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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Jul 03. 2023

요알못이 외국인 20인분 식사를 맡게 됐을 때

코리아 바비큐 말고 그냥 바비큐 


영미권 재택근무자들, 프리랜서 등 다양한 형태의 디지털 노마드들이 머무르는 숙소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다. 대부분 1개월~6개월 이상 장기 투숙자들이기 때문에 짧게 만나고 헤어지는 일반 배낭여행객들과 달리, 한 집에 함께 사는 가족들처럼 지낸다. 프리랜서보단 매일 정해진 시간대에 일을 해야 하는 재택근무자들이 많기 때문에 이들도 평일 오전, 낮시간대에 일하고 저녁엔 매주 나와 같은 자원봉사자가 정하는 액티비티에 참여하거나 각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매주 내가 그렸던 액티비티 위크 

액티비티는 살사 댄스 클래스, 일몰 산행, 루프탑 드링크 등 매주 월요일 자원봉사자들이 각자 기획한 활동을 게스트들에게 공유한다. 매주 바뀌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고정 이벤트가 있는데 바로 매주 수요일 패밀리 디너다. 액티비티 별로 3~10명 내외로 참가하는 것에 비해 수요일 패밀리 디너는 머무르는 게스트 대부분 이상이 참여하는 대형 이벤트이다. (약 20명~25명 내외) 


게스트들에게서 현지 평균 식사 비용인 100페소(약 8,000원)씩 거둬, 자원봉사자 혹은 요리 잘하는 게스트들을 섭외해 이 대규모 인원 저녁 식사를 책임져야 한다. 요리 실력이 뒷받침해줘야 하기 때문에 강제 당번 시스템은 아니었고, 항상 4~5명 자원봉사자 중 요리를 잘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이들이 대부분 자원해서 진행했다. 




그들은 결코 대놓고 내색하지 않았다

패밀리 디너 메뉴는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 자원봉사자들이 대부분 영미권인 만큼 멕시코 음식이 아닌, 글로벌한 메뉴를 준비하는 편이다. 첫 패밀리 디너는 인도계 뉴질랜드인 자원봉사자인 K가 진행했다. 그는 토마토에 인도 특유의 스파이스를 첨가한 미트볼 서브 샌드위치를 선보였다. 바게트 빵을 갈라, 빨간 소스에 절여진 커다란 미트볼 2~3개와 소스를 끼얹는 형태로 배급했다. 

K가 요리한 미트볼 서브 

개인적으로 매콤한 인도 향신료가 든 음식을 좋아해서 맛있게 먹었는데 영미권 친구들에겐 꽤나 매웠던 모양이다. (사실 한국인 기준으론 이건 정말 '매콤한 맛이 들어가 있다' 수준으로 맵지 않은 수준이었다) 이들은 맛있다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올리며 K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반절 이상은 음식을 남겼다. 그리고 다음날, 일부 게스트들은 "아침에 화장실에서 고생했다"라고 슬며시 알려왔는데 알고 보니 그날 대부분 말 못 할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물론 이 사실은 K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다음 주에도 K가 진행했다. 이번엔 인도 쌀 요리인 치킨 비리야니와 망고 라씨를 준비하겠다고 했다. 인도 배낭여행의 향수를 느낄 수 있단 생각에 이번에도 기대가 컸다. 나는 시장에서 망고 구매하는 것을 도왔고 K는 8시에 진행할 패밀리 디너를 위해 오후 3시부터 식사 준비하기 시작했다. 

K의 치킨 비리야니 

모양은 그럴싸했다. 사프론으로 곱게 입힌 노란색 밥에 익힌 닭다리 혹은 날개가 올렸다. 게스트들이 모두 식사를 가져갈 때까지 기다린 이후, 나는 접시 가득 비리야니를 담아, 거실에서 앉았다. 오랜만에 밥 요리를 먹을 생각에 신났다. 밥보다 빵순이이긴 하지만, 가끔은 쌀 요리도 먹어줄 필요가 있다. 쌀을 안 먹은 지 약 2주째가 된 시점이었다. 그리고 한 숟갈 가득 비리야니를 입에 밀어 넣은 순간이었다. 


