, 그 불만은 곧 역차별이라는 왜곡된 담론으로 이어진다.
해법은 분명하다. 지반을 다시 다져야 한다. 불필요한 요구는 걷어내고, 직무 수행에 정말 필요한 능력만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다시 말해, 본질적 업무와 부수적 업무를 명확히 분리하고, 불필요한 기준을 없애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Accommodation(합리적 조정)이 “특혜”가 아니라 “필수적 조건”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이를 귀찮아하고, 쉽게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변화는 늘 기존 질서를 흔들고, 조직과 사회의 썩은 부분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그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기 싫어한다. 그래서 새로운 변화의 주체로 들어오는 장애인을 배척하고, 책임을 그들에게 돌리려 한다. 역차별이라는 말은 사실 게으른 이들의 저항과 회피의 언어일 뿐이다.
Accommodation(합리적 조정)은 불공정한 특혜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가 지금까지 방치해 온 잘못된 관습과 구조를 바로잡는 과정이다. 그것을 외면하고 역차별이라는 프레임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사회의 방어 기제에 불과하다. 불편한가? 미안하지만, 불편함은 진실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 거울을 마주볼 용기가 없는 사회는 결코 발전할 수 없다. 이 못난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는 겁쟁이들은, 거대한 세상을 등에 업고 언제나 약자를 향해 손가락질한다. 그렇다면, 이제 누가 우리와 함께 서서 세상을 향해 소리쳐 줄 것인가.
내가 이글의 서두에서 에이블리즘을 설명하기 위해, 인종차별 성차별이 극심했던 몇십 년 전의 과거를 예로 들었던 것처럼, 30-40년 후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그때 사람들은 그걸 차별인지도 모르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았대?'라며 우리 세대를 무시하고 비웃는 날이 오길, 나는 정말 간절히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