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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Jan 20. 2023

스코틀랜드를 꺾은 대만 위스키 찾아갈 결심

07.오랜만에 만난 대만, 카발란 위스키 & 영화 <헤어질 결심>

요즘 위스키 마시는 MZ세대

코로나로 인해 위스키 시장도 커졌고, MZ세대들이 위스키의 큰 손이 되었다는 기사가 종종 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Z세대보다는 30대에 접어든 밀레니얼 세대라고 생각하는데, 요샌 하도 입버릇처럼 MZ, MZ하는 통에 그러려니 하는 편이다.


정작 Z세대는 "MZ라고 불리는 거 안 좋아하는데요"라고 하지만, 90년대생 밀레니얼 세대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소위 미디어에 노출되는 MZ들의 특성은 때로는 밀레니얼 세대였다가도, 때로는 Z세대에 더 가까운 특성인데 그냥 편의상 이 20년도 더 차이나는 사람들을 하나로 싸잡아 부르는 듯하다.

밀레니얼 세대는 1982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를 , Z세대는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에 태어난 세대를 가리킨다.  


위스키는 그저 허세 가득한 술이라고 생각했다. 간혹 술자리에서 누가 비싼 술이라고 꺼내오면 "와"하고 환호하지만, 그것이 위스키 맛과 향을 진심으로 좋아해서 나오는 감탄사라기 보단 "비싼 가격"이란 꼬리표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맛과 향보단, 그 술의 의미, 가격 등 제공된 정보에 맞춰 즐기는 그런 술.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집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우연히 무라카미 하루키의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에세이집을 보았을 때 위스키에 대한 호기심이 크게 일었다. 심지어 책을 펴기도 전에, 저 문구에 감동받아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홀린 듯 그 책을 구매하고 다양한 위스키를 시음해 볼 수 있는 공간에 찾아가 위스키에 입문했다.


그렇다, 위스키 즐기는 요즘 세대의 장본인 여기 있다.


대만에 위스키가 있다고요? 그것도 세계적으로 엄청 유명한?

지금은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와인이 매우 유명하지만, 프랑스 및 유럽 와인들 사이에서 명함도 못 내밀고 무시당하던 시절이 있었다.


때는 1976년, 한 영국인 와인 소믈리에는 미국 나파밸리에서 기대 이상의 엄청난 와인들을 맛본 후 이들을 들고 와 프랑스 파리에서 다양한 와인 전문가들을 모시고 일명 "블라인드 와인 시음회"를 주최한다.


어느 것이 프랑스 와인인지, 미국 나파밸리 와인인지 알 수 없는 상황. 와인 전문가들은 와인 마시고 대놓고 뱉으며 "형편없는 미국 와인"이라고 말하는 등 이 시음회 자체를 비웃는 듯하는데...


그들의 최고 점수를 받은 레드와 화이트 와인 1위 모두 나파밸리에서 생산한 와인이었다. 미국 나파밸리 와인의 명성을 널리 알린 이 사건은 '파리의 심판'이라고 불리며 <와인 미라클>이란 이름의 영화로도 제작됐다.

다음 영화 <와인 미라클>


이 '파리의 심판'을 떠올리게 하는 사건이 위스키 업계에도 나타났다. 위스키의 주요 5대 생산지는 흔히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일본, 미국, 캐나다인데 대부분 서늘한 기후를 가진 지역에서 주요 위스키 제품을 생산한다. 위스키를 오크통에서 숙성할 때 평균 2% 내외로 증발하는데 온도가 높을수록 그 증발량이 많기 때문에 손실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보다 더 온난다습한 기후를 자랑하는 대만에서 뜬금없이 '위스키'를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대만의 식음료 대기업인 '킹카' 그룹(킹카, 퀸카 아님...) 회장님의 사심 담은 사업으로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좋은 성과를 거뒀다. 바로, 2010년도 위스키 성지 스코틀랜드에서 위스키 블라인드 시음회가 열렸는데 스코틀랜드 위스키 3종, 영국 위스키 1종, 대만 위스키 1종이 나온 것이다.


