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은 묘하다.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이 느닷없이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나 역시 만나지 못해 그리워하면서 가슴에 묻어둔 인연이 있다. 그런가 하면 얼마 전에는 꿈에서도 스치기 싫었던 선생님과 연락이 닿았다.
그분과의 첫 만남은 여고시절로 되돌아간다. 그날은 소낙비가 세차게 내렸다. 집에서 등교할 때는 한 방울의 비도 떨어지지 않더니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눈도 뜰 수 없을 만큼 세차게 퍼부어댔다. 버스정류장에서 학교까지는 이십 분을 걸어서 언덕으로 올라가야 했다.
비를 온몸으로 흠뻑 맞은 나는 꼭 생쥐꼴이었다. 교문을 들어서자 아이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교문을 통과한 학생들이 실내화를 갈아 신고 천천히 복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야! 너희들 거기에 서!” 선생님께서 아이들을 불러 세웠다. 학교에 들어오면 실내화를 갈아 신어야 하는데 네다섯 명의 아이들이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자신이 서라는 명령에도 아이들은 말을 듣지 않고 달아났으니 선생님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야!’ 너 거기에 서!” 실내화를 갈아 신고 복도를 걷고 있던 나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번쩍하는 빛이 보이면서 뭔가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얼떨결에 선생님의 손바닥에 밀려서 복도에서 바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순간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려 하자 구둣발로 나를 내리갈겼다.
빗물인지 콧물인지 얼굴을 타고 뭔가 흘렀다. 손으로 닦았더니 코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붉은 피와 빗물로 얼룩진 내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피투성이가 된 내 얼굴을 본 선생님은 그제야 멈추었다. 나는 등교하던 친구들의 부축을 받고 교실로 향했다.
책상에 엎드려서 펑펑 울었다. 종일토록 울었다. 너무 억울해서 울었고 왜 맞았는지 이유를 몰라서 울었다. 수업하러 들어오는 선생님들조차도 아침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대답할 기력조차 없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을 해야 하는지 말문이 막혀버렸다. 가슴이 펄떡거리며 방망이질 해댔다. 말은 하고 싶은데 말이 바깥으로 세어 나오지 못하고 입 속에서만 뱅뱅 돌았다.
그날은 마지막 수업 시간에 영문타자 시험이 있었다. 종일 우느라 퉁퉁 부었던 눈에 글자가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은 텅 비었고 가슴을 후려치는 쓰라림만 느낄 뿐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빈 용지만 내고 돌아섰다. 다음날 타자를 가르치는 K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시험 친 것을 보여주시더니 영점 처리되었다고 하셔서 다시 시험을 보게 되었다.
선생님은 그날 있었던 일을 친구로부터 들었다고 하셨다. 수업시간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나의 행동을 지켜봐 주셨고 늘 관심을 주셨던 선생님이었다. 그 일로 여고를 졸업하고서도 나는 몇 년 동안 선생님께 고마움의 편지를 썼다.
첫 번째 수필집을 내고 아는 분들에게 책을 보내드렸다. 그때 다정하게 보살펴 주셨던 K선생님이 생각났다.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자주 연락하던 여고 동창과 대화 중에 K선생님의 연락처를 얻게 되었다. 그때 우리가 다녔던 여학교의 이웃 학교에 교장선생님으로 발령이 났다고 했다. 너무나 반가워서 간단한 메모를 쓰고 ‘k교장선생님께’ 책을 보내 드렸다.
일주일 후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느 학교에 근무하는 누구라고 먼저 인사 말씀을 건네셨다. 나는 너무나 반가워 선생님께 그 옛날 예뻐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동안 연락처가 끊겨서 안부인사도 못 드렸다는 변명도 했다.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말씀도 드렸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전화를 끊었다.
저녁 준비를 하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K선생님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타자 시험을 다시 친 얘기며 몇 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말씀까지 드렸는데 선생님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셨고 생소하게 받아들이셨다. 전화를 끊고 졸업앨범을 넘겼다.
두꺼운 앨범 속에는 앳된 여고생들의 미소가 번져 났다. K선생님을 찾았다. 선생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맨 뒷장부터 선생님들의 얼굴을 짚어가며 관찰했다. 드디어 선생님이 온화하게 웃는 모습의 사진이 보였다.
학교 홈피에 들어가서 교장선생님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뿔싸! 통화했던 분은 K선생님이 아니라 내가 너무나 미워했던 J선생님이셨다. 소식을 전해준 친구가 J선생님을 K선생님으로 잘못 알았던 것이다.
오랫동안 미워하고 증오했던 선생님과 이렇게 연결이 되다니, 순간 가슴이 후려쳤다. 양귀가 쭈뼛 서는 것 같았다. 가슴도 콩닥거렸다. 눈물이 났다. 수 십 년 전 그날의 눈물은 어른이 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비 오는 날만 되면 눈물은 염치도 없이 흘러내렸다. 그 일로 이유 없이 비 오는 날이 싫었다.
얼마 전에 J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책을 다 읽고 축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연락을 하셨다. 열기와 패기로 넘쳤던 그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목소리는 흔적이 없었고 인자하고 넉넉한 품새의 목소리로 들렸다.
장맛비 내리던 그날의 억울했던 이야기를 몇 번이고 꺼내려다가 나는 입을 닫았다. 어쩌면 사람 사는 일이란 스스로의 뜻과 무관하게 반전이 있는 모양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만나게 되는 것을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