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의 성장 기록
항상 그랬던 것 같다.
둘째의 성향을 인지하면서도 욕구 충족을 위한 적극적인 니즈 반영엔 다소 소홀했던 사실을. 개성이 강하지만 아직 어리기에 표현이 아직 미숙하고 경험치가 낮은, 이 작고 고귀한 인격체와 부대끼며 생활해나가는 것은 이론과 실제에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내 아이가 엄마에게 보내는 신호는 새벽녘 시야를 가리는 연무처럼 걷히기 전 당장은 알아채기가 쉽지 않았다.
아이는 사회성도 있고,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다. 초등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놀이터의 기구들을 그 또래의 기준보다 월등히 주무르며 놀았다. 그네를 타더라도 놀이기구의 바이킹을 타듯 아찔하게 올라가고 지하철 손잡이 모양의 기구에선 저도 모르게 공중제비를 돌고 착지를 해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어디든 잘 어울려 놀고 관심과 사랑을 받는 아이기도 했는데, 그래서인지 내 마음속엔 씩씩한 딸, 이만하면 크게 손 갈데없다는 마음과 무심한 듯 소탈하게 키워보려는 육아관이 함께 자리 잡고 있었나 보다.
큰 아이에게 잘 맞았던 교육 기관을 둘째에게도 제공해주었다.
적기에 맞는 기본 생활습관과 인성 교육에 중점을 둔 몬테소리 유치원을 선택하고, 잘 자라고 있다고 믿고 싶은 엄마의 모습이기도 했다. 하지만 신중한 기관 선택만큼이나 기질에 따른 "정서"를 보듬어주는 "애착관계"를 위해 내가 얼마나 힘을 쏟았는지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긴 유치원 생활이 힘에 부쳐 피곤한 탓에 "엄마도 다른 엄마처럼 데리러 와", "4시 도보 하원"을 줄기차게 얘기했었는데 지하철을 타는 번거로움을 이기고 데리러 가기 시작하면 뭔가 리듬이 계속 깨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원 차량을 이용하기 위한 대기 시간이 아이에게는 꽤나 지루하고 힘들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4시 도보나 차량 하원 시간 4시 15분이나 물리적인 시간은 단 “15분”이라고.
전업주부이지만 몸은 하나인지라 도통 꿈쩍도 안 하는 집돌이 초1 큰 아들이 늘 마음에 걸린다.
7세가 되어 혼합연령반의 최고형님이 되고 보니, 동생들을 책임지고 보살피는 역할도 해내야 했다. 상담 때 담임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니 조용히 자기 할 일을 잘 해내고 선생님께서 심부름도 자주 시키신다고 한다. 딸아이는 6세 동생들과 지내며 "언니가 OO 해줄게~" 언니 역할을 꽤나 즐기고, 성숙해지는 모습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집에 와선 여지없이 동생 모드로 전환하곤 한다. 하원 후 놀이터에서 한두 시간 놀다 들어오면 서둘러 저녁 준비하는 시간부터 시작되는 졸음과의 전쟁, 하루 일과 중 있었던 스트레스가 올라오면서 짜증이 커져만 갔다.
가장 걱정거리는 잠이 많은 딸에게는 일찍 잠자리에 들고도 아침마다 기상이 버겁고, 겨우 눈 비비고 일어나면 "졸려~~, 동생들 돌보기 힘들어~”울먹이며 애를 태운다. 결국 마음을 달래 서둘러 나설 때면 코로나 시국에 체온 측정해 주시는 선생님과 옆에 항상 서 계시는 기사님의 시선이 어깨너머 느껴지기도 한다. 먼저 졸업한 큰 아이에게 들은 말이 생각이 났다. "5, 6세는 좀 늦어도 되지만, 7세는 늦는 친구들이 거의 없어요.”
졸음을 이겨낼 특별한 이벤트가 없을 때면 등원 거부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아침부터 딸은 어디 긴 여정을 다녀오는 사람처럼 마음이 무겁다. 늘어지며 시작되는 아침의 풍경, 지각쟁이가 되어 입구에서 작아지는 딸의 모습에, 조그마한 아이 마음 하나 달래지 못하는 엄마로서의 나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다. 좌충우돌 성장하는 아이라지만, 애초에 기본 생활 습관을 잡기 기대했던 마음을 조용히 내려놓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둘째는 날 때부터 예민한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오히려 날 때부터 속 깊은 아이였달까. 내가 큰 아이의 언어발달에 온통 신경이 가있었다면 순둥이 아가라 잠도 잘 자주 었고, 서너 살 경엔 오빠 책을 읽어주거나 놀이를 하고 있으면 돌고래 애착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곁에 누워 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렇게 평온한 듯 보이는 영유아 시절을 거쳐 유치원에서 단체 생활에 수반한 규칙을 배우고, 부모와 떨어져 긴 하루를 보내고 나면, 하원 후 짧은 오후 시간이 어딘지 억울하고, 참았던 감정이 함께 폭발한 것 같기도 하다. 샤우팅을 하고 오빠보다 월등한 운동신경으로 몸부림을 치기도 했다.
우리 둘째는 평소 생글생글 가늘고 긴 눈으로 반달웃음을 잘 짓고, 웃을 땐 무척 사랑스럽다.
나도 엄마가 처음인지라 큰 아들이 먼저 걷는 낯선 길에 동행하며 걷다 보니 실질적으로 둘째에게 눈은 떼지 않아도 세심한 감정처리에서 미숙함을 인정하게 된다.
그렇게 저렇게 고민만 안고 끝이 없어 보이던 유아기의 긴 터널을 지나 어느새 2022년도 둘째가 초등학생이 되었다.
초등 입학과 동시에 4시간이 앞당겨진 하교시간부터 상당 시간 "자유"가 부여되었다.
가끔 방과 후를 하고 와도 1시 반이니 이후 시간은 놀이터에서 마음껏 뛰어놀았다.
5개월가량을 저녁 시간이 되도록 가방은 엄마에게 던져놓고 개미 관찰이며, 소꿉놀이며 인라인, 두 발 자전거에 그네 곡예며 원 없이 자기만의 시간을 만끽한 것 같다. 매일 평균 너 다섯 시간씩 바깥놀이를 하다 보니 다리 근육이 붙고, 에너지 발산이 충분히 되고 있나 보다. 무엇보다 밝을 때 에너지만큼이나 힘들 때 증폭되는 짜증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사실 잘 모르겠다. 유아기의 기관이 우리 딸아이 기질과 잘 맞는 곳이었는지. 철학이란 말이 좀 멋쩍지만 유치원의 선택은 양육자의 사고가 크게 미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기관 덕분에 주말 부부 가정의 부모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손이 덜 미치는 부분을 채워주었다고 생각하고 자립심과 집중력을 길러주는 몬테소리 기관에 신뢰를 보내며 다시 돌아가도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의 의미를 새기게 되는데, 기관의 시스템이나 철학이 내게 큰 공감을 주었기에.
인생은 무수한 선택의 연속이고 나와 성향이 다른 기질의 아이를 어떻게 최선의 선택으로 이끄느냐에 대한 난제를 두고 후회만 하고 살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냥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야 할 텐데 어떤 측면에선 아이의 문제가 아닌 엄마 금쪽이인 나를 조금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으로 기록을 하고 성찰의 도구로 삼아 본다.
너나 나나 출렁이는 인생 파도를 타고 부유하지만 부족한 엄마이기에 글로 매듭지어 가며 너에게 한가닥 밧줄이 되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