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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Feb 10. 2023

새벽 1시, 호텔방이 흔들렸다.

09.오랜만에 만난 대만, 화롄 지진 & 무료 컵라면

술에 절인 삶은 달걀과 기차



대만 동부 지역에 위치한 화롄은 타이루거 협곡 등으로 유명한 관광도시다. 대만의 현 중엔 가장 넓지만, 인구수가 가장 적은 곳이다. 그래서 화롄의 첫 인상은 호텔이나 각종 관광 관련 인프라가 잘되어 있었는데 이란 현처럼 일본 느낌이 강한 곳이다. 대만 친구 말에 의하면 옛날 신혼 여행이나 수학 여행 등으로 화롄에 많이 방문했다고 하니, 우리나라로 치면 경주와 비슷한 위상을 가진 오래된 관광 도시라고 볼 수 있겠다.


사실 동선상 대만 남쪽을 여행하고 화롄까지 오는 건 상당히 비효율적인데, 어차피 대만 이란현을 가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이란현을 조금 더 지나 화롄까지 한 번 찍어보기로 결심했다. (만약 대만 여행을 결심한다면 나 같은 동선은 그리 추천하지 않는다) 가오슝에서 타이베이까지 가서, 타이베이에서 다시 화롄쪽으로 내려오는데 총 소요시간은 갈아타는 시간 등까지 고려해서 대략 5시간 예상되었다.


그런데, 가오슝에서 타이베이 방향으로 올라가는 기차 대신, 엉뚱한 기차를 타고 대만 최남단 종점역까지 도착해 버린 것이다. 심지어 짧은 시간도 아니고 1시간 넘게 탄 상태였다. 지하철도 아니고 기차를 역방향으로 타다니. 그 와중에 기차를 타고 종점역 도착 안내 방송이 나오기 전까지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니. 창밖으로 펼쳐진 파인애플 밭이 끝없이 펼쳐진 광경을 넋놓고 보다가 이 사단이 난 것이다. (대만 남쪽의 특산물은 파인애플인데 살면서 그렇게 광활한 파인애플 밭을 본 적이 없어서 신기했다)

소흥주단 - 소흥주란 술에 절인 삶은 계란

결국 온 방향대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했고, 오후 6시 도착 예정이었던 화롄에는 오후 9시가 되어서야  대착했다. 기차 때문에 점심과 저녁도 거의 못먹었는데, '술을 넣고 삶은 계란(소흥주단 紹興酒蛋) 두 알을 기차에서 먹은 게 다였다. 찻물에 간장과 향신료를 넣고 졸인 삶은 달걀인 '차예단 茶叶蛋'은 익숙한데 술에 절인 계란은 처음이었다. 타이난 친구가 어렸을 적 간식으로 종종 먹었다며 맥주를 구매할 때 사서 내가 떠날 때 가는 길에 요깃거리라도 하라며 챙겨준 간식이었다. 계란은 뜯자마자 술 냄새가 확 났는데 막상 한 입 베어먹어보면 술향이 나는 삶은 계란이었다. 어찌 됐건 정오부터 밤 9시까지 난 이 삶은 계란만 먹은 상태였고, 호텔로 도착하니 녹초가 되었다.


컵라면과 각종 간식이 무료로 제공되는 호텔

호텔 체크인을 얼른 하고 밖으로 나가 야식 거리라도 사 먹을 계획이었다. 방 키를 주며 안내 사항을 친절하게 알려주던 직원은 "저기 스낵바는 24시간 오픈되어 있고 콜라와 간식, 라면 모두 무료로 먹을 수 있다"라고 알려주었다.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해서 직원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는데 대형 스크린 화면이 설치되어 있고 그 앞에 쇼파, 다양한 형태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쇼파에 편히 앉아 영상을 보거나 내일 여행 계획을 짜며 라면을 먹는 게스트들이 보였다. 물론, 그 곳에 쌓여있는 컵라면과 간식, 콜라 등은 방에 들고 가서 먹어서는 안된다. 별도 조식 서비스가 없는 대신, 24시간 스낵바를 개방하는 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화롄에 오는 사람들 중 일부는 아침 일찍부터 체크아웃하고 트레킹을 떠나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에 조식을 없애고 24시간 스낵바를 제공함으로써 나름 호텔 서비스의 구색을 맞추는 느낌이랄까.

