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가 들려

당신의 들리는 세계와 들리지 않는 세계

by 신지은

첫째 아이는 단어를 말하기 시작하던 12개월 무렵부터 PECS(Picture Exchange Communication System)와 같은 그림 의사소통 시스템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직 언어적 의사소통 능력(Verbal communication skills)이 발달되지 않아 말을 잘하지 못했지만, 원하는 것이 있을 때 그림 카드를 들고 와 나에게 보여주며 스스로의 의사를 표현했다. 이처럼 의사소통은 말소리가 없어도 충분히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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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완대체 의사소통 기구(Augmentative and Alternative Communication Device)는 바로 그런 도구이다. 이는 자폐 스펙트럼이나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만을 위한 장치가 아니다. 뇌성마비, 청각장애, 일시적 언어장애, 혹은 발화가 늦은 유아처럼 음성 언어로 말하기가 불편한 누구라도 자신을 표현하고 타인과 연결될 수 있게 한다. 단순한 기계나 그림 카드가 아니라, 개인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도구다.


간혹 학부모들 중에는 아이의 언어 능력과 발달, 그리고 AAC 디바이스에 대해 오해하는 분들이 있다. AAC가 아이를 대신해 말해주면 오히려 음성 언어 능력이 퇴화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다. 아이가 디바이스의 언어 입력을 지속적으로 듣고 학습하며, 모델링을 따라 하다 보면, 음성 언어 발달이 함께 촉진되는 사례가 많다. 물론 모든 아이가 똑같이 반응하는 것은 아니지만, AAC가 음성 언어 발화나 발달을 방해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부모님들 중에는 이것을 아이패드나 태블릿이라 부르며 아이의 학업이나 사회 정서 학습, 또는 행동 발달을 방해하는 장난감쯤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AAC는 단순히 태블릿에 국한되지 않는다. 어떤 아이들은 큰 버튼을 눌러 단어를 선택하는 버튼형 기기(switch button)를 사용하기도 하고, 또 어떤 아이들은 그림이나 단어가 적힌 판(core board)을 활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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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종류의 보완 대체 의사소통 기구(AAC: Augmentative and Alternative Communication)

중요한 것은 어떤 형태이든, 아이가 가장 편하고 꾸준히 사용할 수 있는 방식이 바로 그 아이의 ‘목소리’가 된다는 점이다. 나는 그래서 이것을 ‘토커(talker)’라고 부른다. “네 토커 가져와야지.” 그러면 학생들은 금세 이 기기가 놀이용 태블릿이 아니라 자신을 표현하는 의사소통 기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도 아이가 디바이스로 AAC 어플을 사용하기보다, 게임과 영상을 보는 용도로만 사용한다면, 가장 좋은 것은, 두 가지 아이패드를 두고 하나는 '토커'로만, 다른 하나는 여러 학습앱과 게임과 영상을 위한 '아이패드'로만 사용하는 것이 좋다. 그럴 수 있는 여건이 안된다면, 유도접근/접근 제한 모드(guided access)를 걸어놓고, 정해진 한두 시간만 다른 앱을 사용하도록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토커로만 사용하도록 한다.


처음 디바이스를 받으면, 아이들은 당연히 탐색하고 배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현재 자신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단어들도 이리저리 눌러보고 들어본다. 수업시간에 방해가 될 정도로 AAC 어플에 빠져 딴짓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시간을 기특하게 바라보고 계속 탐색하도록 권장하는 편이다. 필요할 때마다 시시때때로 아이에게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델링을 해주면, 금방 원래의 용도를 파악하고 필요한 단어를 말할 때 사용하거나 현재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들을 랜덤 하게 누르기도 한다. 그러면서 점차 의사소통의 도구로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어른들이 이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원하는 지시사항을 따르지 않거나 과제에 집중하지 않는다고 디바이스를 뺏거나, 혼을 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디바이스를 뺏는 것은,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아기에게 똑바로 말도 못 하면서 옹알이가 너무 시끄럽다고 성대를 뺏어가는 행위만큼 잔인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이 말도 해보고 저 말도 해보고 이소리도 내보고 저 소리도 내보고 상황에 맞는 단어도 뱉었다가 상황에 맞지 않는 단어도 질러봤다가 이런 수없는 시행착오를 경험해 봐야 비로소 때와 장소에 맞는 말을 하는 아이로, 성인으로 자라날 것이 아닌가. 시행착오야말로 언어 발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말을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돌이 되기 전에 원하는 것을 말하기 시작했고, 금세 문장으로 말을 했다고 한다. 독서와 글쓰기를 너무도 사랑했던 문학소녀였던 터라, 어휘력도 좋아 어른들과의 대화에도 거침이 없었다. 어디서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토론하기를 즐겼다. 초등학교 때부터 전후소설과 시에 매료되어 허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나 이상의 날개와 오감도를 읊어대며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다녔다. 그렇게 대화가 통하는 소울메이트를 정처없이 찾아헤맸다. 세계 1차, 2차 전쟁/전후 소설이나 일제강점기 문학은 인간의 근본적인 불안, 공포, 고뇌, 절망, 근본적 존재의 의미와 탐구를 담아낸다. 그것이 어린 나의 감수성을 뿌리 깊이 파고들어 사춘기가 시작되는 시기부터 영어덜트(Young adult) 시기까지 나의 자아정체성에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나같이 문학소녀를 넘어 문학괴짜인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 리가 있나. 나는 학창 시절 지나가는 생판 모르는 할머니와도 곧잘 인생에 대해 토론을 하고, 다섯 살 아이와도 놀이터에서 잘 놀던 외향적인 성격 탓에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남녀구분하지 않고 친구들이 많았고, 주말마다 돌아가며 만나도 다 만나지 못할 만큼 많은 친구들과 노느라 바빴다. 그런데 아무리 친구들을 만나고, 인생의 고민들을 나누고, 선배들과 선생님들에게 조언을 구해도,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었다.


