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의 정치학(The Politics of Inspiration)
장애인의 '성공 스토리'를 보면서 비장애인이 감동받거나 용기를 얻는 현상을 영어권에서는 흔히 *Inspiration Porn이라고 부른다. 호주 장애인 운동가 Stella Young이 대중화한 개념이다. 한국어로는 공식 번역은 없지만 사전적으로는 '감동 포르노', 또는 조금 더 중립적으로는 '감동 소비'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뜻을 의역하자면, '장애인의 성공담을 비장애인의 감정적 위안이나 교훈으로 소비하는 현상'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Porn이라는 단어는 여기서 성적 의미보다는 '소비되는 자극물'이라는 뉘앙스를 가진다. 즉, 장애인의 삶과 이야기를 비장애인이 감동, 교훈, 위안을 얻는 도구로 소비하는 현상을 말한다.
핵심은 장애인을 그저 '대상화(objectification)'한다는 점이다. 이사회가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같은 평범한 일반 시민이 아니라, 비장애인의 감정을 위한 ‘대상(object)’으로만 바라본다는 의미를 잘 담고 있다. 이것이 뭐가 그렇게 잘 못인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장애인의 삶이나 성취를 자신들과 같은 인생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지 않고, 비장애인이 '감동받기 위한 도구'로 소비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장애인인데도 이렇게 열심히 살다니 대단하다!”라거나, “나는 두 팔 다 있는데도 불평했는데, 저 사람 보니까 힘이 난다.”라는 식의 말이다. 장애인의 개별적인 현실이나 권리보다, 비장애인의 감정적 만족을 위한 의도된 연출이 강조된다는 것. 무엇보다, 장애인의 스토리를 그저 수많은 인생사 중 하나로 동일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비장애인보다 열등해서 못할 줄 알았는데, 해내다니 대단하다는 에이블리즘(Ableism)에서 파생되어 나온 생각이다.
*나는 오늘 이 'Inspiration Porn'이란 단어를 장애인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우리 사회의 약자들 모두를 포함시켜 설명하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인 대상화'라고 번역하려던 것을 '감동 대상화'라고 번역하기로 결심했다. Stella Young이 지적한 '장애인 대상화'의 개념을 무리하게 확대 해석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이 단어가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만큼, 비장애인의 이해를 돕고자, 어쩌면 이 이야기속 성공 신화의 주인공인 장애인의 이해를 돕고자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설명함을 이해해달라.
장애인을 대상화하는 것이 왜 잘못된 일인지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 비장애인들에게 ‘만약 당신이 대상화된다면 어떤 기분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기 위함이다. 동시에, 장애인 스스로도 사회가 자신을 대상화하려는 시선에 속지 말고, 그 누구도 타인의 감동 서사 속에서 자기 존재를 규정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다 대상화되어서도, 비교 대상이 되어서도, 서로를 폄하하거나 깎아내려서도 안된다. 나는 무언가를 할 수 있고 없고 와 상관없이,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같은 인간일 뿐이라는 인식, 즉, 에이블리즘(Ableism)을 넘어서려는 태도를 더 우선시한다. 따라서, 이 단어의 의미와 대상을 원래 의도보다 더 확장 시켰다고 생각되거나, 장애인을 대상화시키지 말자는 것에 비장애인을 왜 끌어들이지?라는 의문점을 가지셨다면, 이 글을 끝까지 읽어 주시기 바란다.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사회는 '성공 스토리' 또는 '성공 서사'를 유난히 사랑한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내 성공한 개인의 이야기는 대중의 감동을 자극하며, 뉴스, 광고, 드라마, SNS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홈리스였지만 하버드에 간 소녀', '한 팔로 피아노를 치는 장애인 음악가' 같은 서사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감동의 이야기로 소비된다.
이런 문화는 단순히 개인의 영웅담을 넘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체제적 이념을 뒷받침한다. 즉,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개인의 자유와 경쟁을 긍정하는 사회의 핵심 신화를 재확인시킨다. 감동은 개인의 감정이지만, 그 감정은 언제나 자신이 속한 사회와 정치 체제의 확신과 안정감속에서 작동한다.