라인업만 보면 누군가가 일부러 대만 위스키를 갈구기 위함 목적이 다분해 보이는데 반전은 대만 위스키가 이곳에서 1위를 한 것. 콧대 높은 스코틀랜드의 쟁쟁한 위스키 브랜드를 꺾은 대만 위스키는 이를 계기로 세계적 명성을 누리고 있다. 특히 싱글몰트 위스키 붐을 타고 더욱 상승세이던 와중에, 영화 <헤어질 결심>에도 등장해 한국에서도 해당 위스키는 없어서 못 구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대만 북서쪽 이란현에 위치한 카발란 위스키 증류소

이 위스키 브랜드 이름은 '카발란(Kavalan)'. 대만 북서쪽 이란현에 위치해 있으며, 이곳에 거주하던 원주민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카발란 위스키를 위해 대만 반바퀴를 돌다



대만 아리산을 포함해 남쪽(타이난, 가오슝)에만 머무르면서 먹방 여행으로만 한 2주 보낼 계획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미식 여행을 떠나면 흔히 남도로 향하듯, 대만에서도 남부 지방 음식 문화가 발달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하루를 꼬박 이동으로 날리면서까지 대만 북서쪽 이란현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한 데는 카발란 위스키 증류소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가오슝에서 타이난, 타이난에서 타이베이, 타이베이에서 이란현까지. 기차를 세 번 갈아탄 후 이란현에 도착하니 비가 서늘하게 내리고 있었다. 쉬폰 원피스 하나만 입어도 충분했던 햇빛 짱짱하던 타이난이 벌써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캐리어 구석에 넣어둔 폴리스 재킷과 경량 구스 점퍼를 주섬주섬 꺼내 입는데 타이베이에 살고 있는 대만 친구에게서 라인 메시지가 왔다. 한국 떠나기 전 타이베이에 들르면 만나기로 한 다른 친구 C였다.


[문자 내용]

C:지금 타이베이에 비가 많이 와. 우리 만나는 일요일엔 안 왔으면 좋겠는데

나: 나 방금 이란현에 도착했는데 비 엄청 많이 와 ㅠㅠ

C:이란은...원래 1년 내내 비 오는 곳이야


비오는 대만 이란 현

대만은 작은 나라라서 대부분 지역 기후가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오산. 대만의 동쪽은 비가 자주 온다. 그중 이란현은 항상 흐림이 예보에 떠 있고 아침엔 안개가 자주 끼곤 한다. 다행인 것은 항상 주룩주룩 내린다기보단 간헐적으로 이슬비가 내리는 정도? 물론 유럽처럼 우산 없이 다니기엔 조금은 부담스러운 강우량이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질문에 "내가 안에 있으면 좋고, 밖에 있으면 별로"라고 대답한다. 말 그대로 비가 오는 날 풍경을 사랑하지, 빗 속의 습습함을 썩 즐기진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간신히 접으며 시내버스에 올라타는데 기분이 좋았던 이유는 이 버스가 카발란 위스키 증류소를 지나기 때문이다. 비 오는 날, 위스키라니. 괜히 분위기 있어 보이는 이 조합은 카발란 위스키 체험을 더욱 극대화시켜줄 거 같았다.


마스크를 뚫고 들어온 위스키 숙성향에 황홀해지다


카발란 위스키 증류소는 대기업의 자본(?)으로 시작한 곳답게 규모가 상당히 크고 투어 시설 등이 잘 갖춰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이 증류소를 지을 때부터 킹 카 회장님은 증류소를 투어 상품화하는 것을 크게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카발란 위스키 증류소 건물
카발란 위스키 증류소 약도

증류소를 둘러보는 것은 무료이다. 독특하게 투어방식은 증류소에서 진행하는 투어 프로그램과 셀프 투어, 두 가지로 나뉜다. 이때 증류소에서 진행하는 투어 프로그램은 영문과 중문으로 제공하는데 영문 가이드 투어의 경우 최소 일주일 전 홈페이지를 통해 문의 예약을 해야 한다. 중문 가이드 투어는 하루 5~7차례 정해진 시간대에 방문하면 받을 수 있다. 중문 가이드 투어를 받으려고 투어 센터에 도착했는데 이게 매 시 정각에 시작하는 거고 내가 도착했을 땐 이미 정각에서 10분이 지난 터라 그냥 셀프 투어를 하기로 했다.

