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친구 2

by 배꽃

내 마음속에는 버릴 수 없는 일이 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다. 나와 그는 두 살 차였다. 그는 나를 ‘숙아’라고 불렀고 나는 딱히 부를 만한 호칭을 찾지 못해서 그를 ‘오빠’라고 불렀다. 그는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전라도에서 살았다. 야구로 유명한 K상고의 2학년으로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야구선수였다. 뿐만 아니라 잘 생긴 외모에 은사시나무처럼 쭉쭉 뻗은 키가 시원스럽게 느껴졌다.


그를 만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였다. 설악산 입구에 버스를 주차해 놓고 흔들바위를 다녀온 직후였다. 친구들이 다 모일 때까지 아이들과 나는 버스 안에서 조잘조잘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내가 탄 차 옆에 버스 한 대가 섰다. 그 버스 안에서는 야구부 선수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우리 반 친구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가 났다. 고교야구경기가 인기 절정이었던 시절이라 연예인 못지않게 야구에 관심사를 보였다. 야구선수들 이름을 거의 다 외우고 있었으며 선수마다 타율이 몇 할 몇 푼 몇 리까지 되는지도 알고 있었다. 친구들과 달리 나는 야구에 관심이 없어서 아는 이름이 한 명도 없었다. 내가 앉은 창문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손짓을 하는 것 같았다.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지만 나를 부르는 신호인지 알지 못했다. 반 친구들이 나를 불렀다. 옆으로 보라고 했다. “야! 너 이름이 뭐냐?” 그가 내게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창문 너머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가 내게 관심을 보이자 친구들은 함성을 지르며 내 이름을 가르쳐줬다.


그는 학교 주소와 자신의 이름을 적은 쪽지를 내게 건네줬다. 그 쪽지를 받은 나는 수학여행이 끝나고 그를 까맣게 잊었다. 초여름이 시작되던 어느 날 그에게서 편지가 왔다. “숙아! 지금도 쑥쑥 잘 크고 있지?” 첫 문장을 그렇게 썼다. 잘 있었냐는 첫인사와 다른 학교와 춘계 야구 시합을 하느라 이제야 첫 편지를 쓴다는 내용이었다. 숫기가 없었던 나는 말하는 것보다 차라리 글 쓰는 편이 나았다.


그를 보았을 때는 한마디 말도 못 했지만 편지를 받고 답장을 쓰는 데는 서서히 이력이 났다.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편지를 썼다. 어머니가 불러 주신 말씀을 글로 받아 적어서 먼 곳에 있는 친인척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덕분인지 말하는 것보다 글을 먼저 깨우쳤다. 나는 그의 편지를 읽고 답장을 보냈고 호칭을 뭐라고 쓸까 하다가 처음에는 쓰지 않고 보냈는데 다음 편지에 그가 여동생이 없으니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다. 처음에는 쑥스러워서 망설였는데 한 번 불러보니까 괜찮았다.


그와의 편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오고 갔다. 처음엔 자신을 소개하는 내용이 많았다. 주로 학교 이야기와 야구에 관한 이야기였다. 야구에 관심 없던 나는 그가 고교 야구로 시합이 있어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날이면 꼼짝 않고 화면 앞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호감이 갔던 이유는 야구를 하면서 원정경기를 오갈 때 차 속에서도 늘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다. 또한 야구 방망이를 들고 있는 화면 속의 그의 얼굴은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나도 그와 같이 거울 속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웃는 연습을 했고 통학하는 버스 속에서도 책을 읽으려고 노력했지만 콩나물시루 안에서는 허사였다.


그는 문학과 그림에도 관심이 많았다. 내게 보내온 편짓지는 대부분 은행잎이나 단풍잎을 말려서 만든 것이었다. 윤동주의 별을 헤이는 밤, 김춘수의 꽃,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같은 시를 적어서 보내왔다. 그때 외웠던 시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 영향으로 나는 문예반에 가입했고 교내에서 여러 개의 상까지 받게 됐다. 그것이 지금 내가 글을 쓰는 계기가 된지도 모르겠다.


그는 내게 많은 사진을 보내왔다. 주로 선수들과 찍은 사진이었는데 프로구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름난 선수도 있었다. 그도 고교 졸업 후 구단에 들어가서 선수로 활동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보내던 편지를 한참 동안 멈출 때가 있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있을 때면 나의 답장을 기다리다 지친 그는 내가 편지를 보내기도 전에 또 편지를 보내왔다. 야구시합으로 바쁜 스케줄 중이었지만 나에게 관심을 보이던 그의 편지는 즐거움이었다.


그 해 겨울 방학 때 나는 외갓집에 갔었다. 흰 눈이 내 무릎까지 내렸고 나는 그 동네 친구들과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냇가에서 썰매를 타고 산으로 들로 토끼를 잡으러 다니느라 그와의 편지는 잊고 있었다.


그는 편지를 몇 번 보내도 소식을 받지 못하자 동계 훈련에 빠진 채 나를 찾아왔다. 전라도 군산에서 태백까지 하루가 꼬박 걸려서 찾아온 그를 나의 엄마는 밥 한술 해 먹이고는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며 돌려보냈다.


그 후 그의 편지는 내게 오기도 전에 엄마 손에서 사라졌다. 딸이 내리 넷인 엄마는 은근히 걱정이 되어선지 내가 여고에 들어가면서 단속이 유난히 심해졌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며 그때부터 내게 오는 편지는 모조리 엄마의 손을 거치고서야 받아 볼 수 있었다. ‘보고 싶다’ 거나 ‘그립다’는 말이라도 쓰여 있으면 가차 없이 엄마의 손에서 사라졌다.


수십여 년이 지난 지금 편지 쓰는 일이 드물어졌다. 그때 생각하면 가슴이 벌렁거리며 마음이 따뜻해진다. 몇 날 며칠을 기다려서 주고받던 편지는 사라졌지만 행복했던 기억은 오롯이 남아있다. 그는 지금도 야구를 하고 있는지 아니면 감독이 되어 야구선수를 길러내고 있는지 가끔은 궁금할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