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게 부패하기 위해서
요통의 급성기가 막 지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멘토처럼 생각했던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그래서 요즘 입맛은 어때?”
“잠은 잘 자고?”
“기상시간은 규칙적이니?"
언니는 한 다리 건너 알게 된 사이로 굳이 속을 보일 만큼 친하지는 않은 사이. 그런 언니가 내가 아팠다는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전화를 한 것이다. 육체적 건강보다 정신적 건강 지표를 물어보는 걸 보니, 괜히 걱정하게 만든 것 같아서 민망한 마음에 씩씩하게 답했다.
“언니 저 진짜 괜찮아요! 잘 이겨낼 거예요.”
갑자기 언니가 목소리를 높인다.
"야, 몸이 아파서 공부 때려치운 지 얼마 안 됐잖아? 아니 시발, 힘들어야 당연한 거지. 왜 억지로 이겨내려 해? 닥치고 넌 그냥 아프기만 해!”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가족들에게도 지인들에게도 아무렇지 않다고 말했지만, 불현듯 통증이 찾아올까 봐 불안했지만, 앞으로의 내 모습이 불투명해서 막막했지만. 누구나 겪는 그런 과정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다보다. 다 억지였나 보다. 언니의 "넌 아프기나 해!" 그 한 마디에 눈물콧물이 범벅되는 걸 보니.
포도는 여름 중반이 되면 익기 시작한다. 완숙되지 않은 포도는 떫고 셔서 누구에게라도 먹기에 매력적이지 않은 과일. 그러나 완숙되기 시작하면 과육에 수분이 증가하고 산도는 떨어지며 당분은 올라간다. 당연히 이때 수확해야 하지만 수확시기는 까다로운 일이다. 수확기 직전에 폭우가 내리면 포도에 수분이 증가하여 묽어져 버리고, 일조량이 많으면 너무 익어버려 알코올 함량이 높아져 버리니까.
날씨에도 이렇게 영향을 받는 게 포도인데, 하물며 곰팡이균의 공격을 받은 포도는 어떨까?
보트리티스 시네레아(Botrytis Cinerrea)균은 포도가 익을 무렵 껍질에 번식한다. 이 병에 걸린 포도는 껍질에 구멍이 뚫려 수분이 빠지고 쪼글쪼글해진다. 썩은 것처럼 보여 차마 손이 가지 않는 비주얼이다. 그러나 모험정신 강한 누군가가 곰팡이 핀 포도를 먹어 본 모양이다. 외관과 달리 내부는 당분과 산도가 농축되어 엄청나게 달다.
그 단 맛에 매료되어 곰팡이 핀 포도로 와인을 만들기까지 이르렀을 테지. 이렇게 만들어진 와인은 보통의 와인에서 느낄 수 없는 강한 풍미를 가진단다. 그 맛은 가히 압도적이어서 불자도 천국을 보게 하고, 기독교인도 염불을 외게 할 정도라고. 세계적 명품에 속하는 와인에 속하는 스위트 와인은 대부분 이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그렇다면 포도를 보트리티스에 걸리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아침에 습하고 옅은 안개가 껴야 한다. 곰팡이가 생장 및 번식을 위한 조건이다. 오후에는 따뜻하고 건조한 날씨로 곰팡이 생장을 억제하여 포도 손상이 없어야 한다.
위와 같은 기후 환경이 조성되어도 곰팡이균에 걸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포도 품종이 곰팡이균에 취약해야 하기 때문이다. 껍질이 얇아서 쉽게 구멍이 잘 뚫려 쪼그라들어야 하니까. 포도 송이도 촘촘해서 공기가 잘 통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곰팡이에 강한 품종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이 양질의 스위트 와인을 만나지 못하고 살았겠지.
이처럼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서 병에 걸린 포도, 이것으로 만드는 와인을 우리는 귀부(貴腐) 와인 즉, 귀하게 부패한 와인이라 부른다.
언니는 술을 한 잔도 못 마시지만 이혼하면 뽀지게 술을 마실 거라 장담하곤 했다. 벌써 언니와 통화한 지 1년이 넘었다. 언니와의 통화 덕분에 이제 나는 이겨내려 하고 있지 않다고,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귀부 와인을 사들고 놀러 가겠다고, 이혼은 아직이냐고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