대만 카발란 위스키 증류소 여행

어차피 같은 증류소 시설을 둘러보는 거고, 워낙 곳곳에 중문, 영문 설명이 자세히 되어 있기 때문에 셀프 투어하는데도 큰 무리는 없었다. 위스키의 역사부터 증류 방법, 오크통 숙성 정도에 따른 위스키 색상 등 꽤 흥미로운 내용 등을 천천히 읽어 보면서 위스키 증류 순서에 맞춰 배치된 증류 시설을 관람했다. 마지막에 도착한 곳은 위스키 숙성 오크통이 잔뜩 쌓인 숙성고를 유리창을 통해 조망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저 바라만 봐도 행복했던 카발란 위스키 숙성고

어찌나 많은 위스키들이 숙성되고 있는지, 이곳은 단지 조망하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숙성향들이 마스크를 뚫을 정도로 강렬했다. 잠시 그 향이 베인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싶어 마스크를 앞으로 살짝 들어 올린 채 한 껏 숨을 들이켜 마셨다. 더욱 진한 카발란 위스키 향들이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그 순간의 황홀감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서 그 자리에서만 한 2~3분간 가만히 서서 마치 명상하는 양, 호흡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을 반복했다.


탕웨이는 영화 속에서 카발란 위스키를 마시지 않았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송서래(탕웨이)는 해준(박해일)이 "나는요... 완전히 붕괴되었어요"란 말을 사랑에 대한 은유로 받아들인다. 무너지고 깨지는 것, 그러면서 더욱 진하게 남는 것은 결국 사랑이라고 본 그녀는 지독하게 사랑한 그를 위해 스스로 붕괴되기로 결심한다.

카발란 위스키 증류소에서 저렴하게 즐기는 시음

카발란 위스키 증류소는 투어는 무료이지만 위스키 시음을 저렴한 비용을 내고 할 수 있다. 총 3 종류의 카발란 대표 위스키 라인과 카발란에서 출시한 신제품 진 중 선택해서 시음할 수 있는데 진을 제외하고 두 종류의 위스키를 차례로 맛봤는데, 솔리스트 올롤로쏘 위스키를 시음하는 순간 이 붕괴되었다란 대사가 머릿속을 스쳤다. 부드러운 목 넘김과 마지막에 강렬하게 훅치고 올라오는 피니시, 그리고 오래가는 여운. 그야말로 서래가 이해하는 '붕괴'의 개념이 아닌가.


더 재미난 사실은 올롤로쏘 위스키가 와인용 셰리 오크통에 숙성시킨 위스키라는 것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 나와 유명해졌지만, 정작 영화 속에선 서래가 이 위스키를 마시는 장면이 없다. 그저, 해준이 훔쳐보는 서래의 집 내부를 비추는 카메라가 비추는 장면에 카발란 위스키병이 포착되었을 뿐이다.


카발란 위스키는 서래가 마시는 위스키가 아니라, 서래를 학대하는 남편이 즐기는 기호품으로 추정된다. 왜 서래가 마시는 위스키가 아니라, 그의 남편이 마시는 위스키로 설정했을까 궁금했었는데 문득 이 카발란 올롤로쏘 위스키 자체가 영화 속 송서래를 은유한 오브제가 아닐까란 뇌피셜이 들었다.


대만 카발란 위스키 증류소 여행

와인을 오크통에 숙성하면 와인에 오크통 향이 배일뿐 아니라, 그 오크통에도 그 와인향이 잔뜩 배여, 다음 그 오크통에 들어간 술에도 영향을 미친다. 마치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이 오랜 기간을 거쳐 닮아가는 것은 사랑과도 닮아서 와인의 숙성은 마치 사랑이 무르익는 과정에도 비유할 수 있다. 셰리 올롤로쏘는 셰리 와인 종류 중 하나로 묵직하고 농밀한 타입인데, 이 와인을 담은 오크통에 위스키를 넣어 숙성하면 소위 말하는 셰리 위스키가 된다.


서래는 오크통이고 그의 전 남편은 셰리 와인이다. 셰리 와인을 비우고 난 후, 오크통에 들어온 것은 셰리 와인과는 너무나 다른 새로운 위스키. 서로 다른 속성을 가졌지만 기존 셰리향이 입혀진 상태에서 위스키를 품은 형태로 탄생한 이 위스키는 부드러운 감정 후에 강렬한 한 방과 긴 여운을 남기며 사라졌다.


 <헤어질 결심>은 소통의 시차를 구심점에 두고, 사랑이란 복잡 미묘한 단어를 2시간이 넘게 스크린으로 구현한 영화이다.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 그리고 서래와 해준의 비극적 사랑 결말은 없지 않았을까? 그 카발란 위스키 한 모금만으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설명되므로. 카발란 위스키 증류소에서 위스키 시음하며 영화 <헤어질 결심>부터 사랑의 정의까지. 커다란 잔에 감질나게 채워진 위스키 한 모금 시음하면서, 별의별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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