공짜 컵라면은 못 참지

방에 짐을 두고 다시 로비로 내려왔다. 24시간 스낵바이고 대만 컵라면도 3~4종류 쌓여 있었다. 개인적으로 소포장된 간식들 가짓수가 상당히 많아서 인상적이었는데 마치 어렸을 적 초등학교 문구점에 파는 불량식품 진열대를 보는 느낌이랄까? 


거의 15가지가 넘는 가짓수가 있었고 캔음료도 콜라 이외에 우리나라 피크닉 같은 오렌지 주스, 포도 주스 등 꽤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처음엔 그냥 구경만 하고 밖에 나가서 꼬치 종류를 사와서 맥주와 함께 먹을 예정이었는데 로비에서 다들 컵라면을 야무지게 먹고 있길래 결국 홀린 듯이 컵라면 하나를 집었다.


뜨거운 물을 붓고 기다리는 동안 숙소 옆에 있는 세븐 일레븐으로 달려가 캔맥주를 사서 라면 기다리는 동안 맥주 한 모금을 마시니 하루 이동하느라 누적된 피로가 풀리는 듯 했다. 맛이 궁금해서 들고온 주전부리들을 테이블에 펼쳐 놓고 하나하나 맛보는데 의외로 맥주 안주들로 제격이었다. 결국, 편의점 4캔 행사 (대만에서도 한국처럼 편의점에서 4개 구매시 할인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에 홀려 구매한 맥주 4캔 중 2캔을 로비에서 까버렸다.


호텔방에서 맞이한 생애 첫 지진의 공포


다음날은 화롄 1일 투어 상품을 이용할 예정이다. 뚜벅이 여행을 선호하고 대개 하루만에 여러군데를 다니는 투어 상품을 이용하지 않는 편이다.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예스진지 (요새는 예스폭진지 등 투어들이 다양해진 것으로 안다) 투어도 굳이 하루 안에 해결하기 보다 느릿느릿 한 군데씩 가는 여행을 선호했는데 화롄에서 1일 투어를 예약한 것은, 화롄은 그 뚜벅이조차 용납(?)이 안될 정도로 대중 교통 인프라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타이루거 협곡이외에도 화롄의 명소로 나와 있는 곳은 국도 한복판에 덩그러니 있거나, 차로만 갈 수 있는 경우가 많아서 불가피하게 1일 투어를 예약했다.


투어 시작 시간은 다음날 아침 8시. 내일 아침도 먹어야 하고 얼리 체크인을 해야하므로 오늘은 일찍 잘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항상 오전 1시가 넘어서야 겨우 자는 올빼미 체질이란 점. 이럴 땐 보통 맥주나 술을 먹고 일찍 잠을 청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시간을 보니 아직 11시. 남은 맥주캔을 뜯으며 영화를 틀었다. 보다가 졸리면 언제든지 잠들 요량으로.


일찍 자야돼란 강박증이 생기면 오히려 더 잠이 오지 않는다. 이 날도 유독 그랬다. 영화 한 편 끝나기 전에 내가 자고 있겠지란 기대를 했는데 영화가 생각보다 재밌던 게 화근이었다. 몇 모금 남지 않은 맥주캔을 협탁에 두고, 잘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엄청 어지러웠다. 맥주에 취할 내가 아닌데, 왜이렇게 어지럽지해서 몸을 일으켰는데 방이 흔들리고 있었다. 한 5초간 여전히 혼란스러웠는데 내가 흔들리는 건지 방이 흔들리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가쪽 테이블 위에 올려둔 과자들이 테이블에서 떨어지는 걸 본 후에야 상황파악이 됐다. "아 이거 지진이다" 그와 동시에 스마트폰엔 국가급 경보 알림이 울렸다.  

지진 경보 알람

순간 진동이 무섭게 사라졌다. 진동 지속 시간은 약 20초~30초였던 거 같은데 살면서 처음 겪어보는 지진이었다. 한국에서도 예전에 경주/포항 일대 지진으로 인해 서울에까지 진동이 왔다는 뉴스가 있을 때도 당시 난 아무것도 못느꼈었다.


