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한창이다. 꽃망울이 부풀어 터지고 앞다투어 꽃이 피어난다. 봄 햇살을 받은 꽃망울은 봉오리를 뾰족이 내밀며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바람이 살랑거리자 먼저 핀 흰 꽃잎이 눈부신 햇살에 은빛 광채를 수놓은 듯 농숙하다. 목련 꽃그늘 아래로 바투 다가선다. 방금 떨어진 꽃 한 송이를 줍는다. 꽃잎에 생명이 있는 듯 내 손에 그리움이 아스라이 전달되어 온다. 수십 년 전의 그날처럼.
중학교 2학년 첫날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니 학교 분위기가 들떠 있었다. 새로운 친구와 선생님 모든 게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다. 짝꿍이 된 친구와 나는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키 작은 나는 앞쪽에 앉았고 중간쯤 어딘가가 그녀 자리였지만 일 년 동안 한 번도 말을 섞어본 적이 없었다. 키 순서를 정하던 날 아는 친구라곤 없던 차에 면이 있던 그녀가 내 옆에 섰고, 짝이 되었다. 나는 일 년 사이에 키가 훌쩍 컸던 것이다.
그녀는 첫인상이 예뻤다. 늘 웃는 모습이었다. 뾰족한 송곳니가 앞니 위에 살짝 올라붙은 모습이 매력 포인트였다. 표정 없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면 함박꽃처럼 웃는 그녀 따라 슬그머니 나도 웃게 되었다.
4교시가 끝나면 교내 방송에서는 음악을 틀어주었다. 그녀와 나는 노는 시간마다 도시락을 다 비웠고 점심시간엔 운동장을 배회하면서 음악을 들었다. 감미로웠다. 『긴 머리 소녀』 『일기』 『조개껍질 묶어』 『연가』등을 따라 부르다가 약속이나 한 듯이 목련 꽃그늘 아래 나무의자에 앉았다. 목련 꽃이 여기저기서 한 송이씩 툭 툭 떨어졌다. 그녀는 방금 떨어진 꽃 한 송이를 주워서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때 흰 칼라의 교복을 입은 하얀 얼굴의 그녀가 단아한 한 송이 목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꿈은 작가였다. 문예반에서 창작한 시를 감정까지 실어서 내게 들려주었다. 어떤 날은 수업 시간에 자신의 시를 낭독까지 했다. 문학은 먼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나는 가슴이 벅찼다. 어느 날 그녀가 내게 하루에 한 페이지씩 소설을 써서 바꿔 보자고 했다. 자신이 없었지만 용기를 내어 글을 썼다.
그녀가 쓴 글을 읽었다. 글 속의 주인공은 그녀의 평소 맑은 웃음과 달리 우울하고 소외된 아이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들어온 새엄마가 구박하는 이야기며 자상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부턴가 무관심해졌다는 글을 읽는데 어느새 내 눈에서 눈물이 맺혔다. 글을 읽고 눈물을 흘린 적은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친구가 쓴 소설을 읽고 글 속에 나오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미워하게 된 것도 그때였다.
새 학기가 한창 익을 무렵 학교에서는 ‘교내 합창 경연 대회’가 있었다. ‘합창 대회’가 열리는 전날, 우리 반은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서 연습에 몰두했다. 학교는 온통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사방팔방으로 울려 퍼졌다. 옆자리의 그녀와 눈빛도 맞추고 입모습도 예쁘게 모으며 잡은 손에 힘도 가했다. 마주 보고 노래를 부르는데 저절로 웃음이 났고 행복했다.
학교를 파하고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오면서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우린 대학생이 되고 아줌마가 되고 할머니가 될 때까지 글을 쓰고 담소를 나누고 우정을 쌓자는 말도 했다. 정류장에서 헤어짐이 아쉬워 그녀가 타고 간 버스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오랫동안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비보를 들은 것은 다음날 아침 등교하면서 학교의 정문에서였다. 한 반 친구가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난 무슨 소리냐며 그럴 리 없다 아침부터 농담하지 말라며 뾰로통한 얼굴로 교실에 들어섰다. 교실 분위기가 침울했다. 엉엉 우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책상을 두드리는 친구까지 교실은 그야말로 야단법석이었다.
학교를 파하고 교문을 나서는데 비보를 전해준 친구에게서 노트 한 권을 받았다. 새엄마와 아버지에게 들켜 구타를 당하고 동구 밖으로 나간 이야기를 시작으로 노트 한 권을 거의 다 채웠다. 흐드러지게 핀 목련꽃 사이로 보이는 보름달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좋았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녀는 너무나 일찍 세상을 등졌다. 성급하게 꽃을 떨어뜨리던 목련처럼 한창 예쁘고 아름다운 나이에 세상을 버린 것이다. 봄이 오고 목련꽃이 필 때면 언제나 그녀가 그립다. 그녀가 살아있다면 좋은 글벗으로 남아 있었을 텐데. 아줌마가 되고 할머니가 될 때까지 글을 쓰자고 했던 그녀가 너무나 야속하고도 그리운 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