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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Sep 16. 2023

뚱 모나리자의 콜롬비아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의 별세

콜롬비아 메데인, 페르난도 보테로 X 파블로 에스코바르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한 달 살기를 시작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메데인에 대해서 아는 건 딱 2개였는데 미드 <나르코스>의 주인공인 파블로 에스코바와 뚱뚱한 모나리자로 유명한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의 고향이라는 것이다. 둘 다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전자는 메데인 사람들이 치를 갈 정도로 싫어하는 악명 높은 인사이고, 후자는 메데인 사람뿐 아니라 콜롬비아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국민 화가라는 점에서 대비된다.

페르난도 보테로의 모나리자

예술에 대해 깊이 있게 아는 것은 아니지만,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강렬하고 밝은 색감과 과감한 윤곽 형태 등 민속 느낌 스타일을 좋아한다. 특히 페르난도 보테로는 "뚱뚱한 모나리자"로 유명한 화가이지 않는가. (물론 페르난도 보테로는 뚱뚱한 이란 표현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는 '볼륨감'이란 단어를 쓴다) 약간은 초현실적인 그림이면서 재치가 있는 작품을 좋아하기 때문에 페르난도 보테로의 작품 세계는 그야말로 취향저격이었다. 그래서 보통 여행할 때 갤러리 등을 자주 가는 편은 아니지만 콜롬비아에 방문하면 페르난도 보테로 미술관부터 그의 작품이 있는 곳을 돌아다녀야지라고 생각을 했다.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는
페르난도 보테로의 작품에 폭탄을 설치했다

콜롬비아 메데인 시내 플라자 산 안토니오(Plaza san antonio)엔 페르난도 보테로의 볼륨감 있는 '새' 동상 2개가 나란히 서있다. 독특한 것은 왼쪽에 있는 새는 몸통이 뻥하고 뚫린 상태이고 오른쪽에 있는 새는 온전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엔 기구한 사연이 있다.


1980년-90년대에는 드라마 <나르코스>에 나오는 것처럼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사실상 메데인을 좌지우지하던 시기였다. 하루에도 20~30명이 죽어나갔고, 메데인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 그들이 설치한 폭탄과 총으로 죽음을 맞이할까 봐, 매일매일 벌벌 떨면서 살아야 했다. 경찰과 군인, 심지어 대통령마저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던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그야말로 메데인 사람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메데인 사람들은 이곳에 온 여행객들이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언급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할 뿐 아니라, 지금은 안전하고 평화로운 메데인에 여전히 "위험한 도시"란 그림자를 드리우기 때문이다.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테러 흔적이 그대로 남은 새 동상

1995년,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페르난도 보테로의 새 동상에 폭탄을 설치했다. 이로 인해 23명이 사망했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지금 광장에 서 있는 몸이 뻥 뚫린 새 동상이 그것이다. 메데인은 이를 철거하지 않고, "상처 입은 새(El pájaro herido)"란 이름을 붙이고 그 옆에 다시 만든 새 동상을 세웠다. 그리고 이 새 동상을 "폭력이 가득했던 과거를 기억하고, 평화를 추구하자"라는 의미로 "평화의 비둘기(La paloma de la paz"라고 명명했다.

페르난도 보테로의 '파블로의 죽음'을 다룬 두 작품

아이러니한 점은 페르난도 보테로가 1999년,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미국 마약단속국(DEA)에 의해 최후의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을 마치 영웅의 전사처럼 표현한 그림을 발표해 논란을 야기하기 했다는 것이다.



페르난도 보테로와 메트로는
콜롬비아 메데인의 자랑


새 동상을 구경하고 페르난도 보테로 플라자에 방문했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지만, 페르난도 보테로의 볼륨감 넘치는 작품을 큰 동상의 형태로 접할 수 있는 게 인상 깊었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만지고 심지어 동상에 올라타며 사진을 찍었다.

페르난도 보테로 작품 뒤로 라파엘 우리베 우리베 문화 팰리스

플라자 안엔 독특한 패턴으로 지어진 네오고딕 양식의 건축물이 세워져 있다. *라파엘 우리베 우리베 문화 팰리스 (Palace of Culture Rafael Uribe Uribe)이라고 불리는 정부 건물인데 국가 기념물이며,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 예술 문화 시설의 역할을 수행한다. 내부엔 갤러리를 포함해, 도서관, 라파엘 우리베 우리베 박물관 등이 있다.


*라파엘 우리베 우리베(Rafael Uribe Urbie)는 콜롬비아의 1000일 전쟁(1899-1903)에서 활약한 국민 영웅입니다.


