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적동기냐, 외적강화냐

교사의 믿음과 시스템 사이에서

by 신지은

새 학기가 시작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내 교실에서 조용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학생이 아니라, 교장, 교감, 학장, 학교 심리사(School Psychologist)등을 포함한 교육행정팀(Administrator)과의 전쟁이었다. 나는 학생들의 ‘내적 동기’를 믿는다. 강화물/보상(reinforcer) 없이도 아이가 스스로 뭔가를 해내고 싶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을 위해 나는 매일 한 명 한 명의 학생을 위한 학습활동을 따로 구상하고, 그 아이의 기질과 흥미를 녹인 레슨플랜을 짠다. 학급 전체를 운영하는데 있어서는 시간적으로 효율적이지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 진짜 동기란, 결국 그 아이만을 위한 수업에서 피어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육행정팀(Admin team)의 생각은 달랐다.


특수교육학을 공부할때 난 지도교수님에게서 학생의 관심사와 강점을 바탕으로 학생 개개인에 맞는 창의적인 수업을 해야 한다고 배웠고, 나는 배운대로 그러한 교수법을 끝까지 고수 했을 뿐이다. 학교 다닐때, 누군가가 이론은 이렇지만, 현실은 다를 수 있으니, 위에서 하라고하면 생각의 스위치를 끄고 그냥 시키는대로 하라고 말해줬더라면, 조금 덜 혼란스러웠을까?


나는 매번 학생들의 IEP 회의에서, 아이의 성취가 보상(reinforcement) 없이도 가능했다는 이야기를 학부모 앞에서 꺼냈다. 내가 믿고있는 학생들의 내적 동기가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학교와 디스트릭 관리자들 앞에 어필하고 싶었다. 실제로 몇몇의 우리반 아이들은 그렇게 좋아하는 장난감도, 간식도 없이 단지 칭찬과 관심만으로 하루 일과를 거의 마쳤다. 사실 어떤 학생들은 애드민팀이 말하는 장난감이나 간식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도 했다. 오히려 그들의 진짜 보상은 선생님의 칭찬이나 관심인 경우가 더 많았다. 나는 그 지점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거기서부터 학생들의 내적 동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특수교육팀(Sped Team) 미팅이 있을때마다 애드민팀으로 부터 같은 피드백을 받아야 했다.

"보상을 끊임없이 주는것이 우리 프로그램의 핵심 입니다." "보상을 주지 않으니, 아이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겁니다." "보상을 주었나요?" 그들은 마치 내가 너무 이상주의적이고, 너무 미숙하며, 학생들을 더 어렵게 만드는 교사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외적 강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안다. 특히 특수교육에서는 구조화된 강화 시스템이 아이의 학습에 큰 힘이 된다.


애드민 팀은 늘 같은 예시를 들었다. "만약 너에게 월급을 주지 않고 계속 일하라고 해봐. 너 하고 싶어? 학생들도 똑같아.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강력한 보상이 없으면, 너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사실 나는 이 일을 하면, 멈췄던 피가 돌고, 참았던 숨이 쉬어지고,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희열을 느낀다. 매일 아침 일하러 가는 것이 행복하며 축복이란 생각을 한다. 학교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마치 집에 돌아온 듯한 안정감이 밀려온다. 교실의 공기와 냄새가 온몸의 피부에 스며들며, 내가 살아 있음을 전신으로 또렷하게 느낀다.


돈을 아예 안 주면 곤란하겠지만,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이 감정을 느낄 수 없다면, 난 이 일을 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내 학생들도 마찬가지라고 믿는다. 사람은 외적 보상만으로 살 수 없다. 매슬로우의 욕구 위계처럼, 인간은 생존을 넘어 자아실현과 내면의 충족을 바라는 존재다.

매슬로우의 5-욕구위계

더 나아가, 매슬로우의 욕구 위계의 허점을 비판하는 새로운 이론들처럼, 인간은 기본욕구가 충족되지 않아도, 자아실현을 더 중요시 할 수 있는 복잡한 존재이다. 장애가 있다고 해서 내적 동기가 없고, 자아실현이 불가능 하다는 건, 어쩌면 그들의 편견일 뿐이다.

매슬로우의 욕구위계는 실증연구가 없고, 문화적 편향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개념이론들과 기본개념의 충돌로 학계에서 그것의 한계를 지적 받고 있다.

내가 이런 주장을 계속하자, 애드민팀은 한동안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래, 어디 한 번 해보라’는 식이었다. 솔직히 나도 불안했다. 하지만 내 학생들은 하루하루 조금씩 학교에 적응했고, 웃었고, 변해갔다. 보조교사들도, 동료 교사들도, 내 반 아이들이 잘 따라오고 있고, 잘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수업을 준비하는 시간은 오래 걸렸고, 학생 개개인의 강점과 특기를 살려 한가지 레슨플랜당 수많은 액티비티를 만들어 내야했지만, 나는 그것이 진짜 교육이라고 믿었다.


