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오랜만에 만난 대만, 온천 & 수제 맥주와 파
비 오는 날, 수제맥주와 온천
대만 북동쪽에 위치한 이란현은 온천으로 유명한데,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에 의해 개발되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대만에서도 가장 일본 스러운 풍경을 지닌 곳인데 독특한 점은 산간 지역이 아닌, 평지에서 올라오는 온천이라는 점이다.
이란현의 쟈오시 온천 마을은 마을 곳곳엔 무료로 발을 담글 수 있는 족욕 공간이 있고, 아침 공원 산책 후 족욕하는 것은 이들의 일상인 듯 보였다. 이슬비가 내리는 오전 9시에도, 마을 중심에 위치한 공원에선 어르신들이 족욕을 하며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마을을 돌아다니면, 족욕하며 먹는 라멘집이나 무료 족욕탕이라고 작은 탕을 건물 밖에 배치해 둔 가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이들에겐 땅 파면 온천수인 셈이다.
그래서 이란현의 꽤 많은 호텔에선 물을 틀면, 뜨거운 온천수가 욕조에 콸콸 쏟아져 나오는 프라이빗 온천 시설을 갖춘 객실을 갖추고 있다. 숙박 비용도 대개 하루 5만~10만 원대로 그리 비싸지 않다. 물론 노천탕이 아니란 것은 아쉽지만,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온천물에 몸을 담글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좋았다.
무엇보다 온천욕 하면서 마시는 맥주가 간절했다. 온천욕 하면서 술을 마시는 것은 좋지 않다곤 하지만, 맥주 한 잔 정도는 괜찮잖아? 란 사심으로 예약한 곳이었다. (일반 대중 온천욕에선 맥주를 들고 갈 수 없기 때문에)
온천욕과 함께할 맥주를 사러 호텔 앞 편의점에 갔다. 맥주덕후로서, 어느 나라에 가나 맥주 코너를 흥미롭게 바라보는데 해외 편의점 갈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편의점처럼 편의점마다 구비해 놓은 맥주 브랜드가 조금씩 달라서, 한 번도 마셔보지 않은 맥주를 찾는 재미가 있다.
이 편의점은 그동안 대만 여행하면서 보지 못했던 수제 맥주 캔들이 꽤 있었다. 점장이 새로운 것을 은근 시도하는 타입일까? 토마토와 자두(Plum) 맛의 '고제(GOSE)*' 맥주란 단어에 현혹되어, 그 옆의 '패션후르츠 맛 9.9% 스트롱 에일 맥주'와 함께 구매했다. 다소 실험적인 수제맥주 브랜드인 거 같아서, 실패할 것을 대비해 산토리의 츄하이**도 구매했다. 사실 토마토와 자두맛은 그리 구미 당기는 조합이 아니었는데 '고제'라는 것을 본 순간 "아 이건 사야 돼"하고 집어 들었다.
*고제: 맥주 종류 중 하나로, 레몬과 같은 산미와 소금의 짠맛이 느껴지는 것이 특징. 개성 있는 맛으로, 맥덕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리기도 한다.
**츄하이: 한국의 과일 소주와 비슷한 위상을 가진 과일맛 사케. 호로요이 등이 츄하이에 속한다.
뜨거운 온천수로 가득 채운 욕조 선반에 차갑게 칠링 한 맥주를 두고, 천천히 들어갔다. 일반 욕조와 달리 꽤 깊숙한데, 대중목욕탕 온탕 내 의자처럼 앉을 수 있도록 바닥이 기역자(ㄱ) 형태 층 구분이 되어 있는 모양을 그대로 들고 왔다.( 욕조 밖 ㄱ__(욕조내부)__) <-대강 요런 형태) 한 마디로 나만을 위한 미니 온탕인 셈. 몸을 굳이 눕히지 않아도 어깨까지 물이 차올랐다. 자, 이제 맥주를 따볼까? 온천의 따뜻한 물 때문인 건지, 새로운 맥주를 시도한다는 설렘 때문인 건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와우"
"와우 Wow" 란 감탄사는 긍정적, 부정적인 상황 모두 쓸 수 있지만 대개 기대 이상으로 좋은 것을 경험했을 때 감탄사로 주로 많이 쓰인다. 하지만 이번에 맥주를 한 모금 마시자마자 무의식적으로 나온 나의 와우는 그 반대였다. 기대 이하의 "이게 뭐지?"라고 화들짝 놀라며 반자동적으로 나온 감탄사.
