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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피터 Jul 13. 2021

인어공주

브런치 프로젝트 3.

인어공주는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슬라브 신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동화 형식으로 각색한 작품이라는 설이 있다. 그 시대 상황에는 특이하게도 안데르센은 성소수자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상황이 이 이야기 속에 작가 자신의 고뇌를 투사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결말을 다루는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어린이들에게 더 많이 읽히고 있는 이 동화는 사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할 수도 있다. 지금 시대는 어떠한 사랑도 이별과 엇갈림에서 자유롭지 않은 시대이다. 그렇게 많이 거슬러 올라가지 않은 과거에는 자유연애 자체가 지금처럼 그렇게 쉽게 허락되는 삶의 부분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시대에는 만남과 마찬가지로 헤어짐도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결혼이라는 하나의 결승점을 통과한 이후에는 늙어 죽을 때까지 부부의 연을 유지하는 것이 보통의 삶의 문법이었기에 우리는 많은 옛날이야기에서 그 이후 둘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결론을 읽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시대와 상황이 모두 변했다. 산업의 기반이 변화하여 더 많은 여자들이 일자리라는 삶의 전쟁터로 나아가게 되면서 여성들도 자신의 삶을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선택권을 얻게 되었다. 남자들도 더 이상 자기 혼자 가정의 모든 경제상황을 책임지면서 죽을 때까지 일만 해야 하는 상황을 거부하고 홀로 독립하여 살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받았다. 이제는 예전과 다르게 황혼이혼이라는 말도 더 이상 생소한 말이 아닐 정도로 삶을 살면서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져 각자의 길을 혼자 걸어가는 것이 더 이상 특별한 상황이 아니게 된 것이다. 즉 이별과 엇갈림이 우리 인생에서 이제는 거의 상수가 되어 버렸다. 이제는 어떤 사람이든 인생에서 한 번 이상의 사랑의 종말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고 이 인어공주는 그런 상황을 이야기하는 동화이다.


우리는 인생의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자신과 너무도 다른 어떤 존재와 사랑에 빠질 수 있다. 그 생소함이 강한 끌림으로 작동하여 사람은 사랑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미숙한 경험으로 인해서 그 사랑에 어떻게 다가서야 할지를 모르고 방황하고 당황하게 된다. 그다음에는 자기보다 이 상황을 더 잘 아는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하게 되고 그런 상황에서 받게 되는 조언들은 대개의 경우 부정적인 것들이 많다. 인어공주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현실에서 마녀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학벌, 혈액형, 재력, 친구관계, 심지어는 고향까지 들먹이면서 사랑의 위험을 당신에게 경고해 주지만 이미 사랑에 빠진 인어공주는 그 이야기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럼 어쩔 수 없이 사랑을 위해 인어공주는 그 사람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마녀는 인어공주의 목소리를 대가로 하여 공주의 꼬리를 다리로 변하게 해 줄 마법을 선사해 주지만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는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상당하다. 사랑을 이루기 위해 인어공주의 꼬리를 다리로 바꾼다는 말은 인어공주 본연의 모습을 감추고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나의 모습을 꾸민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목소리를 잃는다는 것은 가장 본질적인 소통의 수단이 완벽하게 차단된다는 이야기다. 사랑은 독점적 관계이다. 상호 독점적 관계에서 우리는 상대에게서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얻어야 하고 상대 또한 나를 통해 자신이 얻고 싶은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관계가 건강하게 지속될 경우에만 사랑은 유효한 것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삶의 스토리가 하나로 겹쳐진 상황에서 삐거덕거림은 그 자체로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이 불협화음을 조율하기 위해서 우리는 소통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젊은 날의 사랑은 대부분의 경우 자기 자신도 잘 모르고 자신의 상대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자신의 미숙함과 그 미숙함을 인정하고 상대에게 더 진실되게 다가갈 용기 없음으로 인해서 결국에는 관계의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 미스 커뮤니케이션이 결국 인어공주처럼 엇갈림을 만들어 우리는 헤어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관계의 파국에 도달하게 되면 우리는 또 수많은 조언자들을 얻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인어공주의 자존심을 세워주면서 상대를 저주하는 것으로 사랑을 지우고 다음을 준비하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하나의 종결자 그리고 판사가 되어 상대를 죄인으로 만들고 그를 단죄함으로써 인어공주의 무너진 이야기와 정체성을 다시 살려주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그런 충고를 따르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 우리는 관계가 흔들릴 때 객관이라는 이름으로 외부자를 둘 사이의 관계에 끼워 넣어 적은 정보를 바탕으로 누가 잘못된 것인지 판결을 해달라는 주문을 많이 한다. 그런데 그런 판결로 과연 두 당사자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판결로 잘잘못을 따지는 것으로는 이미 벌어진 관계의 틈은 메워지지 않는다. 우리의 관계가 벌어지고 있을 때 필요한 것은 당사자 간의 긴밀하고 진실한 소통이다. 그리고 제삼자가 정말 필요하다면 그것은 판사가 아니라 통역사가 필요하다. 남녀 간의 서로 다른 언어를 상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주는 그런 통역사가 관계의 삐걱거림을 어느 정도 교정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결정은 본인들의 몫이다. 외부에서 무슨 말을 하던 최종 결정은 결국 본인이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 삶과 사랑의 본질이다. 이미 너무 많은 오해가 쌓이고 서로의 마음이 어긋난 이후에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관계의 종말을, 사랑의 종말을 받아들이고 인정을 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가 상대에게 취할 수 있은 태도로 바람직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힌트를 인어공주는 보여주고 있다.


사랑이 깨어진다고 해서, 깨어진 사랑의 마지막이 항상 씁쓸하다고 해서 우리가 함께 한 사랑의 시간 자체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 누군가의 잘못으로 인해 이별한다고 하더라도 많은 경우 내가 사랑한 상대편이 일방적으로 ‘악’인 경우보다는 미스 커뮤니케이션이 싸여서 결국에는 마음이 멀어진 경우가 더 많다. 그럴 때 우리가 이제 소멸하여 사라지는 사랑 앞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하고 품위 있는 태도는 결국에는 인어공주의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실패한 이후 홀로 남겨지는 것은 항상 비참하고 비루하다. 그렇지만 그런 자신의 비참함을 조금이라도 무마하기 위해 상대의 몰락과 불행을 바라는 것은 사실은 더욱더 자기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행동이 아닐까? 어느 순간 인생의 다른 장면에서 다시 만날 때 반가운 인사는 아니더라도 서로 눈인사는 하면서 지날 수 있도록 그냥 상대의 행복을 빌어주고 나는 나의 행복을 찾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지난날의 사랑에 대한 예의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깨어질 땐 지난 모든 시간이 의심스러워진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진정시키고 보다 냉정하고 차분하게 자신의 지난 사랑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어공주의 이야기를 보면서 한번 차분히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결국 그것이 나의 자존감과 정체성을 지키는 가장 품위 있는 선택이 될 수도 있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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