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영국인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국인의 영어 이야기
호주사람 N - 이 친구가 오늘 여기 자원봉사자(Volunteer) 면접 보러 왔대
영국사람 V - 와, 정말? 멕시코 사람이세요?
한국사람 나 - 음? 멕시코 사람은 아닌데. 스페인어는 할 줄 알아요. 근데 왜요?
영국사람 V - 아 여태까지 여기 자원봉사자들은 대부분 영어 원어민이거나 스페인어 원어민이어서요.
영국사람 V와 나의 첫 만남은 이랬다. 아직 인사도 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영어 원어민은 아닐 거라 바로 가정하고 멕시코 사람이냐고 묻는 그녀의 첫마디에 기분이 살짝 상했다.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멕시코에서 그녀가 "당연히 모든 자원봉사자들은 영어 원어민이었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이 숙소는 재택근무하거나 자기 사업하는 미국인, 영국인 등 영어 원어민이 전체 게스트들의 8할이다. 최소 5박 이상 머물러야 하고, 1개월 이상 머무르는 사람들이 많다. 다른 호스텔과 달리 디지털 노마드를 위한 코워킹&코리빙 숙소이기 때문이다. 자원봉사자는 일종의 스태프 개념인데 청소는 하지 않고 체크인&체크아웃 관리, 문화 이벤트 기획 및 진행을 도맡는다.
장기 체류자가 많아 일주일에 체크인, 체크아웃 수가 3회 내외이기 때문에 사실상 숙소 게스트들을 위한 문화 이벤트 기획하는 게 메인 업무이다. 가령, 주말에 근교 여행이나 소풍을 간다던가, 수요일엔 패밀리 디너 타임을 가진다던가, 목요일엔 해 지는 것을 보며 칵테일 나잇을 진행한다던가. 근처 작은 영화관을 빌려 함께 영화를 본다던가.
또한 틈틈이 쉬프트 때엔 내 일도 하면서 중간에 공용 공간에서 혼자 있는 게스트들이 있다면 함께 놀아주기도 하고, 그들의 대화에 참여해 함께 맞장구도 쳐주는 등 최대한 친근한 환경을 조성하는 게 임무이다. 즉,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원어민들 대상으로 최대한 대화를 많이 해야 하고 이벤트 등을 진행해야 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그동안 자원 봉사자들은 대부분 영어 원어민이었다. 스페인어는 못해도 되지만, 영어 역량은 필수였다.
어찌 됐건 난 영어 인터뷰를 거치고 이곳에서 1개월째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다. 영어 실력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시작한 첫 주. 난 내가 '스몰토크'에 취약하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 나의 영어에 대해서 말하자면
한국에서 정상적인 초중고대학교 과정을 마친 사람 기준, 나는 영어를 꽤 잘하는 편이다. 중학생 때부터 영어 말하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미드나 영화를 볼 때 영어 자막만 켠 채 보며 여행하면서 영어 때문에 고생해 본 적은 없다. 영어 말하기 점수로 따지면 오픽은 AL이고, 외국계 회사에서 일도 했다. 일찍이 영어 회화에 관심을 가진 덕인지 한국인 악센트도 거의 없고 말이 빨라, 외국 친구들은 "영어권 국가에서 공부했어?"라고 물어보는 편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나열하는 것은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영어 프리토킹에 그리 부담감 없는 내가 최근 순수 영어 네이티브 원어민들과 한 달째 부대끼면서 "스몰토크"와 영어 유창성은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흔히 외국인 앞에 서면 벙어리가 되는 이유를 영어 실력 부족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영어로 내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일지라도 영어 네이티브 원어민과의 대화할 때 스몰토크가 부담스러운 경우가 있다.
상대방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
영어권에선 스몰토크 역량이 필수라는 것은 어느 정도 들어봤을 거다. 이들은 다 같이 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 어색함,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 흔한 날씨 이야기 혹은 옷이나 가지고 있는 소품 아이템 칭찬 등을 하면서 잘 모르는 사람들과도 대화를 시작한다.
매일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인사하고 안부 묻고 그날은 어땠는지 등등을 묻는 게 어느 정도 피로감이 쌓이기 시작했다. 10명~20명 넘는 사람이랑 마주칠 때마다 서로 매일 같은 안부인사를 주고받는다. 특정 에피소드나, 누군가가 무엇을 했다 등 정보가 있다면 그에 대한 질문을 꺼내 대화를 계속 이어 나가는 것이 스몰토크 핵심이다.
