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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May 07. 2023

여행 중 물건을 도난당하면 드는 생각들

#세계여행 중 에어팟 털렸을 때

버스 타기 전날, 마지막으로 찍은 내 에어팟 핑크 케이스와 내 맥북, 고프로 (맥북, 고프로 안 잃어버린 게 어디야)

에어팟을 분실했다. 그것도 정말 어처구니없이 "절대 털릴 일 없을 상황"에서 없어졌다. 세계 여행을 하면서 약간 허술한(?) 모습으로 나보다 오히려 현지인 친구들이 "제발 좀 조심해"라고 조언을 할 정도였다. 이래 봬도, 어릴 때 소매치기로 악명 높은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도, 인도나 여타 국가에서도 소매치기는 거의 당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부모님과 프랑스 여행 중에 소매치기 손목을 붙잡아 현장적발한 적은 있다. 딱 1번, 인도 호스텔에서 10분 자리 비운 사이에 가방 속 한화 30만 원 상당의 루피를 분실한 이후엔 "절대 다신 돈이나 물건 잃어버리지 말자"라고 다짐한 것이 어엿 10년 전이다.


그러니까 이번 에어팟 분실은 내 여행 이력 중 두 번째 분실/도난 사건인 셈이다. 그것도 12시간 동안 밀폐된 버스 안에서 말이다. 분명 용의자가 버스 안에 있는 게 분명한데 울며 겨자 먹기로 보내줘야 했다.




귀신같이 털린 내 에어팟

상황은 이랬다. 멕시코에서 해변으로 유명한 푸에르토 에스콘디도에서 7일 머무르고, *배낭 여행자들의 무덤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는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까사스 (San cristobal de las casas)'로 떠나기 위한 버스를 탔다.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까사스는 흔히 장기간 배낭 여행객들이 최소 1주일~1개월 그 이상 머무르는 곳으로 유명하다. 태국의 치앙마이 인근 빠이 같은 곳을 생각하면 될 거 같다.

멕시코 심야버스

멕시코 장거리 버스는 시설이 꽤 좋은 편이다. 우리나라의 우등 고속과 프리미엄 버스 그 중간 정도랄까. 화장실도 갖춰져 있고, 버스 좌석 간 간격도 꽤 좋은 편이다. 영화 볼 수 있는 모니터도 있고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와 USB단자까지. 뒤에 사람이 없으면 좌석을 원하는 대로 제쳐서 누워서 갈 수 있다.


우리나라에선 고속버스를 오래 타봤자 기껏해야 5시간 내외이지만, 멕시코는 워낙 땅덩어리가 넓기 때문에 종종 10시간은 훌쩍 넘게 버스를 타야 하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없는 여행자들은 국내선 비행기를 타지만, 나는 잠도 함께 잘 수 있는 심야버스를 탄다. 보통 밤 10시나 11시에 타면 다음날 오전 9시나 10시에 도착하는데, 도착지에도 아침에 도착하니 숙소 찾을 걱정도 할 필요 없고 교통비도 여러모로 절약되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10시간~15시간 소요되는 버스를 약 4번 탔는데 모두 심야버스였다. 그리고 대부분 버스는 절반도 다 차지 않았다. 덕분에 모두가 좌석을 뒤로 편하게 제쳐 잠을 잘 수 있었는데 나 같은 경우 내 옆과 내 뒤에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땐 두 좌석 모두 최대한 제쳐 아예 누워서 잔다. 즉, 통로 쪽에 머리를 가져다 대고 창가 쪽에 다리를 두는 형태인데 물론 발을 뻗을 수 없으니, 쪼그려서 자는 자세이다. 물론, 중간중간 천장을 보는 자세(다리를 세워서) 등으로 번갈아 바꾸긴 하는데 이러면 나름 버스에서도 어느 정도 숙면을 취할 수 있다. 그래서 보통 심야 버스를 타도 다음날 일정을 무리 없이 평소와 같이 소화한다.


이렇게 잘 땐 내 소지품 등이 잔뜩 든 가방을 배게 삼아 잔다. 여긴 노트북 포함해서 지갑, 폰 등 중요한 것은 다 들어 있기 때문에 버스 짐칸에 실린 내 큰 배낭보다 소중하다. (배낭은 잃어버려도 이건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마인드) 혹시나 베개가 빠질까 봐 가방끈을 손에 감고 잘 정도로 나름 철저한 편이다.


이 날 버스는 오후 10시 조금 넘어서 탔는데, 아직 자기엔 이른 시간이라 미리 다운로드하여 둔 넷플릭스 영화 한 편을 보고 자기로 했다. 멕시코 넷플릭스에서 1위 하고 있는 한 프랑스 액션 영화였는데 킬링 타임으로 나쁘지 않았다. 약 2시간 후, 에어팟을 빼고 케이스에 넣은 후 가방 앞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가방을 베개 삼아 누워 눈을 붙였다. 버스는 고속버스이지만 15시간이나 이동하는 장거리인만큼 중간중간 한 4~5군데 주요 도시를 거쳐 갔다. 이 도시 고속터미널에서 약 15분 정도 정차하면 그곳에서도 탑승했다. 처음엔 한 10명 내외로 출발한 버스이지만, 마지막으로 정신을 차렸을 땐 버스의 절반정도 차 있었다.


