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vs. 교사

어느면을 바라보는가

by 신지은

올해 첫째가 다섯 살이 되면서 킨더에 입학하게 되었다. 미국 공립학교는 K-12 시스템으로, 킨더가든부터 정규 학년이 시작된다. 그렇게 첫째는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둘째는 5분 거리에 있는 같은 디스트릭의 다른 학교에서 프리스쿨을 시작했다. 기특하게도 첫째는 엄마가 반 아이들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스스로 학교에 잘 적응해 주어 참 고마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라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지, 내 아이 일은 감정도 이성의 끈도 잘 조절이 안되고 놓치기 일쑤다.


새 교장이 부임하면서 모든 킨더 아이들의 학업 수준을 파악하기 위한 스크리닝을 진행했다. 내가 미국식 헬리콥터 맘인지, 한국식 치맛바람 엄마인지 아직 정체성이 확실하진 않지만, 가족들은 내가 조금 극성스러운 면이 있다고 말하곤 한다. 다행히도 프리스쿨이 끝날 무렵부터 집에서 틈틈이 음운 인식(phonemic awareness)을 가르쳤고, 여름방학 동안에는 CVC words, sight words를 마스터시키고 문장 구조(sentence structure)까지 공부시켰다. 그 결과 약 1년 반 정도의 선행이 된 셈이라 스크리닝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사실 이 스크리닝은 통과 여부를 가리는 시험도, 순위를 매기는 평가도 아니고, 단순히 전체 아이들의 수준을 파악해 커리큘럼을 조정하기 위한 절차였다. 그러니 걱정할 만한 시험은 아니었지만, 한국 엄마 특유의 욕심이랄까…)


어쨌든 가벼운 마음으로 스크리닝 날을 예약했는데, 하필 그날 내 일정이 transfer IEP 미팅으로 꽉 차 있었다. 다른 날로 바꾸려 해도, 학기 시작 전 일주일은 온통 미팅뿐이었다. 그나마 미팅 사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아이를 집에서 픽업해 학교로 데려오고, 내 교실에 맡겨두며 동료 교사들에게 부탁할 수 있는 날은 그날뿐이었다. 그래서 PD(professional development)와 IEP 미팅 사이 짧은 점심시간에 집으로 가 아이를 데려왔고, 프런트 오피스 행정직원들에게 “제가 곧 IEP 미팅에 들어가야 하니, 제 아이가 스크리닝을 마치고 제 반에 들어가 기다릴 수 있도록 안내해 달라”라고 부탁한 뒤 컨퍼런스룸으로 향했다.


그렇게 미팅을 마치고 학부모님을 현관으로 안내하고 컨퍼런스룸으로 돌아가는데, 아이가 프런트 오피스 바닥에서 울상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분명 내 클래스룸에 아이를 드랍해 달라고 부탁했는데도, 잊어먹고 아이를 그저 오피스 바닥에 내버려 두고 자기 일들을 본 것에 야속한 마음이 있었는데, 그 마음에 불을 지르는 아이의 말, “엄마, 근데 나 테스트 안 봤는데?”


IEP meeting은 한 시간짜리 미팅이었다. 그동안 다섯 살 (생일도 안된) 꼬마 혼자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여, 엄마가 왜 오지 않는지 영문도 모른 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래도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무슨 일인지 파악 하자는 생각으로, 클래스룸으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 아이의 손을 꼭 잡고 프런트 오피스로 향했다. 그리고 프런트 오피스의 행정직원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이걸 사람들은 천불이라고 하지 아마. 나도 모르게 다짜고짜, “얘 아직 테스트 안 봤다는데?”라고 했다. 그러니 엄청 황당한 얼굴로 민망한 미소를 띠며, “아니야 아니야! 얘 테스트 다 봤어! 00 선생님이 데리고 가서 시험 보고 다시 나왔는 걸! 네가 직접 00 선생님한테 가서 물어봐도 좋아!”라며 손사래를 치며 응답했다.