예를 들어 게스트 A 가 어디 놀러 갔다 왔다면 "어땠는지, 어디 갔는지,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등을 물어보면서 대화를 길게 이어나가는 거다. 하다못해 누가 마트에 장 보고 왔을 때도 "뭐 사 왔는지" 등에 물어보면서 대화를 한다. 만약 "how are you?" 란 질문에 "good"을 서로 주고받고 끝나버리면 어느 순간 상대방은 "내가 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나에게 스몰토크를 걸어오지 않는다. 즉, 진짜 바쁜 상황이 아니라면 how are you? 에서 인사로 끝나는 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최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질문으로 이어져야 한다.
하루는 난 주방에서 내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테이블엔 어제 막 입주한 미국인 A와 이곳에 3개월째 머무르고 있는 미국인 B가 대화하고 있었다. 어제 처음 만난 이들은, 테이블에 앉아 각자 밥을 먹으면서 "간밤에 잘 잤냐"라는 질문으로 말을 트더니 한 10분 지나니, "지난 3년간 너무 힘들었던 과거"를 고백하고 있는 대화의 흐름에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대화가 저렇게 이어진다고? 그 둘이 대화를 하고 있는데 또 주방에 들어온 누군가가 그 이야기에 자연스레 끼고. 갑자기 이들은 근처 마음 다스리기 명상 워크숍 함께 가는 걸로 결론을 내며 절친이 되어 있었다.
난 모든 사람들의 시시콜콜 에 대해 궁금해하진 않는 편이다. (MBTI 성향도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T이다.) 그래서 나는 첫 주, 단체 활동 할 때 대화하고 떠드는 것에 대해선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이들과 1:1 관계를 구축하는 게 너무나 힘들었다. 즉,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을 땐 난 활발하게 떠드는 편인데, 1:1로 마주쳤을 때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고 공감을 하면서 위로하고, 궁금해하지도 않는 것에 계속 질문해야 하는 것이 꽤 벅찼다. 스몰토크 역량은 성향에서도 크게 갈린다는 걸 깨달았다.
이것저것 남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오지랖을 잘 부리는 사람일수록 스몰토크를 잘할 가능성이 높은 반면, 나처럼 오지랖 부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스몰토크가 정말 부담으로 다가온다.
문제는 '질문하는 능력'
결국 스몰토크 역량은 '질문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려 있다.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상대방이 하는 말에 관심을 얼마나 가지고 있으며 이에 대해 뭔가 도움을 주거나 정서적으로 공감을 하고 싶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에 구체적으로 질문을 던져줄수록 좋다.
근데 문제는 우린 영어 공부할 때 생각보다 영어로 질문하는 기회가 별로 없다. 오히려 영어로 누가 질문을 던지면 답하는 것에 익숙하다. 전화영어, 화상영어 등을 통해 원어민들과 수업할 때 대화의 주도권이 대부분 원어민들에게 있다면 자신의 스몰토크 역량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한국어로 질문을 잘 던지는 사람이라면, 영어로 그 질문을 말할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은근히 의문문 만드는 게 까다로운 문장들이 있다. 쉬운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그게 뭐였는데 what was it?"
이 의문문은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대화를 할 땐 상대방도 확실히 잘 모를 거 같을 때
"그게 뭐였다고 생각해?"라고 묻기도 한다. 이땐 "what do you think it was?"라고 묻는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영어 교과서나 일상 회화 교재에선 직접적으로 이것이 무엇인지 묻는 표현은 많이 배우지만 간접적으로 돌려 물어보는 표현은 잘 배우지 않는다. 영어나 스페인어 모두 직설적인 표현 이외에도 돌려 말하는 표현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이러한 의문문 구사 표현은 입으로 익혀 놔야 누군가가 대화를 할 때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 (정말 간단한 거 같지만, 난 첫 교환학생 생활할 때 다른 말은 술술해도 남에게 질문을 할 때 유독 내가 버벅거린다는 것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었다)
의외로 관계, 커뮤니티 지향적인 서구 사회에 살아남기 위해선 스몰토크 역시 갖춰야 하는 역량이며 이는 단순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걸로 길러지는 게 아니다. 1) 공감하고 질문하는 기본 대화 스킬(+오지랖) 2) 자연스러운 영어 의문문 구사 능력이 필요하며,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질문을 잘해야 한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