"웁"


순간 이게 뭐지? 싶었다. 먹자마자 정체를 알 수 없는 특정 향신료 맛이 강하게 치고 올라왔다. 웬만큼 형편없는 요리도 그냥 참고 먹는 편인데 이건 충격적일 정도로 맛이 이상했다. 내가 차라리 비리야니란 요리 존재를 몰랐다면, 차라리 "아 이런 요리구나" 하고 넘어갔을 텐데 난 인도 6개월 여행하면서 꽤 많은 비리야니를 먹어 본 사람이었다. 난 다급히 내 앞과 옆 친구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이상할 만큼, 평온하게 비리야니 접시를 들고 수다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거 맛이... 조금 흥미롭지 않아?(Interesting)" 


내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는데 다들 하던 대화를 멈추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들은 재빨리 "망고 라씨가 정말 맛있어"란 말로 화두를 돌렸다. 아, 내가 지금 본능적으로 한국인 특유의 직설화법을 쓴 건가 싶었다. 그들의 그릇을 보니 거의 2/3 정도 비리야니가 남겨져 있다. 어쩌면 이들이 대화에 전념하는 것도, 더 이상 손이 가지 않는 비리야니를 먹지 않으려는 핑계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맛이 이상하다고 표현하지 않았고 다들 K에겐 "훌륭하다" 칭찬을 하며 패밀리 디너는 마무리 됐다. 


훗날, K가 자원봉사자 일수를 채우고 멕시코 시티로 떠난 후에야 한 술자리에서 패밀리 디너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 K의 비리아니는 정말 최악의 패밀리 디너였어" 



코리아 바비큐요? 제가요? 


K가 떠난 이후, 새로 자원봉사자로 온 A는 아일랜드계 벨기에 여자였다. 그녀는 첫 주부터 패밀리 디너를 맡겠다고 했다. 그녀의 메뉴는 그리스 채식 요리. 페타 치즈와 각종 신선한 채소, 올리브 등을 활용해 선보일 예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유럽에서 쓸 만한 질 좋은 페타 치즈는 이곳에서 가격이 상당히 비쌌고 예산을 2배 이상 초과해 버렸다. 건강한 그리스 요리를 야심 차게 준비했지만, 예산 2배 이상 초과에 '고기가 하나도 없다'는 멕시코인 매니저의 핀잔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A가 준비한 건강한 그리스 요리 

그리고 그녀는 차주에 프랑스식 닭고기 요리를 준비했다. 닭이 상당히 저렴한 것을 활용해 예산을 초과하지 않고, 요리 반응도 전주보다 훨씬 좋았다. 

A의 프랑스식 닭고기 요리 

문제는 A가 예정보다 일찍 떠나게 되면서 발생했다. 난 당연히 3주 차도 A가 패밀리 디너를 맡을 줄 알았다. 하지만 A의 개인 사정으로, 수요일에 그녀는 과테말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남은 자원봉사자들을 둘러보니 패밀리 디너를 할만한 사람이 없다. A는 마지막 회의에서 "혹시 코리안 바비큐 해보는 건 어때? 바비큐 그릴도 있고. 아예 화요일로 당겨서 해보자"라고 제안했다. 얼떨결에 난 수락해 버렸는데 정작 막막했다. 


코리안 바비큐의 정의부터 시급했다. 코리안 바비큐는 원래 불고기를 가리키는 단어였는데 어느 순간 삼겹살과 갈비 등 철판에 직접 구워 먹는 단어가 됐다. 그렇다고 단순 삼겹살만 주구장창 굽기엔 부담이 컸다. 삼겹살은 구할 수 있었으나 그 외에 쌈채소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불고기를 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불고기를 하면, 빵에 넣어 먹어도 되고 또르띠야 위에 올려 불고기 타코처럼 먹을 수도 있다. 혹은 밥과 함께 곁들여 불고기 덮밥도 할 수 있겠지. 


