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오랜만에 만난 대만, 야시장 스테이크&우육탕
호텔보다 현지인 집에 머무르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
혼자 여행하면 외롭지 않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오히려, 혼자 여행하기 때문에 현지인 친구를 만들 기회는 더욱 열려있다. 만약 동행이 있다면, 여행은 철저히 그 동행과 함께 움직이는 것으로 굴러간다. 물론 가만히 있는다고 친구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친구를 사귈 만한 장소를 찾아가는 것. 혹은 낯선 사람들과의 대화를 너무 경계하지 말 것. 살짝은 오픈 마인드로 말을 주고받아볼 것. 열린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다가갈 필요가 있다.
나 같은 경우엔 에어비앤비를 많이 이용하는 편이다. 단독으로 집 한 채 빌리는 것보다, 집주인과 함께 머무르며 내 개인실이 보장된 그런 형태. COVID-19 가 터지기 전에, 중국 상하이를 여행 간 적이 있었는데 7일간 여행동안 총 3개의 집에 숙박했다. 비앤비 숙소를 정할 때 도심지에서 살짝 벗어난 외곽으로 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들의 집 모두 내가 에어비앤비 등의 형태가 아니었다면 굳이 방문하지 않았을 위치였다.
"거기에 뭐가 있어"라고 묻는다면, "그냥 사람 사는 데야"라고 답할 수밖에 없지만, 그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맛집도 있고, 풍경이 있다. 무엇보다 땅값 비싼 상하이에서 내 또래의 2030 청년들은 어떤 공간에서 살아가는지에 대해 짧게나마 체험할 수 있다.
특히 첫 번째 집이 난 기억에 남는데, 게스트룸 한편에 기다란 책꽂이에 흔한 자기 계발서나 재테크 투자, 힐링 에세이 책들이 잔뜩 있었기 때문이다. 표지는 조금 다르지만, 제목만 한국어로 번역해 본다면 한국에서도 꽤 인기를 끌법한 책들이다.
재테크 관련 서적 중 유독 닳아있던 책이 있길래 펴보았는데 딱 펴본 곳에 에어비앤비 관련 내용이 나왔다. 에어비앤비 등 남는 방을 공유해 월세를 충당한다 그런 내용이었는데 어찌나 많이 읽었는지 그 책을 다시 덮고 아무렇게나 폈을 때 그 페이지가 계속 나올 정도였다. 나는 이 친구가 실행하고 있는 계획의 일부(?)가 된 것인가. 퇴근시간이 늦는 것인지, 체크인한 날엔 그녀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이 돼서야 겨우 마주쳤는데 마침 아침 먹으러 가는 길이라길래 쫄래쫄래 달라붙었다.
우린 빌라 단지 근처에 훈툰집으로 향했는데, 이 날 상하이식 훈툰의 맛에 처음으로 매료되었던 날이었다. 원래 베이징에 살 때도 훈툰을 아주 가끔 먹긴 했으나 생각보다 맛이 인상 깊지 않아 굳이 훈툰을 아침 식사로 선택하는 편은 아니었다.
반면, 상하이의 훈툰은 고기 육즙이 국물에도 진하게 우러나온 상태인데 만두도 큼직해서 비주얼은 우리나라 만둣국 느낌인데 중국식 육향이 더 진하게 나오는 그런 만두라고 할까? 기대 이상의 훌륭한 훈툰 맛에 내가 국물까지 싹싹 긁어먹자 호스트 친구도 살짝 긴장을 푼 듯했다. 비록 이 친구 집에는 하루 정도 머물렀지만 위챗 친구 추가하며 종종 타임 라인을 남기면 좋아요 정도 눌러 주는 사이로 남았다.
이후 사진정리하며 알게 된 것은, 이날 먹은 훈툰집이 굳이 이 생활권역뿐 아니라, 상하이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훈툰집 (미식 앱 평가 기준)이었다. 하지만, 주요 관광권역과는 거리가 멀어서, 일반 여행객들이라면 굳이 이 훈툰집만을 위해서 오기는 애매했을 것이고, 나 역시 이 집에 머무르지 않았으면 놓쳤을 맛집이었을 것이다.