차라리 평범한 대만 맥주를 샀더라면 나의 맥주와 함께하는 온천은 거의 완벽할 뻔했다. 다소 도전 정신으로 선택한 첫 맥주가 따뜻한 온천물로 한층 높아진 내 기대감을 와장창 부숴버린 것이다. 도저히 그 맛이 상상되지 않았던, 토마토와 자두 맛 '고제' 맥주는 아주 정직한 토마토와 푸룬 자두맛을 섞은 맛이었다. 내가 생각한 '고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엔간해선 내 입맛에 맞지 않는 맥주라고 할지라도 다 마시는 편인데, 이건 정말 다 마시기 힘든 맛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이 맥주는 다른 맥주보다 '수제 맥주'란 이유로 가격도 3배 이상 비쌌기 때문에 더욱 실망이 클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 수제 맥주를 출시한 양조장이 어디인가 궁금해서 캔 맥주 라벨 내 브루어리 소개글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기존 고정관념 등을 뒤엎은, 항상 색다른 맛을 추구하고 도전하는 실험적인 양조 브랜드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실험적인'이란 단어의 어감은 참 묘하다. 남들이 하지 않은 새로운 것을 해보고 도전하는 것이란 점에서 긍정적인 이미지가 있으나 음식에 적용하면 한 끗 차이로 '먹을 것으로 장난한다'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물론 사람마다 입맛은 다 다르겠지만, 나에겐 이 양조장의 실험 결과가 맞지 않았다.
온천에 맥주 같은 클래식한 조합을 시도할 땐 괜히 독특한 것을 시도하는 리스크(?)를 감수하기보단, 그냥 카스 같은 시원한 라거 맥주를 마시는 게 정답인 걸로.
아침으로 먹은 '파' 파이
이란현을 돌아다니다 보면 '삼성파 三星葱(산씽총)'가 붙은 노점상이나 식당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란은 온천 이외에도 '파의 고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파가 주요 특산물인데, 이란의 명품 파 브랜드명이 바로 삼성파인 것이다. 첨단 산업을 주도하는 '삼성'과 1차 농업의 산물인'파'의 조합이 묘하게 이질적이었지만, 이 이름 덕분에 대만의 유명한 파 브랜드 이름 하나는 제대로 외웠다.
어렸을 땐 파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어른이 되고 나서 우연히 알게 된 '파기름의 위력'으로 파에 대해 호감인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음식에 들어간 파를 곧잘 집어 먹는 편은 아니고, 볶은 파 특유의 향과 맛, 즉 풍미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곳에 파가 들어간 간식들이 많다고 하니 갑자기 호기심이 일었다. 결국 이란현의 파 간식을 보이는 데로 다 사 먹어보기로 했다.
첫 번째로 먹은 것은 우연히 구글 이미지를 보고 "이거 내일 아침으로 먹어야지"하고 결심했던 파 파이(葱派)였다. 달팽이처럼 돌돌 말려 있는 튀긴 파이 같은 느낌인데, 온라인으로 퀵하게 찾아봤을 땐 옛날엔 이 일대에서 이렇게 생긴 파파이를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요새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내가 방문한 곳은 노점이 아닌 깔끔한 신식 인테리어의 가게였는데, 음식점이나 간식거리를 팔만한 외관이 아니어서 모르고 가면 그냥 지나칠 법한 곳이었다.
파파이 쿠킹 클래스가 주 비즈니스인 건지, 공간의 절반이 클래스를 위한 테이블과 도구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여기서 파 파이 사 먹을 수 있는 게 맞나? 긴가민가했는데 메뉴판이 보였다. 파 파이와 함께 아침이니 또우쟝(豆浆 중국식 두유, 콩국 같은 개념)을 주문했다. 따뜻한 또우쟝을 원했는데 차가운 것만 판다고 해서 아쉽지만 그걸로 대신해야 했는데, 막상 파 파이를 받고 보니 아 왜 차가운 또우쟝을 파는지 이해가 갔다.
따뜻한 파 파이를 한 입 베어 물면 파가 한가득 들어가 있었다. 얼마나 많이 들어 있었냐면 파즙이 마치 고기만두의 풍부한 육즙처럼 느껴질 정도. 살짝 뜨거운 편이었지만 혀가 데일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차가운 또우쟝이랑 함께 파의 열기를 살살 식혀가며 먹는 맛이 있었다. 돌돌 말려 있는 탓에 양도 상당했는데 먹다 보면 파가 물릴 수 있다. 마침 테이블 위엔 다양한 소스들이 놓여 있었고 취향껏 칠리, 간장 등 소스를 얹어 먹으면 된다. 튀긴 건데 어쩜 이렇게 안 느끼하고 담백한 거지? 하면서 감탄하면서 먹었는데, 다시 이란에 간다면 꼭 다시 한번 먹어보고 싶은 간식이다.
