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urodiversity

부모를 위한 단어인가, 자폐인을 위한 단어인가

by 신지은

요즘 미국과 한국 사회의 트렌드는 자폐 스펙트럼을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는 뇌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이해에 기반한다. 다시 말해, *신경전형적(neurotypical) 뇌를 가진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정보를 처리하기 때문에, 그 나름의 강점과 약점을 지닌다는 것이다.


*사실, 신경전형적(neurotypical)이란 단어는, 1990년대 후반, Laura Tisoncik이라는 사회 운동가가 '신경학적으로 전형적인 사람들(neurotypical people)'을 마치 병리적 집단인 것 처럼 묘사하며, *자폐인을 병리화하는 기존 DSM 진단 기준에 대한 비판을 하기 위해 풍자적으로 지칭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신경전형적이라는 사회현상에 기초한 단어보단 '전형적 발달 또래(typically developing peers)' 또는, '비장애인/장애가 없는 사람들(people without disabilities)'이라는 학계에서 사용하는 가치중립적인 단어를 더 선호한다.


다만, 이 글에서 내가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자폐가 있는 학생'이라고 칭하지 않고, *자폐인(autistic person)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글의 주제 특성상, 자폐를 개인의 정체성의 일부로 존중하는 신경다양성 그룹의 선호를 반영한 것이다.


Neurodiversity; 신경다양성. 이 단어는 의학적 또는 과학적 용어가 아니며, 교육학적 용어도 아니다. 장애를 결핍으로 보지 않고, 좀 더 포용적인 시각에서 다양성의 하나로 바라보자는 사회학적 용어에 가깝다. 그래서 자폐 스펙트럼을 포함해 ADHD, 학습장애, 불안장애가 있는 사람들, 우울증과 같은 정신건강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 그리고 스스로를 ‘비전형적’이라고 느끼는 일부 사람들까지도 이 개념 안에서 자신을 설명하고자 한다.


중요한 점은, 이들을 사회가 정해놓은 방식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방식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점차 교육계에도 스며들며, 학습과 발달을 바라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물론 한국 사회에서는 대중에게 여전히 다소 낯선 용어일지 모르겠으나, 서구권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쓰여 온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이 단어가 더욱 자주 회자되고, 이슈화되는 이유는, "정체성"이라는 주제의 정치적 맥락과 온라인/미디어 문화의 영향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담론 속에서 특정 단어가 때로는 처음의 의도를 잃고, 오직 각자의 이익과 편견을 대변하는 수단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서 나는 정치적 사회적 수단으로 선택 되어진 단어는 더이상 사용하지 않거나, 사용할때 그 단어의 뿌리를 먼져 밝히고 사용한다. 되도록 학계적 맥락에서 안정적으로 사용 가능한 단어나 개념을 택하려는 것도, 단어가 지닌 본래의 힘이 왜곡되거나 소모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1998년 처음 이 단어를 언급한 호주출신 사회과학자 *Judy Singer의 원래 의도는 이들이 세상을 다르게 경험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을 이해하고, 사회가 더 포용적이고 통합적이 되길 바람이었다. 그러나 이 단어의 뿌리나 의도는 무시한채, 이것을 의학적 또는 교육학적 용어로 오해하여 미국에서도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만한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로는, 자기 자신이나 가족의 상태를 신경다양성 관점에서 자가진단하여 의료적인 치료(treatment)를 적절하게 받지 않는다는 것과, 부모의 경우 자식을 신경다양성 렌즈로만 바라보고 훈육과 교육을 전혀 시키지 않고 방치한다는 것이다.


*Judy Singer의 최근 인터뷰에 따르면, 이 신경다양성 운동이 자신의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컬트적(cultish)'으로 변했다고 비판했다. 자신이 시작한 운동은 원래 '고기능(high functioning)'으로 불렸던 아스퍼거인들을 주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녀 또한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의 가면 아래, 장애의 현실을 가볍게 덮어버리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요즘 신경다양성 운동은,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현실을 외면하는 태도에 빠져, 경미한 어려움을 가진 자폐인과 심각한 어려움을 가진 자폐인의 본질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현재의 신경다양성 개념은, 본래의 취지를 잃고 사이비처럼 변질 되었다는 얘기다.


자폐 스펙트럼과 발달장애 학생들을 가르치며 다양한 학부모를 상담해 본 경험으로 보자면, 장애가 있는 자녀를 둔 부모들의 가치관이나 교육관은 그렇지 않은 부모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장애 연구와 교육학적/법적 실천(practice)의 역사가 길고, 일반 시민들조차 장애에 대한 지식과 인식이 비교적 풍부한 미국에서도, 자폐 스펙트럼 연구사의 특정 지점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부모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자폐 연구의 역사 타임라인

그 이유는 자신이 오랫동안 간직해 온 철학이나 가치관과 맞아 떨어져 그 자리에 깊이 뿌리내렸거나, 혹은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상처가 발현되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벗어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아무리 설명하고 설득해도, 자신이 짐을 풀고 머물기로 한 그 자리에 여전히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나는 과거를 딛고 2025년의 방식을 얘기하는데, 상대는 1960년대의 연구결과에 사로잡혀 있으면, 학생을 위한 교육 전략을 실행(implement)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예컨대, 아주 오래되고 잘못된 Kanner의 ‘콜드맘 이론’에 갇혀 죄책감에 억눌려 있는 부모, 백신과 같은 의학적 음모론에 사로잡힌 부모, 환경호르몬과 음식에 장애의 원인을 돌리며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는 부모, ABA(응용 행동 분석)나 DAN(자폐를 물리치자 프로그램: 식이요법, 영양제, 해독요법등의 생의학적 치료법 또는 민간요법) 같은 운동이 장애를 고쳐줄 수 있다고 믿는 부모, 그리고 신경다양성 관점에 기대어 아이의 도전 행동을 굳이 교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는 부모 등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장애를 가진 자녀를 둔 부모들이 겪는 심리적 반응과 부담감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있었다. 심리학자 Kenneth Moses는 아이의 진단은 부모의 상실과 같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슬픔을 표현하고, 실망감을 드러내고, 상실을 애도하는 기간이 충분히 필요하다고 전한다. 그러나 곧, 그의 주장은 선을 넘어, 모든 부모들은 미래에 대한 꿈과 환상을 가지고, 자식을 통해 인생의 업을 이루려고 했는데, 자식이 장애를 갖고 태어남으로서 자신들의 미래가 한 순간에 사라졌기 때문에 그 실망감은 정당한 것이라 표현해 버렸다.