감동(Inspiration)은 원래 타인의 경험을 통해 자기 존재를 재확인하는 감정이다. 누군가의 성공담을 듣고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용기를 얻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리적 반응이다. 특히 미국과 한국의 현대 사회의 다수 시민은 스스로가 구조적으로 불안정한 ‘상대적 약자’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적 불평등, 고용 불안, 교육 경쟁 등으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서 성공한 누군가를 통해 자기 효능감(self-efficacy)과 존엄감의 회복을 얻는다. 약자의 성공담에 공감하고 감동하는 이유는 자기 동일시 현상 때문이다. "나도 힘든데, 나보다 더 힘든 저 사람도 해냈으니 나도 할 수 있겠다." 이 감정은 순수한 공감의 형태이지만, 동시에 구조적 현실을 비가시화(invisibility)하는 위험을 내포한다.
개인의 감동이 사회적 차원에서 계속해서 반복되고 제도화될 때, 그것은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결국, 이데올로기적 장치(ideological apparatus)로 기능한다. 과거엔 공포, 혐오, 분노등 부정적 감정을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권력의 도구로 사용했다면, 현대 사회에선 감동, 영감, 희망 같은 긍정적 감정을 체제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도구로 사용된다. 나는 이것을 영감의 정치학 또는 감동의 정치학(The Politics of Inspiration)이라 부른다.
감동(Inspiration)은 개인에게 위로를 주지만, 동시에 체제에 대한 비판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저 사람도 저렇게 했는데, 나도 노력하면 된다.” 이 문장은 희망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감동은 체제의 결함을 보이지 않게 하고, 사회적 실패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효과를 낳는다. “장애인인데도 저렇게 열심히 살다니 대단하다.” 이 문장은 겉보기에 칭찬이지만, 실제로는 장애를 극복해야 할 결함으로 전제하고, '정상성'을 기준으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한다. 이러한 서사는 장애인을 사회적 주체로 보기보다, 비장애인의 감정적 정화(catharsis)를 위한 ‘소재’로 만든다. 장애인의 현실적 어려움이나 구조적 장벽은 보이지 않게되고, 오로지 감동적인 개인의 의지만 남는다. 그 결과, 감동은 구조적 불평등을 개인의 미담으로 대체하는 정치적 장치가 된다.
우리는 다 같은 '서민'이라고 생각하지만, 약자 내부에도 위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된다. 같은 저소득자라도, 비장애인이 장애인보다 제도적 접근성이 높고, 같은 이민자라도, 한인 같은 주요 이민집단은 몽족 같은 소수 이민자 보다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나도 약자다”라는 말은 진실이지만, 그 말이 더 큰 불평등 구조를 가릴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감동(Inspiration)은 언제나 양면적이다. 개인에게는 희망이지만, 사회적으로는 비판을 무디게 할 수 있다. 성공신화에서, 우리의 감동은 생존의 정서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정치체제의 심리학이다.
감동(Inspiration)을 느끼는 것은 죄가 아니다. 문제는 그 감동이 어디로 향하느냐에 있다. 만약 감동이 단순히 '나도 더 열심히 살아야지'로 끝난다면, 그것은 개인의 자기 위안이다. 하지만 '왜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살아야만 겨우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사회적 성찰이 된다. 내가 제안하는 것은 감동을 금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감동의 방향을 바꾸자는 제안이다. 약자의 성공담을 보며 감동할 때, 우리는 그 개인의 노력뿐 아니라 그가 마주한 사회적 장벽을 함께 봐야 한다. 그럴 때 감동은 더 이상 체제를 유지시키는 장치가 아니라, 체제를 변화시키는 에너지가 된다.
감동(inspiration)의 위험은 그것이 구조적 문제의 해법을 개인의 미담으로 대체할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국민의료보험이 없던 시절 가난한 소년이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해 의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서 제도의 부재를 문제 삼지 않았다. “왜 모든 국민이 의료보장을 받지 못하는가?”라는 질문 대신, “그래, 나도 열심히 공부해서 우리 가족을 살려야겠다”로 끝나버렸다. 그 순간, 사람들의 감동은 구조적 결함을 드러내는 비판 이기 보다, 체제의 결함을 정당화하는 감정적 마취제가 된다.
우리는 제도의 불평등을 인식하지 못한 채, ‘노력하면 된다’는 신념 아래 고통을 내면화하고 살아간다. 마찬가지로, 청각장애인이 피나는 노력 끝에 음성언어를 익혀 동사무소에서 누구의 도움 없이 업무를 처리했다는 이야기에 감동하기보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왜 공공기관과 의료기관에는 수어 통역사가 배치되어 있지 않은가?” 문제는 개인이 음성언어를 배우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회가 언어적 접근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동 서사는 이 사회적 책임을 은폐하고, 오히려 '극복한 개인'의 의지와 노력을 칭송함으로써, 제도의 미비를 미덕으로 전환시킨다. 이것이 감동의 정치학(The Politics of Inspiration)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조금 극단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학부 때 사회학을 전공한 나는, 한국과 미국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소비되는 '성공 스토리'를 체제선전물(Propaganda)이라고 부른다. 이 서사들은 단순히 개인의 감동적인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약속하는 핵심 신화를 반복적으로 각인시키는 문화적 장치다.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개인의 자유와 경쟁은 정의롭다”, “불평등은 있지만 기회는 평등하다.” 이 메시지는 인간의 존엄과 가능성을 노래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체제의 결함을 은폐하고 시민의 불만을 감정적으로 흡수하는 정치적 언어다.