페르난도 보테로 춤추는 커플과 메트로

이 문화 팰리스의 하이라이트는 옥상인데, 옥상에서 센트로를 포함한 메데인을 내려다볼 수 있다. 인상적인 것은 콜롬비아 메데인의 자랑이기도 한 메트로*가 지나가는 풍경 뒤로 건물 한 면 전체를 장식하고 있는 페르난도 보테로의 작품 춤추는 커플(Pareja bailando) 작품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메데인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두 가지 요소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메트로가 자랑인 게 조금 의아할 수 있지만 콜롬비아 메데인의 메트로, 트램 등 대중교통의 발전은 콜롬비아 다른 도시, 심지어 수도 보고타보다 선진적이며 깔끔하고 편하게 이용할 수 있어 메데인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인프라입니다.



같은 날, 페르난도 보테로의 별세 소식을 듣다

메데인에서 콜롬비아 현지인 아파트에서 호스트 패밀리와 함께 지내고 있다. 메데인의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밤이 되면 메데인의 화려한 야경을 테라스에서 볼 수 있는 이 아파트가 난 꽤 마음에 들었다.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바라보는 메데인 야경

무엇보다 매일 내가 집에 돌아오면 호스트가 따뜻하게 맞아준다는 것이다. 호스트 R은 은퇴한 도시 엔지니어로, 대학생인 아들과 함께 살며 비어있는 방 1개를 에어비앤비로 활용하고 있다.


이 날도 난 저녁에 들어와, 막 식사 준비를 하던 R과 오늘 무엇을 했는지, 이것저것 궁금한 것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가 "오늘 페르난도 보테로 플라자를 다녀온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렇지.. 오늘 그가 죽었어"라고 뜬금없이 말을 하길래 난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엥?" 하는 반응으로 내가 다시 한번 말해달라고 요청하자 스페인어로 또박또박하게 "오늘 그가 죽었어. 몰랐어?"라고 말하며 거실 TV를 틀었다.


 마침 틀자마자 페르난도 보테로의 별세 소식이 보도되고 있었고 다른 채널로 돌려도 모두 페르난도 보테로 별세 소식 및 그의 연대기를 돌아보는 프로그램들로 재편성되었다.

콜롬비아 뉴스 보도 - 페르난도 보테로 별세 소식

고백하자면, 난 페르난도 보테로가 아직도 살아있는 화가라는 사실도 몰랐다. 그래서 R이 "그가 오늘 죽었다"라고 말해서 어리둥절했던 것도 있었고, 좋아하는 화가라 해놓고 현존하는 화가의 얼굴조차 몰랐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졌다. 페르난도 보테로는 콜롬비아 메데인 출신이지만, 유럽 모나코 저택에서 91세 나이로 2023년 9월 15일 (콜롬비아 시각 기준)에 숨졌다. R의 말에 의하면 페르난도 보테로는 유럽과 콜롬비아를 자주 오가곤 했다고 한다.


그는 생전 3,000여 점 작품을 남길 정도로 다작을 했다. 뚱뚱한 모나리자로 많이 알려져 있어 단순 명작 패러디를 많이 한 화가가 아닐까라고 여길 수 있는데 생전 정치 및 사회 비판 메시지를 담은 작품도 많이 남겼다고 한다. 과거 폭력과 부패로 얼룩진 사회상을 담은 작품들과, 가장 큰 논란을 일으켰던 미군의 이라크 교도소 수감자 대상으로 저지른 고문 실태를 폭로한 작품들이 있다. 화풍이 익숙하다 했는데 멕시코 민중 예술가로 유명한 멕시코 디에고 리베라의 영향을 일부 받았다고 한다.


페르난도 보테로는 콜롬비아 민족 예술 화풍 위에 '풍선처럼 빵빵한 볼륨감'이 있는 피사체를 담으며 자신만의 개성 및 독자 노선을 구축했다. 현 콜롬비아 구스타보 페트로 대통령은 트위터에 "우리의 전통과 결점의 화가, 빛과 같은 화가, 폭력과 평화의 화가인 페르난도 보테로가 세상을 떠났다 (Ha muerto Fernando Botero, el pintor de nuestras tradiciones y defectos, el pintor de nuestras virtudes. El pintor de nuestra violencia y de la paz)" 란 트위터를 남기며 추모했다.


세계적인 화가인 페르난도 보테로의 고향에서 그의 작품들이 가득한 곳을 둘러보고 온 날 저녁, 그의 별세 소식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테라스에 나가 메데인 시내를 내려다보는데 항상 그랬듯 산을 가득 수놓은 불빛으로 가득하고 고요하다. 내일은 페르난도 보테로 작품이 있는 안티오키아 박물관(museo de antioquia)에 한번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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