이 부모들의 슬픔 담론에, 자폐인 권리 운동가 Jim Sinclair는, '당신들이 상실했다고 말하는 그 정상아이는 처음부터 존재한 적이 없다. 부모가 애도하는 그 대상은 가상의 아이이고, 당신의 실제 자폐 아이는 아직도 눈앞에 살아 있다. 당신들이 아이의 진단을 받고 얼마간 슬퍼하고 애도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 기간이 계속 된다면, 결국 자녀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당신들이 상실을 애도하는 동안, 우리는 여전히 여기 살아 있다.' 라고 아주 강하게 반박했다. 이후 자폐 운동은 부모 중심의 치료 또는 정상화 운동에서, 자폐인들 중심의 자기 옹호(self-advocacy)와 신경다양성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부모로서 어떤 아이를 기대하고 어떤 미래를 상상하던 간에, 그건 부모의 환상이지 현실 속 자녀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 나 또한 두 자녀의 엄마로서 매 순간 고민한다. 부모로서의 역할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때로는 실수하고 후회하고, 다시 다짐하고 도전하기를 반복한다. 부모의 궁극적인 역할은 자식을 독립적이고 건강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잘 키워내는 일이다. 장애가 있는 자식을 가진 부모라고 역할이 달라질까? 그렇지 않다. 방법은 다를 수 있지만, 결국 우리의 목표는 동일하다.


각자가 가진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에 따라 그 목표의 완성도는 다르게 정의된다. 어떤 부모는 자녀가 돈을 많이 벌게 되거나 사회적 명성을 얻으면, 자식농사를 잘 지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부모는 그저 자녀가 건강하고 행복하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반면에, 또 어떤 부모는 자녀가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최종목표로 삼는다. 그렇다면 이중에 자식을 독립적이고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잘 키워낸 부모는 누구일까? 정답은 모두 다 일수도 있고, 모두 다 아닐수도 있다.


돈도 많고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어 많은 세금을 내며 사회에 기여 하지만, 가정 안에서 폭력적인 배우자이고 부모라면, 그 사람은 건강한 사회 구성원이 아니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가정은 작은 사회이며, 그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를 잘 이끌어가지 못한다면, 그는 병든 사회를 재생산하는 건강하지 못한 존재일 뿐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런 사람의 부모에게 자식농사를 잘 지었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반대로 눈에 띄는 사회적인 업적이나 큰돈을 벌지는 않더라도, 특유의 성실함과 선함으로 주변 사람들의 하루 하루를 기쁨으로 채워주는 이라면, 그 사람이야 말로 건강한 사회를 이뤄가는 독립적이고 건강한 사회 구성원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사회학과 교육학을 전공한 일개 교사의 관점에서 본 사회와 사람에 대한 정의이니, 다르게 판단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다시 부모의 역할로 돌아와서, 이렇듯 부모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자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신경다양성의 관점에서 자녀나 학생을 바라본다 하더라도, “이 아이는 원래 그렇다”라며 가르치기를 포기하는 것은 아이의 가능성을 묵살하는 일이다. 그것은 아이를 아이 자체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애라는 틀에 가두어 레이블링(labeling)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부모의 역할은 자녀가 최대한 독립적이고 건강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하는 것이다. 자녀가 사회의 규범과 질서를 배울 수 있도록, 부모는 뒤에서 단단한 반석처럼 흔들림 없이 버티며 때로는 엄격하고 강한 지지대가 되어야 한다.


나는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에게 높은 기대치를 가지길 원한다. 이것은 학업에 대한 기대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 아이가 혼자서 자신의 일상을 충분히 챙길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혹은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아이의 능력을 과소평가해 일상 생활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 부모들이 여전히 많다. 그러나 독립적인 일상생활 기술(independent daily living skills)은 아이의 자존감과 자기효능감(self-efficacy)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이 기능이 발달하면 내적 동기와 회복탄력성(resilience)이 길러지고, 외부 상황과 관계 없이 자신을 조절하며 학업 능력까지 긍정적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일부 부모들은 아이의 장애를 이유로 포기하거나, 신경다양성을 오해해 필요한 교육까지 미루곤 한다.


신경다양성은 아이를 방치하라는 면죄부가 아니다. 자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동시에,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한 기술과 규범을 가르치는 것은 부모의 책임이자 의무다. 그 책임을 외면한다면, 결국 아이가 아니라 부모가 아이를 장애라는 틀에 가두는 것이다.


신경다양성의 관점은 아이를 존중하라는 사회의 초대이지, 교육과 훈육을 포기하라는 선언이 아니다. 아이의 고유한 방식과 강점을 인정하면서도 독립적이고 건강한 사회인으로 이끌어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부모가 한 발짝씩 함께 걸어가 준다면, 아이는 자신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반드시 성장한다. 존중과 훈육, 이해와 책임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아이의 가능성을 믿고 포기하지 않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신경다양성을 실천하는 것이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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