그 말에 당황한 나도, “야! 너 시험 봤다며!”라고 아이에게 물어보니, 되려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아이. 얼굴이 붉어진 나는 황급히, “어, 그래, 미안. 고마워요!”하고 나왔다. 프런트 오피스에서 내 반까지는 몇 걸음 되지 않는 거리였는데, 그날따라 그 길이 얼마나 멀게 느껴지던지. 말할 땐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내 얼굴과 눈빛이 그 직원에게 얼마나 사납고 살벌하게 비쳤을까 싶어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내 반으로 가는 그 복도에서 붉으락 푸르락 사나웠던 내 얼굴의 잔상이 겨울 칼바람처럼 불어서 온몸의 피부에 계속해서 내리 꽂혔다. 학생, 학부모, 행정팀, 동료교사, 보조교사들과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친절과 교양을 무기로 웃음을 잃지 않았던 내가, 자식일에는 1초도 안돼 얼굴을 바꾸다니 너무도 창피하고 자괴감마저 들었다.


(게다가 나는 우리 디스트릭에서 유일한 동양인 교사다. 그 누구에게도 책잡히지 않으려고, 동양인 스테레오타입에 맞게 행동하지 않으려고, 또 내 뒤에 일할 동양인 교사들이 좀 더 나은 대접을 받게 하고, 좀 더 나은 이미지를 심어주려고, 열심히 세워온 내 공든 탑을 아이의 울먹거리는 모습 한방에 내 손으로 직접 다 무너뜨린 기분이었다.) 남편은 “엄마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며 위로했지만, 나 자신은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스스로 진상엄마는 아니라고 굳게 믿어왔기에) 내가 그렇게 행동했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 역할 충돌을 조심해야겠구나. 학교에서는 나는 엄마가 아니라 교사로 존재한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자칫하다가는 내 아이의 담임교사에게도 선을 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말만 듣고 주변 사람들을 의심하고 몰아세우고 화내는 일. 사실 우리 반에선 항상 일어나는 일이다. 아주 신나고 즐겁게 학교에서 잘 지내고 간 아이의 부모로부터 ‘아이가 오늘 맞았다고 하던데, 누가 때렸냐?’는 메시지는 기본이고, 자정이 넘어 전화를 걸거나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으면 응급실에 가고 신고하겠다는 협박성 메시지를 받기도 한다. 미국 공립학교는 이런 진상 부모들을 대응하는 것에 있어서 꽤 단호하고, 교사의 편에 서서 보호해 주는 편이다. 교사의 개인 정보는 절대로 외부로 나갈 수 없으며, 앱을 통해서 전화를 걸거나 메시지를 보내도, 근무시간 오전 7시에서 오후 3시 사이 외에는 답장할 의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이고 악의적으로 괴롭힌다면, 교장, 교감, 학장, 학교심리사등으로 이뤄진 행정팀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중재한다. 필요하다면 학교 카운셀러가 학부모와 학생을 만나 그들의 정신상담을 해주기도 한다. 그래도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스토킹 또는 공무수행 방해로 간주해 법적 조치가 들어가지만, 대부분은 그전에 학부모가 스스로 학교를 옮기는 경우가 많다. 디스트릭 안에서 전학을 간다면 학부모와 학생의 정보는 학교끼리 공유되고, 다른 디스트릭으로 옮긴다고 하더라도, 교육계가 생각보다 바닥이 좁아 그런 악성블랙리스트는 입을 통해 언오피셜리 공유된다. 주를 옮긴다고 하더라도, 서류가 있는 학생은 학생을 받는 학교에서 그전 학교에 미리 전화를 해보고 정보를 다 얻어내기 때문에, 미국에선 아무리 학부모라도 평판(reputation)을 무시할 수 없다.


미국 시스템의 특성상 이런 악성 민원까진 없다 하더라도, 당연히 법적 테두리 안에서 활동하면서,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불편한 학부모들은 꽤나 많다. 그럼 이 학부모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보통 이런 학부모들은 초장에 잡는다. 어떻게? 신뢰와 사랑으로.


“아이가 맞았다는데 누가 때렸냐?”, “귀가 빨갛던데 누가 잡아당긴 거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지금 응급실에 가야겠다. 무슨 일이 있었냐, 당장 대답하라”는 식의 문의들은 사실 불신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불신의 뿌리에는 높은 불안이 있다.