순간 진동은 사라졌지만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잠들려고 노력한 것이 허사가 되었고, 진동이 멈춰 있는 동안 구글에 재빠르게 대만 지진 현황을 검색하니 약 5.1 진도였다. 국가별로 진도 계급이 다르지만 어찌 됐건 5도 이상은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수준이라고 한다. 지진 관련 대처 훈련을 책으로만 접하고 몸소 해본 적이 없어서 머리가 하얘졌다. 밖으로 뛰어 나가야 하나? 혹시나 해서 문을 열어봤는데 바깥 세상은 너무 고요했다. 시간은 거의 새벽 1시가 다되어 가고 있었는데 만약 내가 깊이 잠들었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한 20분동안 가만히 방을 주시하다가 일단 1층으로 내려가봐야 겠단 생각을 했다. 혹시나, 호텔 방음이 너무 잘되서 나 빼고 다 내려가있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셉션에도, 로비 그 어디에도 사람들은 없었고 눈에 들어온 것은 24시간 스낵바였다. 이 스낵바는 조식 대용이 아니라, 지진 등을 대비한 일종의 비상 식량 개념인건가? 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진에 놀란 가슴으로 달려간 컵라면 코너

혹시 모르니 컵라면 한 개를 들고 다시 방에 들어갔다. 만에 하나, 지진으로 인해 타국의 엄한 호텔방에 갇혀 굶어 죽는 일은 없어야 할테니 말이다. 다행히, 이후 지진은 없었고 새벽 2시까지 뜬 눈으로 아무 드라마나 보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지진을 경험하고 마주한 절경


지진에 놀란 가슴으로 잠들었음에도, 아침 7시가 되니 "아침밥" 생각이 간절했다. 마치 어제 지진은 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이 들어 폰을 확인하니 지진 경보 메시지가 한 차례 더 와있었다. 어제 지진 진동이 한 번 더 있었긴 했나보군.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대강 씻은 후 짐을 싸고 아침밥을 먹기 위해 나섰다. 도보 5분 거리 내에 있는 아침 식당에서 딴빙(蛋饼 계란전)과 따뜻한 또우쟝(豆浆 콩물, 두유)을 먹는데 만족스럽다.

딴빙과 또우쟝 조합은 절대 실패 불가한 아침

아침이 맛있으니 오늘 하루의 예감이 좋다. 전화위복이라고. 어젠 하루 종일 피곤하고, 살짝 멘붕 등을 겪으며 정신이 없었지만, 오늘은 그 반대가 되리라. 내가 아침을 꼬박 꼬박 챙겨 먹는 이유도 이러한 '의식'을 위함도 있다. 하루를 긍정적인 암시로 시작함으로써 그 방향으로 굴러가게 하는 것. 미라클 모닝이 별건가. 오늘 하루에 대한 기대감으로 긍정적인 시작을 연다면 설사 늦게 일어난다하더라도 평범한 하루를 특별하게 굴러가도록 만들 것이고 이게 곧 기적인 셈이다.


아침을 먹고 느긋하게 걸어오는데 호텔 앞에 이미 투어 차량이 도착해 있었다. 부랴부랴 방으로 달려가 캐리어를 끌고 내려와 버스에 실으며 픽업하러 온 가이드에게 "혹시 어제 지진 느끼지 않았냐"라고 물었다. 가이드는  "몰랐는데 있었다고 들었다"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더니 "화롄은 원래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이라, 그리 놀랍지 않다"며 고개를 으쓱였다.


차 안엔 약 대만인 혹은 중국인 여행객 4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비슷한 반응이었다. 재미난 것은 이후 다음 숙소를 돌며 픽업한 싱가포르 여행객, 태국 여행객 모두 탈 때 마다 "어제 지진 못 느꼈냐"라며 호들갑을 떨었고 나 역시 그 스타트를 끊은(?) 투어차량 내 첫 외국인으로서 그들을 맞이해주었다. 그 순간만은 너무나 무서웠던 지진 경험담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도 대화의 물꼬를 트는 꽤 좋은 소재로 전락했다.

협곡이나 산은 아무리 사진을 열심히 찍어도 잘 안담긴다.

이날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화창했고, 이 날 나는 약 4군데 화롄의 협곡을 포함한 절경을 들렀는데 전날 겪은 지진이 마치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모든 게 평화로웠다. 지진은 자연 재해 앞에선 사람은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미물에 불가하구나라고 다시 한번 상기시키며 겸허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대자연이 만들어낸 말도 안되는 풍경을 자랑하는 타이루거 협곡과 폭발하듯이 치는 바다 파도를 볼 때 숨막힐 것과 같은 감동이 더 크게 밀려왔다. 어쩌면 전날 지진은 화롄 절경에 대한 더 큰 감동을 이끌어 내기 위한 화롄만의 빌드업 전술이 아니었을까.


정말 눈 앞에서 파도가 '터진다'라는 표현이 맞았던 화롄 바다. 마치 지구의 열을 잔뜩 받은 에너지가 느껴지는 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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