성공 서사는 제도의 한계를 보여주는 비판의 기회가 아니라, 체제의 작동을 미화하는 감정적 장치로 작용한다. 가난한 소년이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의사가 된 이야기는, 사회복지나 의료권의 부재를 고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신념을 통해 불평등한 구조를 개인의 책임과 미담으로 전환한다. 감동은 체제에 대한 저항보단, 체제에 대한 충성을 이끌어내는 가장 부드럽고 효율적인 방식이 된다. 문제는 감동이 개인적 위안에 머무를 때, 그것이 체제의 정당성을 유지하는 정치적 메커니즘으로 전환된다는 점이다. 당신이 그저 감정에 심취해 이러한 성공 서사를 자기 자신만을 위해 소비하고 끝내면, 이 사회 또한 대중의 감동, 두려움, 혐오, 사랑 등 모든 감정을 결국 정치적 자원으로 소비하고 만다.
이 체제선전물로써의 성공 서사의 더 큰 문제는, 실제로 개인의 인식 속에 '구조적 무지'와 '도덕적 오만'을 내면화시킨다. 성공 서사를 소비하는 이들은 구조적 무지에 빠지고, 성공 서사의 주인공들은 도덕적 오만에 빠지게 된다. 이 성공 서사의 덫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비장애인뿐만 아니라 장애인도 inspiration porn(감동 대상화)이라는 성공 서사에 너무도 쉽게 빠진다. 특히, 본인이 그 성공 서사의 주인공이 되었을 때, 스스로를 대상화하는 것을 자처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Inspiration Porn(감동 대상화)에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를 포함시킨 이유다.
비장애인이라고 해서 어떠한 개인적인 '결함'이나 사회적 '장애'를 겪지 않고 사는 것은 아니다. 인생에는 너무나 많은 변수가 있다. 나는 가졌지만 상대는 가지지 못했을 수 있다. 나에게는 너무도 당연하게 주어져서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으로 고통받는지 조차 상상하지 못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칫 자신이 경험한 것을 상대도 경험했을 것이라 착각하거나, 나에게 당연히 주어졌던 것들을 상대도 당연히 가졌을 것이라고 오해한다. 모두가 나처럼 풍족하고 좋은 배경, 환경, 부모, 가족, 지식, 건강, 경험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대하는 순간, 우리는 어긋난 대화를 하게 되고, 왜곡된 관계를 맺게 된다. 그 결과, 세상을 ‘공정한 경쟁의 장’으로 보는 오류에 빠진다. 그리고 너무나 쉽게, 너무나 성급하게 이렇게 말한다.
"홈리스들은 다 게을러서 저렇게 길바닥에서 자는 거야.” "가난한 나도 해냈는데, 돈 있는 너는 왜 못해?" "장애가 있는 나도 해냈는데, 장애가 없는 너는 당연히 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여자인 나는 부모도 봉양하고, 애들을 앞뒤로 안고 업어가며 성공했는데, 혼자만 챙기면 되는 남자인 너는 왜 성공 못해?" "나는 코피 쏟으면서, 밤새 공부했어. 너는 피를 덜 쏟아서 이 대학에 못 들어간 거 아닐까?" "영어 못하는 이민자인 나도 공부 열심히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영어가 모국어인 백인인 너는 열심히 안 해서 겨우 거기서 일하는 거지."
한국의 다큐멘터리 〈교육격차〉 에서 한 학생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 학생은 말했다. “저는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왔어요. 다른 학생들도 열심히 했다면 올 수 있었겠죠. 환경 핑계를 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 학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 100퍼센트 자신의 노력 덕분일까? 다른 학생들이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한 것이 100퍼센트 노력 부족 때문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노력의 결과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자원(resource)이 개입되어 있다. 경제적 지원, 부모의 교육 수준, 안전한 주거 환경, 교사의 관심, 정서적 안정, 배경에서 얻어진 인적자원, 이 모든 요소들이 보이지 않게 개인의 노력 밑에 단단한 지반으로 자리 잡고 있다. 땅밑의 지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겉으로 쌓아 올린 당신의 노력만이 전부라고 외치는 것은 무지이고 오만이다.