나는 내 학생들이 그저 어른들이 원하는 행동으로 자기를 억누르고 맞춰 조절하는 아이가 아니라, 어떤 활동이든 의미를 느끼고 몰입할 수 있는 학습자가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의 보상으로 토큰(token)을 주기보다 먼저 관계를 만들고, 흥미를 관찰하고, 진짜 좋아하는 순간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 수업을 설계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몇몇 아이들은 분명히 보상 없이도 스스로 자리를 지키고, 그렇게 싫어하던 학업 활동(academic activities)에 집중했다. 심지어 어떠한 아카데믹 활동도 거부하던 한 학생은 “이거 또 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 말이 나에겐 토큰 10개보다, 더 강한 강화물처럼 느껴졌다.

지시를 따를때마다 토큰을 받고, 토큰을 다 채우면 보상을 받는다.

특히 교사인 나에게 개인적인 큰 보상은 수학을 가르칠 때다. 수학은 추상적인 학문이다. 수학은 눈에 보이는 구체적 사물과 다르게 숫자, 기호, 규칙, 개념 등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 대상을 다루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라는 숫자는 실제로 만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두 개라는 개념을 상징하는 기호일 뿐이다. 나도 교육학을 공부하면서야 수학이 추상적인 학문이고, 그래서 많은 아이들이 구체적인 개념을 잡기까지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창 시절 한국의 주입식 교육의 피해자로서, 그리고 그 수많은 수포자 중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사실은 나에게 엄청난 위로가 되었다. 수학은 내가 특수교육과 사랑에 빠지게 된 수많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추상적인 학문은 특히 자폐 스펙트럼이나 발달장애 학생들에게 더 어렵다. 왜냐하면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학생들은 사랑, 희생, 민주주의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하는 데 더 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추상적인 학문인 수학을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학문으로 만드는 것이 특수교사의 역할 중 하나다. 추상적인 개념(Abstract concept)을 구체적인 개념(Concrete concept)으로 바꾸는 일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것만큼 큰 고통이 따르지만, 그 끝에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희열이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추상적인 수학 개념 때문에 아이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 뒤, 내가 그것을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인 학습활동으로 바꾸었을 때, 그리고 그 활동을 통해 아이가 완전히 그 개념을 이해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의 감격과 통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수포자였던 내가 수학이란 학문을 이겼다는 말도 안 되는 우월감까지 느낀다. 그래서 나에게 교사라는 일은 감사이고, 축복이며, 치유이고, 은혜다.


아마 내가 수포자였기 때문에, “이렇게 설명하면 아이가 더 쉽게 이해하지 않을까?” 하고 힘들어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개념의 어떤부분을 이해하기 어려워 하는지 나는 정확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명하는 방식과 가르치는 방식을 학생 눈높이에 맞게 풀어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수포자였던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나는 학생일때도 학교가는 것이 즐거웠다. 호기심이 많은 나는 무언가 탐구하고 찾아보고 배우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성적이 바닥을치고 선생님에게 혼이나도, 교과서 한 귀퉁이의 한 문장이나 조회시간에 선생님의 뜬금없는 한마디가 내 가슴을 울렸다면 나는 그날 하루종일 설레고 행복했다. 무엇보다 학교가 좋았던 것은 사실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나는 초중고 시절 내내 그렇게 교무실을 들락거렸다. 문제를 일으키거나 잘못을 해서도, 수업에 관해 질문이 있어서도 아닌, 심심해서였다. 그냥 심심하면 친구 집 문앞에서 ”ㅇㅇ야, 놀자~“ 하는 것처럼, 겁도없고 선도없이 교무실을 시시때때로 들어가서 선생님들과 수다를 떨곤했다.


주제는 늘 시시하고 잡다했다. 선생님은 왜 머리숱이 없어요? 이번에 김진명소설 읽어봤어요?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으면 통일하는게 낫지 않아요? 독도는 우리땅을 영어로 어떻게 말해요? 그 선생님은 도데체 왜그래요? 성역도 주제도 없는 다채롭게 이상한 소리들을 해댔다. 나는 선생님들을 거의 나의 단짝친구들 처럼 대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선생님들은 무척 귀여워 해주셨다. 내 또래들은 재미없어할 얘기들을 선생님들은 재밌어 해주시니 덩달아 신이났다.