야시장에서 쓸어온 파 간식 시리즈
쟈오시 온천 마을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뤄동이란 지역이 나온다. 같은 이란현이지만 뤄동을 방문하기 위해선 쟈오시 온천 마을에서 이란역까지 기차나 버스를 타고 가서, 여기서 또 뤄동으로 가는 기차를 타야 했다. 물론 약 30분~1시간 정도 걸리지만, 비 오는 날 여러 교통수단을 갈아타는 것은 꽤 번거로운 일이다. 무엇보다 기차나 버스 배차 간격이 길 경우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뤄동을 간 이유는 야시장 때문이었다. 야시장이야 어느 지역에 다 있지만, 뤄동 야시장은 대만 동부의 최대 야시장이자 대만의 전국 5대 야시장으로 꼽힌다. 무엇보다 뤄동 야시장엔 삼성파를 활용한 각종 파 간식들이 풍부하다고 하니, 오늘 저녁은 딱 야시장에서 파 간식 잔뜩 사서 호텔에서 먹어야겠다 결심했다.
뤄동 야시장은 타이베이의 스린 야시장을 연상케 했는데 단순 먹거리부터 각종 옷가게부터 잡화, 전자 제품까지 다양한 점포들이 모여 있었다. 이날도 역시 비가 내리는 통에 우산을 쓰면서 야시장을 걸어야 했는데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많아 우산끼리 부딪치는 게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야시장에 가서 사람들이 많이 줄 서 있는 곳은 무조건 함께 줄 서보는 편인데 그렇게 이날 야시장 1시간을 탐방하면서 구매한 것은 파 튀김만두(三星葱饼), 파+고기 꼬치(三星葱肉串), 파 샤오롱바오(三星葱爆浆)였다. 생각보다 많이 메뉴들이 겹치는 게 많아 3종류만 샀는데, 내가 사 온 이 세 점포 모두 줄이 길어서 각각 기다리다 보니 1시간이 훌쩍 지나가있었다.
첫 번째로 구매한 건 파 튀김만두인데 노점상에 붙은 건 총삥(흔히 중국식 튀긴 파전 같은 느낌)이라고 되어 있어서 오잉? 했던 곳이다. 직접 만든 피로 만들었다는 걸 강조하는데, 개당 35위안(약 1300원 내외)이었다. 왕만두 사이즈이고 방금 따끈따끈하게 튀긴 거라 걸으면서 먹을까 충동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비 오는 날 우산 들고 사람들에게 부딪쳐 가며 손에 든 만두를 먹고 싶진 않아 꾹 참았다. 이후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먹었는데 식었음에도 진심 감탄했다. 파와 다진 고기가 잔뜩 들어있는데 파즙과 찐 육즙이 얇은 튀김피안에 가득 차있다. 마치 빵 중에 빵 피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앙금이 가득한 빵이나, 밥의 양이 적은 김밥을 연상케 한다.
그다음으론 가장 많이 보였던 파+고기 꼬치. 파들을 베이컨 혹은 얇은 고기로 감싸 꼬치 형태로 구운 것이다. 굽는 데 시간이 꽤 걸려 줄이 계속해서 길어졌던 곳이었는데 한 15분 기다려 드디어 내 차례가 왔을 때 앞에서 내가 주문한 꼬치 위에 매운 양념 (매운 정도를 어떻게 할지 묻는다)을 슥슥 바르는데 올라오는 냄새에 넋 놓고 사진을 찍었다.
먹어보지 않아도 이건 틀림없는 맥주 안주라고. 3개 시킬 걸, 괜히 2개만 했나 살짝 후회가 됐다. 이제 와서 주문을 수정할 수 없는 노릇. (이미 다른 사람들이 주문한 꼬치들이 철판에 올라온 상태였다) 1개 구매하면 40위안인데 3개 구매하면 10위안을 깎아주는 데는 이유가 있다. 물론 많이 판매하기 위한 전략이지만 이 파+고기 꼬치는 한 번 맛보면 최소 3개는 먹어야 할 그런 맛이다. 맥주 1캔만 먹을 계획이었는데 츄하이를 1캔 더 먹게 만든 장본인.
마지막으론 파가 잔뜩 올라간 샤오롱바오. 샤오롱바오 위에 파를 잔뜩 올린 모양이다. 뤄동 야시장에서 파 튀김만두와 파+고기 꼬치 판매하는 노점상이 제일 많아 다른 파 간식을 찾아 헤매다 마지막에 발견했다. 이곳의 전매특허 메뉴인 듯했다. 줄이 생각보다 많이 길지 않아서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배달 주문이 꽤 밀려 있었다. 느끼할 수 있는 샤오롱 바오 육즙을 파가 상큼하게 중화시켜 준다.
사실 엄청나게 특별하다기 보단 평범한 샤오롱 바오에 파를 뿌려 먹는 맛이지만, 옛날에 자주 먹었던 '파닭'같은 원리라고 할까? 그냥 평범한 치킨 위에 파를 올렸을 뿐인데 당시엔 이틀에 한 번 꼴로 파닭을 시켜 먹었을 정도로 좋아했었다. 돌이켜보면 '파'는 생각보다 존재감이 꽤 대단한 야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