아이가 학교에 다닌 지 꽤 된 고학년이라면, 과거에 실제로 그런 비슷한 일들이 학교에서 있었을 수도 있고, 이제 막 시작하는 저학년이라면, 아이가 학교에서 괴롭힘 당하는 것은 아닌지, 무시당하는 것은 아닌지, 불합리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막연한 불안감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그 학부모가 진상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부모라서 그렇다. 우리 남편 말처럼 엄마의 본능이고 아빠의 본능이다. 다만 그 불안을 얼마나 이성적이고 교양 있게 다루느냐는 결국 그 학부모의 문화적 지식적 배경에 달려 있지만 말이다.


자식이 학교에 갔다가 울상을 하고 집에 들어오면 엄마의 심장은 무너지고 세상을 향해 눈을 치켜뜨게 된다. 새끼를 보호하려는 어미의 본능이다. 사실은 아이가 학교에서 너무 신나게 뛰어놀다가 지쳐 울상처럼 보이는 것뿐인데도, 부모가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지 못했으니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건 당연하다. 결국 사실과 상상의 간극을 메우는 방법은 하나, 대화이다.


앱을 통한 텍스트 메시지는 비언어적 소통(눈빛, 말투, 톤, 제스처, 표정, 숨소리 등등)을 볼 수 없어, 간혹 오해를 사기 쉽기 때문에, 최대한 사무적이고 정보전달 위주의 글만 쓰는 편이다. 전화도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상태에서 심각한 내용을 나누기엔 사람에 따라 곤란한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주로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전화선에서의 침묵은 무례함이 될 수도 있지만, 직접 마주했을 때의 침묵엔 말이 섞이지 않아도 서로의 표정과 제스처를 보며 쉽게 감정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강력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가 끝나고 학부모들이 아이를 픽업하러 오는 시간을 아주 유용하게 활용한다. 뒤에 기다리고 있는 다른 차들과 학부모들, 나가야 하는 학생들이 있기 때문에 눈치껏 오래 수다를 떨지 못하고, 아주 중요한 알맹이만 말하면서도 학생에 대한 나의 진심을 전하기에는 시간상 딱 알맞고 너무 좋은 타이밍이다. 그 밖에도 나는 매일 소통 노트(daily communication log)를 통해 10명의 모든 아이들에게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무엇을 성장시켰는지에 대해 긍정적인 피드백을 적어 준다. 불안한 마음으로 아이의 하루를 기다리는 부모에게 그 단 한 줄은, 고단한 하루 속에서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위로가 되기도 한다.


또한 소통 앱을 통해 학급 전체에 공지 메시지를 보내는 것뿐만 아니라, 일주일 단위로 학부모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따로 전한다. 그러다 보면 처음엔 공격적이던 학부모들도 점점 교사를 신뢰하게 되고, 아이를 더 잘 교육시키는 방법에 대해 서로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지지하는 관계로 바뀌어 간다.


나는 학부모 상담(parent teacher conference)이 다가오는 몇 주 전부터 모든 학부모들에게 늘 '달' 이야기를 꺼낸다. 부모와 아이는 중력 고정 상태로 24시간 자전주기를 같이하기 때문에, 늘 익숙한 한쪽 면만 보게 된다. 반면, 교사는 그들의 궤도에서 벗어나 다른 각도에서 관찰하고 사진을 찍어 전달해 주는 위성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학부모는 집에서 자신의 아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고, 교사는 교실에서 그 아이의 또 다른 모습을 마주하는 사람이다.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맞춰 나갈 때, 아이의 모습은 퍼즐 조각이 모이듯 완전해진다. 마치 달의 한쪽 면만 봐서는 그 전체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부모와 교사가 함께할 때 비로소 아이의 모든 면을 온전히 비출 수 있다. 그렇게 해야 아이의 미래가 더 밝고 온전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아이들은 결코 혼자 자라지 않는다. 부모와 교사가 서로 믿고 지지하며 손을 맞잡을 때, 아이들은 자신 안의 잠재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결국 학부모와 교사의 협력은 단순한 관계 유지나 정보교환 차원을 넘어, 학생의 잠재력 발굴과 학업 성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고 신뢰하며,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곧 아이들의 성장을 위한 가장 강력한 기반이 된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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