나는 '이상'의 날개에 나오는 '아내'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려면 나에게는 '이상'같은 사람이 나타나야 하는 게 맞는데, 그런 사람이 나타나질 않으니, 그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항상 있었다. 이런 얘길 하면 열에 아홉은 도대체 그게 무슨 또라이 같은 소리지?라고 말한다. 그냥 나만의 문학적인 감성의 세계가 따로 있다고 해두자. 어린 시절엔 그게 나의 전부인 줄 알고 오랜 간 혼란스럽기도 했었다. 지금은 나의 인문학적 견해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돕는 일부분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마음 한구석에 방하나를 내주고 문학적 감수성의 불씨만 남겨뒀다. 그 방구석에 앉아 희미한 불씨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이가 바로,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이상'이었단 걸 얼마 전에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인생의 여러 경험과, 성인이 되어 맡겨진 여러 역할들, 그리고 학문을 통해 배운 개념과 이론들을 거치며 그 혼란은 이제 잘 정리된 나의 내적 언어가 되었다.


사람은 다 제각각 자신만의 세상이 있다. 그것을 소통하려고 해도 세상 그 누구와도 소통이 안될 때도 있다. 이것은 언어적인 한계이기보다, 인간의 내면세계가 그만큼 유니크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그저 도구일 뿐, 각자가 가진 존재의 깊이를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한다. 마치 관측 가능한 우주(observable universe) 너머는 우리가 끝내 다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아무리 말을 잘하고 어휘력이 풍부해도, 결국은 전달되지 않는 공허와 오해가 남는다. 인간은 모두 그런 각자의 공허와 외로움을 안고사는 존재다.


인지발달 심리학자 바이고스키(Vygotsky)는 그의 대표 저서인 '사고와 언어(Thought and Language, 1986)에서 인간의 사고는 더 복잡하고 다층적이라, 언어는 그것을 단지 부분적으로만 드러낸다고 말한다. 결국, 사고와 언어는 본질적으로 다른 두 과정이며, 결코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다.

fig2.jpg Vygotsky는 사고와 언어의 관계를 교차하는 두 원에 비유했는데, 일부는 겹치지만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고 설명한다.


인본주의 심리학자(Humanistic Psychologist) 칼 로저스(Carl Rogers)는 인간은 각자 개인의 고유한 내적 세계(형상적 장; Phenomenal Field)가 있다고 말한다. 이 내적 세계는 다른 사람이 완전히 경험하거나 동일하게 느낄 수 없으며, 타인과의 만남에서 항상 불일치 또는 부분적 이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감(empathic understanding)은 완전한 동일시가 아니라 'as if'(마치 그 사람인 것'처럼')로 이해하는 게 최선이다.

Conceptual-representation-of-Rogers-theory-of-the-Self.png 자기 개념과 실제경험이 일치할수록 사람은 심리적 안정감과 상대에 대한 진정성을 느낀다. 반대로, 불일치의 경험이 많을수록 불안, 방어, 심리적인 문제가 가중된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러하듯이, 자폐 스펙트럼이나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안에는 저마다의 내면세계가 있으며, 단지 그것을 표현하는 도구가 다를 뿐이다. 장애의 유무와 상관없이 누구나 자신의 내면을 다 드러내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르지 않다. 결국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언어를 매개로 서로의 세계를 건너는 존재다. 그리고 그 건너감이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다리는, 서로 다른 도구와 방식을 존중하려는 우리의 태도다. 음성 언어의 차이로 상대의 내면의 깊이를 재고 판단하려는 것은, 마치 우주를 자신이 가진 자로 측정해 보겠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무모하고 무지한 짓이다.


AAC는 음성 언어의 결핍을 메우는 보조 장치가 아니라, 인간 누구나 가진 또 하나의 세계 표현일 뿐이다. 장애인이건 비장애인이건 우리는 모두 각자 자신만의 특별한 세계가 있다. 언어의 한계로 인해 결코 서로의 내면의 끝까지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은 어쩌면 인간에게는 비극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그 때문에 오히려 인생사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부부도, 부모와 자식도, 서로를 다 알 수는 없다. 그 때문에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알 수 없음이야 말로 인간관계의 매력이다. 알 수 없는 부분이 있기에 우리는 더 알고 싶어 하고, 배우고 싶어 하며, 그래서 끊임없이 소통하려고 한다. 배우자에 대해서도, 자식에 대해서도, 늙어서까지 새롭게 배우고 발견하는 일이 가능하다. 그것은 인생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고, 인간이라는 존재를 반짝이게 하며, 죽는 날까지 겸손할 수밖에 없게 한다. 내가 상대방을 다 안다고 착각하는 순간, 소통은 어긋나기 마련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해 끝없이 배우고, 새롭게 만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AAC를 쓰는 사람도, 풍부한 어휘로 음성 언어를 쏟아내는 사람도, 결국은 같은 인간이다. 누구나 각자의 언어로 서로의 세계를 두드리고, 그 누구도 완전히 이해받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같아지려는 노력이 아니라, 다른 도구와 방식을 같은 무게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이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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