그러나 체제는 이 복잡한 사회적 변수를 지운 채, 결과만을 도덕 화한다. 성공은 미덕이 되고, 실패는 게으름이 된다. 감동은 구조를 가리고, 노력의 신화는 불평등을 합리화한다. 그렇게 우리는 성공한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시스템의 실패를 찬양하는 사회적 착시 속을 걷는다. 역경을 뚫고 어느 위치까지 도달한 사람들은 박수받을 만하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도덕적 오만함이 되어, 다른 이들이 겪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그들의 노력을 폄하하고, 인생을 재단하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당신에게 있었던 부모가, 그들에겐 없었을 수 있다. 당신에게 있었던 책과 공책이, 그들에겐 평생 주어지지 않았을 수 있다. 당신이 먹었던 삼시 세 끼가, 누군가에겐 눈감는 순간까지 간절했을 수 있다. 당신은 쉽게 이용했던 교통수단을, 누군가는 며칠에 걸려 알아보아야 한다. 당신은 필요할 때마다 가던 병원을, 누군가는 숨이 넘어가는 순간이 아니면 사치라고 여긴다. 당신이 세계를 돌아다닐 때, 누군가는 자신이 지내는 방한칸을 벗어나기 힘들어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언제나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없는 것을 그 사람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어 불만 일 수 있겠지만, 반대로 나에겐 너무도 익숙해서 있는지 조차 모르던 것을, 그 사람은 갖고 싶어도 못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차이들은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이다. 모든 인생은 저마다의 스토리가 있다. 그래서 질투할 것도, 폄하할 것도 없다. 내가 더 잘 났다고 으스댈 필요도, 나는 왜 이럴까 자책할 이유도 없다. 그에게 없는 것이 나에게 있고, 내게 없는 것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아는 순간, 우리는 서로 비교와 대상화하는 것을 멈추게 된다. 그리고 인간과 인생에 대한 이해가 시작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쉽게 타인을 재단하고 비교하게 되는가. 그것은 체제가 만들어낸 경쟁의 언어를 우리가 감정의 언어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교는 생존의 도구이자 정체성의 기준이 된다. 그 구조 안에서 인간은 타인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자신의 불안을 덜기 위해 남을 판단한다. 그 판단은 도덕의 이름을 빌리지만, 실제로는 사회가 우리 안에 심어 놓은 자기 정당화, 더 나아가 체제정당화의 장치다.
감동(Inspiration)이 개인의 서사에서 출발해 체제의 선전으로 변할 때, 우리의 감정은 더 이상 ‘공감’이 아니라 ‘통제’의 언어가 된다. 우리 사회에서 성공담은 “나도 할 수 있다”는 동기에서 “그러니 너도 해야 한다”는 오만함으로 바뀌고, 타인의 고통은 “불쌍하다”는 위로에서 “그건 네 탓이다”라는 판결로 변한다. 이때 감동은 공감이 아니라 감정의 위계, 즉 인간 사이의 서열화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장애인을, 이민자를, 가난한 사람을, 혹은 나보다 덜 가진 사람을 ‘감동의 도구’로 삼기도 하고, ‘비교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 우리는 상대를 대상화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대상화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게 인간은 서로를 재단하며, 체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감정을 소비한다.
이제는 그 감정을 거꾸로 돌려야 한다. 감동(Inspiration)이 체제를 정당화하는 언어가 아니라, 사회를 성찰하는 언어가 되게 해야 한다. 누군가의 삶을 보고 “대단하다”라고 느꼈다면, 거기서 멈추지 말고 물어야 한다. “왜 그 사람은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 “내가 살아가는 사회는 그에게 어떤 벽이었을까?” 이 질문이 시작되는 순간, 감동은 체제선전이 아니라 깨어남이 된다. 그때 우리는 남을 평가하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이민자와 시민, 부자와 서민, 남성과 여성, 누구도 서로의 ‘영감거리’나 ‘교훈거리’가 되어선 안 된다. 모든 인간은 각자 다른 하나의 유니크한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는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의 상대'가 되어야만 한다.
앞으로 매체가 Inspiration Porn을 보여준다면, 그 감동을 소비하지 말고, 감동을 해석하자. 감동을 통해 체제의 언어를 강화하지 말고, 우리 사람의 언어를 회복해 보자.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를 대상이 아닌 동료 시민으로 마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