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골 길들이기

by 배꽃

나는 시집오기 전까지 부엌에서 설거지 한 번 하지 않고 살았다. 엄마와 한 살 아래 여동생이 손이 빨라 집안일을 도맡았고 텃밭까지 일구었다. 여동생은 어린 동생들을 돌보고 반찬까지 잘 만들어서 내가 설 자리는 없었다.


결혼을 하고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어려웠다. 집안에서 아이들과 남편 뒷바라지만 하는데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죽 한 그릇도 못 먹은 사람마냥 비실거렸고 모든 일에 의욕도 없었다. 남편은 늘 불만이었다. 부스스하고 핏기 없는 얼굴을 싫어했다. 출근 할 때나 퇴근하고 돌아 왔을 때 목련처럼 화사하게 웃으면서 맞아 주길 바랐다.


어느 날 남편이 다른 날보다 일찍 퇴근해서 집으로 왔다. 환절기에 감기까지 걸린 내 몰골을 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그날 일찍 저녁을 먹고 대뜸 산책을 가자고 했다. 팔공산으로 차를 몰았다. 산책을 간다더니 갓바위를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몇 발자국도 오르지 못하고 헐떡거리던 나는 못 올라가겠다고 징징거렸고 남편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앞장을 섰다. 한 걸음 한 걸음씩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 시간이면 올라 갈 수 있는 거리를 배가 더 걸려서야 정상에 도착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지 못하고 눕고 말았다. 몸은 무거웠고 뻐근하게 뭉치는 다리는 일주일이 되어갈 무렵 풀어졌다. 다시는 산에 따라가지 않겠다고 투정을 부렸다. 하지만 남편은 받아주지 않았다. 억지춘양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높고 낮은 산으로 따라 나서야만했다.


그해 늦가을, 낙엽이 붉게 물든 만산홍엽의 덕유산에 올랐다. 산 입구에는 단풍이 곱게 물들었지만 산에 오를수록 가을의 끝자락이었다. 누렇게 바랜 낙엽은 발목까지 수북이 쌓여있었다. 정상에 올라 늦은 점심을 먹고 내려오던 중이었다.

앞서가던 남편의 발걸음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뒤쳐져 있던 나는 빠른 걸음을 재촉했다.


어느 순간 길이 없는 막다른 곳에 접어들었다. 낭떠러지가 심했고 떨어진 낙엽 밑에는 돌멩이가 깔려있었다. 발을 조금이라도 헛디디게 되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았다. 게다가 맑던 하늘이 잿빛으로 변하더니 싸리 눈까지 뿌렸다.


골짜기부터 시작된 어둠속으로 앞서가던 남편의 뒷모습이 희미해져갔다. 아무리 불러도 들리지 않는지 한 번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산짐승이 바로 뒤에서 따라 오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에 산언저리를 수없이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아무리 걸어도 제자리였다. 빨리 걸어도 헛걸음질만 해댔다.


조금씩 내리던 눈은 어느새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낙엽 위에 내려앉은 눈은 금세 쌓여갔다. 미끄러지고 일어나기를 여러 번 반복하면서 온 몸은 흰 눈과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장갑도 끼지 않고 등산양말도 신지 않았던 손발은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그대로 주저앉으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쉬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 남편 따라 하염없이 앞만 보고 걷고 뛰었다. 나는 늘 그렇게 살아온 것 같았다. 남편의 듣기 싫은 말 한마디에도 토를 달지 않았고 순응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인지 여태껏 큰 싸움이 없었다.


저 멀리 하얀 지붕을 덮어 쓴 ‘휴게실’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너무나 반가워 눈물이 났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곳에 먼저 도착한 남편은 천연덕스럽게 따뜻한 차를 마시며 앉아있었다.


남편이 너무나 야속했다. 저렇게나 무심한 사람이 있을까. 남보다 더 못한 사람 같았다. 길도 없는 가시밭길에 나만 남겨두고 혼자 가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다시는 산에 오르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다음 날 아침 심한 몸살로 일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온 몸은 묵직했지만 마음은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지쳐있던 얼굴은 핏기가 오르면서 생기가 돌았다. 높고 낮은 산을 강산이 몇 번 바뀌도록 오르내리다보니 뜨거운 기를 받은 것 같았다. 그 덕분인지 수 십 년 동안 심한 감기에 걸린 적이 없었다. 매사가 즐겁고 활기찬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는 남편의 혹독한 훈련과정을 통해서 건강한 몸과 정신력이 되살아난 것이다.

“당신은 내가 던진 덫에 걸렸다.”

어느 날 남편이 무심코 던진 말이었다. 골골 거리던 나는 남편에게 실험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남편보다 먼저 등산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