"세렌디피티 (Serendipity) : 뜻밖의 기쁨이나 재미, 발견"
좋아하는 영어 단어를 말해보라고 하면 항상 첫 번째로 꼽는 것은 "세렌디피티 (Serendipity)"이다. 의도나 계획하지 않은 뜻밖의 발견과 그로 인해 오는 재미 등을 의미한다. 과학 이론이나 발명 일화를 이야기할 때 주로 거론되지만 여행에서도 종종 '세렌디피티'가 자주 언급된다.
계획이 그리 많지 않은 느슨한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틈새 속에서 세렌디피티를 맞닥뜨릴 수 있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즉흥적으로 나에게 방 한 칸을 내 준 친구와 어울려보거나, 그 친구가 자주 먹는 음식을 함께 먹어보거나 등등 말이다.
이번 대만 여행에선 에어비앤비는 아니지만,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A라는 대만 친구 집에 머무르게 됐다. A는 타이난역에서 기차를 타고 약 2~3 정거장 떨어진 '샨화善华'란 지역에 살았는데 외국인이 여행으로 올 일은 전혀 없는 곳이다. 친구와 나도 "내가 이곳을 여행하는 최초의 한국인 여행객이 아닐까"란 망상도 해봤을 정도로. 지금 대만 여행을 돌이켜보면, 이곳에서 먹은 야시장 스테이크와 오일장에서 먹은 신선한 우육탕은 내가 대만에서 먹은 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 5위 안에 든다.
야시장에서 스테이크라니?
대만은 도시의 규모와 상관없이 어딜 가나 야시장을 쉽게 볼 수 있다. 샨화에도 샨화 야시장이 있는데 타이베이 등 여타 도시의 유명 야시장보다 규모는 작지만, 보통 야시장에서 팔만한 먹을거리는 다 갖추고 있었고, 오히려 그리 크지가 않아서 한 바퀴 쓱 둘러보고 뭐 먹을지 정하기도 수월했다.
타이난을 함께 여행하고 샨화에 돌아오는 길에 A는 "우리 야시장에서 스테이크 먹자!"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 스테이크가 그냥 우리나라 노점상에서 흔히 먹는 "큐브 스테이크"같은 형태인 줄 알았다. 스테이크 먹고 가자며 자리에 앉기까지는.
그리고 필레미뇽, 설로인, 안심, 등심 스테이크 등등이 적혀 있는 메뉴판을 보여주었는데 고기 종류를 정하고 곁들여서 먹을 밥이나 면 중 선택 등을 하게 했다. 어, 정말 찐 스테이크 먹는 건가? 야시장에서? 주문을 하면서도 대체 어떤 형태로 나올지 어리둥절하게 기다리는데, 핑크색 일회용 용기에 묽게 끓인 크림 수프가 나왔다. 아, 나름 경양식이라는 걸까? '스테이크'는 응당 분위기 있는 곳에서 고급 식기류로 먹어야 돼라는 편견을 깬, 언밸런스가 재밌었다. 수프의 맛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맛이 맞았다. 다만, 살짝 맛이 연할 뿐.
크림 수프를 호로록 마시니 곧, 까만 철판에 설로인 스테이크가 미디엄 레어로 구워져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나왔다. 잔뜩 끼얹은 데미그라스 소스에 달걀 반숙, 그 밑엔 파스타 면이 잔뜩 깔려 있었다. 스테이크에 밥을 선택한 A는 밥 1 공기 분량은 훨씬 되어 보이는 밥이 가득 깔려 있었고 그 위에 스테이크가 얹어져 있는 모양새였다. 스테이크는 스테이크인데 밥과 면을 바닥에 잔뜩 깐 스테이크라니. 레스토랑에선 보기 힘든, 야시장 특화용 스테이크인 셈이다.
분위기 있는 공간에서 느낌 내며 먹어야 할 대표적인 음식을 가장 야시장에서 국밥처럼 먹는 게 꽤 신선했다. 흔한 스테이크의 비주얼은 아니지만, 맛이 없을 수는 없는 그런 스테이크. 또 달짝 지근한 데미그라스 소스에 밥이나 면 비벼 먹는 것은 못 참지- 그 욕망을 그대로 재현한 듯한 샨화 야시장의 스테이크는 A가 아니었다면 난 존재조차도 몰랐을, 그런 음식이지 않았을까.