목적지까지 약 2시간 남았을 무렵, 잠은 완전히 깨서 마지막으로 넷플릭스 시리즈 다른 영화 한 편 볼까 하고 가방 앞주머니를 만졌다. 그런데 뭔가 싸한 게 지퍼가 한 6~7cm 정도 벌어져 있었다. 난 보통 지퍼를 잠글 때 지퍼를 끝까지 닫아 한쪽으로 몰아두는 편이다. 즉 가방 지퍼의 시작점이나 끝점에 둔다. 그런데 지퍼가 중간에 위치한 채 벌어져 있는 건 뭔가 이상했다. 혹시나 해서 뒤졌는데 앞 주머니에 둔 에어팟이 없다. 맙소사. 가방을 다 뒤졌는데 에어팟이 없다. 혹시나 가방 구석에 있는 걸 내가 못 찾나 해서 세네 번 계속 뒤적거렸다. 바닥도 찾아봤지만 내 핑크색 에어팟 케이스는 보이지 않았다. 아이폰 찾기를 해보니, 내가 마지막으로 에어팟을 쓰고 케이스에 넣었을 때 시간이 마지막으로 확인된 시간이었다. 에어팟 찾기는 케이스에 에어팟들이 들어가 있으면 위치 추적이 안된다.


대체 언제 누가 내 가방 앞지퍼를 열고 그것도 에어팟만 들고 간 걸까. 물론 앞주머니엔 에어팟 외에 작은 공책, 싸구려 유선 이어폰 등 자질구레한 물건 밖에 없다. 내가 자다가 중간에 앉아서 잔 적이 있는데 이땐 가방끈을 내 손에 걸고 잤다. 누가 가방을 들고 가진 않겠지 싶었는데, 설마 그 사이에 앞주머니만 열어 에어팟을 들고 갈지 몰랐다. 심지어 잠귀 밝은 내가 그 기척을 못 느끼다니. 짜증이 밀려왔다.


여전히 이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 중 범인이 있는 걸까. 혹은 중간 정차 도시에서 이미 내린 사람들 중 범인이 있는 걸까. 사람들에게 "에어팟 잃어버렸으니 소지품 검사하겠습니다" 할 수도 없는 노릇. 내 주변 외국인 여행객들에게 "혹시 미안한데 핑크색 에어팟 케이스 본 적 있니?"라고 물어봤지만 그들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첫날 도착한 도시가 예뻐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까사스는 생각했던 것만큼 예쁘지 않았다. 에어팟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짜증을 괜히 이 도시에 화풀이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여기가 왜 여행자들의 무덤이라는 거야. 그냥 내가 방문한 다른 도시가 더 예쁜 거 같은데. 심지어 내가 도착하기 직전, 이 도시에선 '한 갱스터들에 의한 한 수공예 조합장의 살인 사건'으로 인해 폭력 사태가 발생한 상태다. 곳곳에는 경찰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도시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1,2만 원도 아닌 수십만 원짜리 물건을 여행 중에 잃어버리면 별별 생각이 다 든다. 몇일치 숙박비에 해당하는지, 내가 가고 싶었지만 가격 때문에 망설였던 투어들, 먹고 싶었지만 애매해서 안 먹은 음식들, 몸이 불편한 여행을 하며 포기했던 기회비용들과 에어팟 가격을 괜히 비교해 본다. 그런다고, 한 번 잃어버린 에어팟이 돌아오겠냐만은. 괜히 여행에서 물건과 돈을 잃어버리면, 오히려 타격감이 크다. 특히 최대한 돈을 절약하며 다니는 배낭여행일수록 더욱 그렇다.


 다음날, 이 도시가 사랑스러워졌다.



"이 도시가 마음에 들면 한 달 살기 해야지"

마음먹었던 것은 첫날의 부정적인 이미지와 내 정서가 결합해 그날 밤, 난 인터넷으로 다음 여행지 숙소를 검색했다. 버스에선 자정에 숙면을 취했는데 이 날은 숙소에 누워서 자는데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새벽 2시까지 여러 생각을 하며 늦게 잠들었다.


푹 자고 일어나니, 오전 10시가 넘었다. 대강 씻고 아침 식사 뭐 먹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에어팟에 대한 생각은 간 밤의 잠과 함께 없어진 뒤였다. 멕시코에서 먹은 아침 식사 중 가장 만족스럽고 기분 좋은 아침을 먹었다. 이에 대한 소개는 추후 브런치 글에서 다룰 예정이다.

멕시코에서 먹은 아침 식사 중 만족도 탑 5 안에 드는 식사

이후, 어제 걸어 다녔던 골목을 부정적인 감정 없이 다시 걸어보기로 했다. 중간에 스페인어 레슨하는 학원이 있길래 들러 레슨 가격도 물어보고, 투어 여행사들이 보이면 가격 견적 물어보기도 했다. (사실 투어 가격은 다 거기서 거긴데, 스페인어 연습도 할 겸 괜히 보이면 다 들어갔다) 마을은 작아서, 걸어서 다 도달할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정오인데 햇빛이 그전에 있던 도시만큼 뜨겁지 않아서 걸어 다닐 만했다. 오히려 이곳은 밤이 되면 추워서 바람막이를 입고 다녀야 한다. 산간지방이라 구릉도 많아, 센트로 중심으로 오른쪽, 왼쪽에 전망대로 삼아도 좋을 성당이 언덕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꼭대기에 올라가니, 사람도 없고 의외로 뷰가 훌륭해서 괜히 기분 내서 사진도 열심히 찍었다.

성당을 보려면 계단을 올라야 한다.
이왕이면 내 에어팟을 잘 써줬으면 좋겠다

멕시코 대표 커피산지이기도 해서, 아무 카페에 들러도 한화 3천 원 정도면 퀄리티 좋은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와인이나 맥주도 싸서 더위에 지칠 때 노천 테이블에 앉아서 잠시 쉬어가도 좋다. 잃어버린 물건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사라지니, 거짓말같이 이 작은 도시가 사랑스러워졌다. 물건 따위가 내 하루를 망칠 수 없지. 때론, 빠른 포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 여행을 망치는 건, 결국 내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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