문제는 이곳 산간지방은 멕시코 대도시와 다르게 한국 불고기 양념을 구하기 어려웠다. 20분 정도 차 타고 가면 나오는 월마트와 다른 대형 마트에서도 샅샅이 뒤졌지만 한국 불고기 양념은 커녕 참기름도 없었다. 불고기 양념 소스는 없어도 참기름만 있다면 뭔가 해볼 만할 텐데. 백종원 유튜브 채널을 보면 간장과 참기름, 마늘, 양파만 있으면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간장과 마늘, 양파는 이미 확보됐지만 참기름이 없었다. 한 친구는 나에게 "땅콩기름 써보는 거 어때?"라고 제안을 했지만, 땅콩기름의 강한 향이 불고기 양념 맛을 지배할 거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얇게 썰어진 소고기를 사서 참기름 없이 간장, 마늘, 양파, 설탕으로 불고기 양념을 만들어 테스트를 해봤다. 의외로 그럴싸한 맛이 나오긴 했는데 설탕이 과도하게 들어갔다. 옆에서 내가 테스트하는 과정을 지켜본 B는 "고기 요리에 설탕을 그렇게 많이 넣어?" 하며 기겁했다. 만약 이 불고기를 그대로 집행했다간 이곳에 있는 꽤 많은 건강 염려하는 친구들에게 뒷담화를 들을 거 같았다.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코리아 비비큐 말고 그냥 비비큐 파티 

A는 자신 때문에 내가 코리아 비비큐 난관에 봉착한 것을 알고, 미안해했다. 그녀는 차라리 그냥 비비큐를 하자고 제안했다.


"소고기는 비싸니까 간 돼지고기 사서 패티처럼 만들어서 그릴에 구운 후 햄버거를 하자" 

"소시지도 사서 핫도그 빵에 끼어넣어 먹으면 1인 1 버거, 1인 1 핫도그로 충분할 거야"

"사이드로 닭날개 구이도 할 수 있고"


우린 앉은자리에서 1) 돼지고기 패티 버거 2) 핫도그 3) 닭날개 구이 3가지 메뉴 아이디어를 냈다. 단일 메뉴로 하기보단 바비큐 그릴로 할 수 있는 다양한 고기 요리를 해 풍성하게 만들면 바비큐 파티하는 모양도 꽤 좋을 거 같았다. 여기에 채소가 너무 없는 거 같아, 코오슬로와 샐러드도 함께 곁들이자는 걸로 우선 결정했다. 


 패밀리 디너 당일 오후 2시, 우린 시장과 마트에서 바비큐용 닭날개, 간 돼지고기, 수제 소시지, 햄버거 번, 핫도그 빵 등을 샀다. 확실히 고기 가격이 저렴해서 꽤 넉넉하게 담았는데도 예산이 꽤 남았다. 샐러드 만들 채소와 아보카도 등을 사고 나니 거의 예산이 딱 들어맞았다.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집 관련 맥가이버 현지인 일꾼 H의 도움을 받아 저렴하게 숯도 구매했다. 게스트 중 텍사스와 호주 남자가 있어서 "혹시 오후 6시쯤 바비큐 불 피우는 거 도와줄 수 있을까요"라고 부탁도 해놓은 상태였다. 이들은 흔쾌히 응했고, 나와 A는 주방에서 재료 사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난 정말 요리치 인데, 특히 채소 다듬거나 칼 쓰는 것이 정말 서투르다. 집에서 종종 요리를 해야 할 땐 간단하게 샌드위치 해 먹거나, 최대한 재료 손질 필요 없는 음식 위주로 해 먹었다. 그런 내가 20인분을 위한 음식 사전 준비를 해야 한다니. A의 제안으로 인해 햄버거 만드는 것을 얼떨결에 승낙했는데 햄버거 패티를 만들어본 적도 없다. 주방에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다행히 A가 학생 때 정육점 알바를 했었다며 하루에 패티 수백 개도 만들었다며, 호언장담했다. 


그녀가 간 돼지고기와 각종 소스를 배합해 버무리는 동안, 나는 닭날개 구이를 준비했는데 그동안 먹어 본 맛을 즉석에서 재현해야 했다. 시판용 BBQ 소스에 간 마늘을 조금 넣어 닭에 버무리면 될 거 같다는 A가 제안했다. 뭔가 이걸로는 부족할 거 같다는 감이 들어서, 내 찬장에 있던 간장과 마늘, 양파를 집어 들었다. 참기름을 제외한다면, 불고기 양념 만들기 재료였지만, BBQ소스와 배합한다면 꽤 그럴듯한 닭날개 구이 양념이 될 거 같았다. 