타이난에서 제일 맛있는 우육탕을 먹으려면 아침 6시 이전에 가야 돼
타이난의 대표적인 음식 중 하나는 우육탕이다. 말 그래도 소고기탕인데, 면은 없이 소고기가 잔뜩 들어가 있다. 대만식 소고기 뭇국이라고도 불린다. 내가 우육면에 집착(?)하는 것을 잘 아는 친구는 타이난 지역에서 가장 맛있는 우육탕은 샨화에서 맛볼 수 있는데 자기도 아직 못 먹어봤다고 한다. 그곳엔 새벽 4시부터 시작해 오전 7시쯤 되면 고기가 다 떨어져 먹을 수가 없다고. 아니, 대만 사람이 아무리 부지런하다 해도 새벽 4시부터 아침 식사를 한단 말인가?
"샨화엔 대만 남부 지역 최대 우시장, 도축장이 있어서 타이난으로 가는 대부분의 소고기는 샨화에서 가는거야"
"그리고 그곳에서 매월 2일, 5일, 8일에 장이 새벽 일찍부터 열려. 갓 도축한 신선한 소고기로 우육탕을 끓여서 파는데 그게 진짜 맛있대"
타이난 지역 토박이인 A의 시아버지가 이 곳에서 자주 아침 식사를 한다는데 정작 A와 그녀의 남편 모두 아침 일찍 거기까지 갈 자신이 없어서 한번도 시도를 해보지 못했다고 한다.
"듣기론 아침 6시 전까진 가야 된다고 하는데"
"아, 근데 아침 6시는 정말 오바야. 내가 아무리 아침에 진심이라고 하지만, 그건 너무 꼭두새벽 아니니?"
"그치그치. 근데 소문으론 8시에 가면 먹을 고기가 하나도 없다는데"
"그래도 무리하진 말고. 내일 한 8시쯤에 가보는 걸로 하자. 갔는데 없으면 어쩔 수 없지"
현지인들이 오픈런하는 우육탕과 소고기 볶음
스쿠터 위에 올라타 아침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도착한 곳은 흡사 우리나라의 오일장 풍경과 비슷했다. 트로트 음악이 연상되는 정겨운 음악이 울려 퍼졌고, 상인들은 먼지가 잔뜩 쌓인 만물 잡화, 옷 등을 펼쳐 놓고 판매하고 있었다. 장의 중심에는 지붕이 있는 커다란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고, 식사를 위한 테이블이 대규모로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지역 먹거리 축제 등을 할 때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식사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아 다행히 우육탕은 떨어지지 않은 모양이다. 친구와 나는 서둘러 자리를 잡고 우육탕과 소고기 볶음을 주문했다. 각각 100위안으로 한화로 약 4천 원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주문을 하고 번호표를 가지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음식이 나오면 해당하는 번호를 할머니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 소리를 듣고 손을 번쩍 흔들면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일회용 종이용기에 가득 따른 우육탕과 소고기 채소볶음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사실 비주얼은 그리 화려하지 않고 너무나 평범해 살짝 실망했는데, 국물을 떠먹는 순간 음식은 역시 외관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국물은 생강향과 약재 향이 은은하게 베여 깔끔하다. 아낌없이 큼직큼직하게 들어간 소고기는 색상부터 신선 그 자체로 씹으면 육즙이 퍼져 나온다.
거창한 재료를 넣지도 않았는데도 계속 손이 가는 맛이다.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완벽하게 간이 된 상태. 마음 같아선 우육탕 하나 더 시켜서 밥을 말아먹고 싶을 정도였다. 거기에다 소고기 채소 볶음 역시 밥도둑이었는데, 밥 한 숟갈에 소고기 채소볶음 한 점씩 올린 후 입에 넣고 우육탕 국물을 살짝 마셔 주면 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장이 설 때마다 새벽 4시부터 여기 아침 먹으러 오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만약 호텔에만 머물렀다면 존재 자체도 몰랐을 그 공간 속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이 그저 감사하게 느껴졌다. 역시 여행은 살아보는 것이다. 그들의 일상 속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그중 하나를 그대로 체험해 보고 즐겨보는 것. 위치는 다소 관광지와 멀어도 내가 현지인 집 숙박을 선호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