쓸데없이 들락거리면서 농담을 던지는 내가 선생님들 눈에는 굉장히 신기하고 재밌었나 보다. 왜 아까 쉬는 시간에는 안왔냐? 남자반에 간거냐 매점에 간거냐? 같은 농담부터, 네가 있어서 너희 반에 들어갈 맛이 난다. 너는 나의 유일한 팬이자 청중이자 제자이다. 라는 따듯한 말까지 나누는 찐친이었다. 친구들이 없으면 선생님들과 놀면됬고, 선생님들이 바쁘시면 친구들이랑 놀면됬다. 학교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내 놀이터였다. 그러나 나에겐 그렇게 소중했던 학교가 모든 학생에게 똑같은 경험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성인이 되고 한참이 지나서야, 내가 가졌던 따듯한 경험이 사실은 누군가에게는 결코 주어지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 학생들에게 만큼은 학교가 나에게 그러했듯, 안전하고 따뜻하며 즐겁고 사랑스러운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


그런 마음이 전해진 것인지, 내가 좋아했던 선생님들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인지, 얼마전 우리반 5학년 학생이 내가 이학교에서 제일 쿨한 선생님이고 우리반이 이학교에서 가장 쿨한 반이라는 특급칭찬을 해주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칭찬은, 아이들이 학교오는 것 자체를 즐거워하고, 집에 갈때는 왜이렇게 시간이 빨리가냐, 아쉬워서 지금 집에가기 싫다는 말을 할때이다.


나는 그렇게 아이들과 즐겁게 한 학기를 보냈고, 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애드민팀은 나를 따로 불렀다. 그리고는 내 수업 방식과 교실 운영 시스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당신의 방식은 스트럭처가 아닙니다.” 행정팀은 내게 “비효율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방식”이라고 했다.


그들이 말하는 ‘스트럭처’란, ABA 기반으로 학생을 조그만 그룹으로 나누고, 그룹마다 보조교사(paraeducator)가 주도적으로 지도를 맡는 방식이었다. 즉, 교사로서의 창의성보다는 체계화된 외적 강화와 그룹 관리 중심의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그 방식이 효과적일 수 있다는 걸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만이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내 학생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교사와의 관계 속에서 신뢰를 쌓고, 그 신뢰 속에서 스스로 움직이길 바랐다. 그게 느리더라도, 학생 개인의 배움에 있어서는 길고 깊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너희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한 번 해보자.” 그리고 그들이 권장한 시스템을 도입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 교실을 운영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인 것도 사실이다. 이제 나는 매번 모든 레슨플랜을 짜지 않아도 되고, 보조교사들에게 그룹을 맡기고 자리를 비워도 교실은 혼잡해지지 않는다. 이해는 간다. 이 지역은 교사 이직률(teacher turnover)이 높은 곳이다. 그렇다 보니 교사 개개인의 철학이나 창의성에 맡기기보다는, 애드민팀이 시스템 자체를 마이크로 매니징하려는 경향이 있다.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teacher)’이기보다는, 프로그램을 굴리는 ‘진행자(facilitator)’가 된다. 바지사장 같은 개념이랄까? 그렇게 운영하면, 교사가 갑자기 나가더라도 학생들이 큰 혼란을 겪지 않게 되고, 프로그램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게다가 ABA 전략이 자폐 학생들에게 효과가 있다는 것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 방식은 데이터를 통해 쉽게 아이의 성취도(progress)를 입증할 수 있고, 많은 아이들에게 실제로 도움이 된다. 그렇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 방식만이 유일한 정답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나는 중간 지점에 서 있다. 애드민이 요구하는 구조화된 시스템을 따르되, 그 안에서 학생 개개인의 특성과 흥미를 살릴 수 있는 작은 여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 발은 시스템에, 다른 한 발은 아이의 마음에 딛고 있는 셈이다.


아직도 어떤 날은 장난감과 먹을것을 꺼내고, 어떤 날은 꺼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무엇이 맞는 것인가 혼란스럽지 않다. 내가 단순히 시스템에 반항하기 위해 학생의 외적 보상을 거부한 게 아니라, 그보다 더 깊은 동기의 뿌리를 찾으려 했던 교사였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학생의 마음을 따라가려는 교사에게는 늘 시간이 더 필요하고, 그 시간을 버티게 해주는 건 그의 철학과 믿음이라는 것을.


이것은 어딜가나 독립투사 같은 마음을 한켠에 품고사는 나 스스로에게 항상 하는말인데, '시스템을 바라보면 불만가득한 교사가 되지만, 학생을 바라보면 창의적인 선생이 된다.' 나는 오늘도 그 두 시선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아이들의 내면에 불을 지필 수 있는 단 하나의 수업을 고민한다. 그러기 위해선 하루도 공부와 연구를 게을리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누굴 탓하랴. 돈안되는 것만 찾아서 열심히 하도록 설계되어 매슬로우의 욕구위계를 거스르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애드민팀과 나는 늘 같은 말을 한다. “학교는 재미있어야 한다.” 그러나 방법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들은 과자와 사탕, 장난감과 게임 같은 보상으로 학교를 즐겁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 나는, 아이들에게 학교가 즐거운 이유는 바로 스스로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내적 동기를 깨우고 이어주는 다리가 바로 교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두 관점을 결합해, 결국 아이들이 가장 즐겁게 배우고 머물 수 있는 우주 최강 재미있는 교실을 만들어가고 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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