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사랑법

사랑하는 방식에 정답이 있을까요?

by 배꽃

오래전 여고생 때였다. 학교에서 귀가하던 길이었다. 앞서가던 여자가 나를 힐끗 쳐다봤다. 세련된 외모에 훤칠한 키가 눈에 띄었다. 짧은 스커트에 높은 구두를 신은 여자는 흰 꽃무늬 스카프에 옅은 보라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탄광촌에서는 찾기 어려운 박꽃 같은 하얀 얼굴의 그녀는 금세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아버지가 광부였던 우리 집은 회사에서 마련해주는 사택에서 살고 있었다.


사택은 집 한 채에 두 가구가 살고 있었다. 옆집을 건너 우리 집 앞에 도착해 대문 손잡이를 잡으려고 할 때였다. 인기척 소리에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였다. 골목 입구에서부터 나를 따라왔다고 했다.

그녀는 서울 토박이였다. 서울에서 태어나 E여대 경영학과를 나온 신여성이었다. 무남독녀였으며 부모님 밑에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부유하게 살았다. 아버지가 경영하는 회사를 물려받기 위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직원으로 채용되어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하는 태도와 행동하는 모습에서 능소화의 품위가 드러났다. 커피를 마시는 도중에도 흐트러진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하얀 칼라의 까만색 교복을 입고 있던 나는 단아하고도 성숙된 그녀의 모습이 부러웠다. 사투리 쓰는 내 투박한 말과 달리 서울말 쓰는 그녀의 살가운 목소리에 애교가 넘쳐났다. 그런 그녀가 한 남자의 이름을 내뱉으며 아느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집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남자의 집에 도착한 그녀는 집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탄광촌의 사택은 그야말로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남자가 태어나서 살고 있는 흔적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남자는 키도 크고 인물도 좋았지만 예의 바른 청년이었다. 9남매의 장남이었던 그는 동생들의 아버지나 다름없었다. 그가 서울에 있는 학교에 합격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동네 사람들은 장하다고 모두 입을 모았다.


아르바이트로 틈틈이 일을 하면서도 공부를 잘해서 전액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다녔던 그였다. 그의 아버지는 몇 년 전에 탄광에서 일하다가 다쳐서 누워계셨고 어머니마저 아버지를 수발하느라 얻은 병으로 말문을 닫은 지 여러 해가 지났다.


그날 그녀는 가방 하나만 매고 남자를 찾아와서는 좁은 공간의 사택에 눌러앉았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게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여서인지 잘 버텨냈다. 사람은 부딪히며 살아야 사는 맛이 난다며 적응해 갔다. 열 식구가 넘는 뒷바라지에 몸은 절인 배추처럼 늘어졌지만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그녀가 온 지 달포가 지났을 때였다. 그날도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오던 길이었다. 길모퉁이에 검은색 승용차 두 대가 서 있었다. 그 옆에는 머리를 짧게 자른 중년의 남자가 장승처럼 서 있었다. 섬뜩한 모습이었다. 결혼을 반대하는 그녀의 부모가 사람들을 데리고 찾아온 것이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듯이 그녀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서울로 향했다.


열흘이 지났을까. 홀쭉한 모습으로 그녀가 나타났다. 소식이 궁금했던 나는 너무나 반가워서 하마터면 끌어안을 뻔했다. 그녀는 돌아와서는 많은 식구에 부대끼면서도 얼굴 표정은 변함없이 해맑았다. 박꽃 같은 하얀 얼굴은 도회지 여자로 보였는데 가족들에게 대하는 모습은 시골 아낙 같은 여자였다.


남자가 출근을 할 때면 여자는 삽짝까지 따라 나왔다. 도시락을 건네주는 그녀의 따뜻한 눈빛을 나는 여러 번 보았다. 견우와 직녀처럼 잠시라도 헤어지기 싫어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아름다웠지만 안쓰러웠다. 퇴근하고 돌아오는 저녁이면 그들은 손을 잡고 기숙사와 사택의 주변을 돌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참 행복한 모습이었다.


한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새벽녘, 사택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눈을 떴다. 그 바람에 눈꺼풀 위에 앉아 있던 잠이 달아났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도 사람들의 뒤를 따랐다.


한밤중에 그녀의 부모들이 찾아와서 윽박지르고 난리가 났다.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부모님을 따라가지 않겠다는 그녀는 소리소리 지르다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미리 준비한 농약을 마셨고 남자도 따라 마셨다고 한다.

다급한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남자의 많은 식구들은 맨발로 서성거리며 바깥에서 떨고 있었고 모두들 벼락을 맞은 듯 놀란 눈을 비비며 울부짖고 있었다.


여자와 남자가 대문 앞에서 나란히 누운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옷을 잡아 흔들며 큰 소리로 흐느꼈고 아버지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 집안 망신시킨다며 벼락같은 소리를 고래고래 내질렀다. 두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이 나는 믿지도, 믿기지도 않았다.


내 앞에 서 있던 어머니가 험한 것 보지 말라며 집으로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다. 그날 밤 나는 등이 오싹해지고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몸이 뻣뻣해지고 쇳덩이가 무겁게 내려앉는 무서운 꿈도 꾸었다. 다음 날, 어른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내 귀까지 들려왔다. 남자와 여자는 병원에 도착했지만 손 쓸 시간도 없이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수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내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 지 한참이 지났다. 또한 내 아이들이 커서 연애할 나이가 되었다. 요즘은 사랑에 빠졌다가 헤어지고 언제 헤어졌나 싶을 정도로 또 다른 사랑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그들은 꼭 목숨을 버리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해야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