커다란 냄비에 닭날개를 가득 넣어 BBQ소스를 반통이상 부었다. 여기에 간장을 넣고, 간 마늘을 A가 놀랄 정도로 많이 집어넣었다. 처음엔 A가 마늘 5~6알이면 충분할 거라고 했는데, 마늘의 민족인 나로선 마늘 5~6알로 20인분의 닭날개 양념을 어떻게 만들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결국 마늘 1 쪽을 다 갈아서 넣고 양파도 조금 넣었다. 여기에 설탕 몇 스푼을 넣었는데 정말 감 하나만 믿고 가는 근본 없는 레시피였다. 닭날개에 고루 양념을 버무려 주고 냉장고에 잠시 재워둔 후 샐러드와 빵 손질을 하려고 하는데, 게스트들이 하나둘씩 주방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뭐 내가 도와줄 게 있을까?"


내가 전날, "코리아 비비큐 파티 준비에 막막하다"라고 솔직하게 감정을 토로했던 게 이들 마음에 걸렸던 걸까. 이들은 주방에 자진해 들어와 샐러드 채소를 씻고 드레싱을 만들고 야채를 버무렸다. 그리고 나도 어떻게 만들지 몰랐던 코오슬로도 만들고, 빵도 모두 반으로 가르고, 패티 모양 만드는 것을 돕는 등 각자 일을 찾아서 도와주는데 마치 명절에 다 같이 요리하는 분위기를 방불케 했다. 확실히 나를 제외하고 다들 서양식 바비큐 준비하는 게 익숙한 모양새였다. 


이후 텍사스에서 온 J가 그릴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고, 나는 햄버거 패티 굽기에도 부족한 그릴 크기를 보고, 재워둔 닭날개는 오븐으로 굽는 것으로 급 결정을 바꾸었다. 이 닭날개는 오븐으로 1차로 구운 후, 패티를 다 구운 후 그릴에 2차로 살짝 구웠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거의 25인분 정도 넉넉하게 준비한 닭날개였는데 동이 났고 네덜란드인 S는 "내 인생에서 먹어 본 닭날개 탑 3 중 하나야. 이거 레시피가 어떻게 돼?"라고 물어볼 정도였다. 차마 그들에게 "이거 그냥 BBQ소스에 간장, 마늘을 어어어 엄청 때려 박아 만든 거야. 거기에 설탕도 꽤"라고 말할 수 없어 "간장과 마늘이 핵심이야"라고 에둘러 말했다. 이들에게 닭날개 요리에 간장을 쓴다는 게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나 보다. 내가 쓴 간장 브랜드명을 물어보더니, 이후 자기도 시도해 보겠다고 했다. 

텍사스 & 뉴질랜드 사람의 바베큐 

A와 모두가 함께 만든 돼지고기 패티도 그릴에서 그럴듯하게 구워졌다. 소시지와 패티가 구워지는 대로 야외 테이블에 채우고 각자 빵과 채소, 고기 등을 얹어 햄버거를 먹는 방식이었다. 패티 역시 다행히 간이 적절히 되었고, 나머지는 각자 알아서 조합해서 취향껏 소스를 넣어 먹으면 되는 거기 때문에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시장에서 구입한 현지인 수제 소시지도 극찬을 받았다. 사실 멕시코에서 소시지를 구매하면 너무 짠 경우가 많아서, 꽤 걱정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육즙이 풍부한 맛있는 소시지여서 나 역시 놀랐다. 


그동안의 패밀리 디너와 달리, 밖의 마당에서 바비큐 파티 하는 느낌이라 평소보다 더 들뜬 분위기가 형성됐다. 다들 각자 와인과 맥주, 데낄라, 메스칼을 들고 와 자연스레 2차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 날 잔반은 냉장고에 재워두고 깜박하고 있었던 코올슬로가 다였다. 매니저 역시 "역대급 패밀리 디너 탑 5안에 드는 경험"이라며 칭찬했다. 

사실, 바비큐 파티 기획은 내가 했지만, 정말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도와주었기 때문에 이뤄질 수 있었다. 비록 코리안 바비큐는 하지 못했지만, 음식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다는 것에 의의가 컸다. 여행하면서 온갖 새로운 것은 다 시도하면서, 요리 앞에선 항상 작아지는 나였다. 엄청나게 어렵고 까다로운 것을 해낸 것은 아니지만, 이를 계기로 조금씩 음식을 만들어보기로 결심했다. 


단연코 이 날은 내가 산 크리스토발에 한 달 넘게 머무르면서 가장 행복하고 의미가 있었던 날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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