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중년의 내 나이에 엄마의 인생을 찾아 떠나갔다. 그때 나는 우리 큰 아이 나이었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생일 때 서류상으로 이혼했지만, 내가 '시집'가는데 지장이 생길까 두려워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매일 혼자 다짐하듯 혹은 당신의 희생을 내가 알아야 한다는 듯 "나는 여자의 삶을 포기하고 너의 엄마로 살기로 했어."를 주문처럼 되뇌었다.
언제부턴가 엄마는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밥을 하며 설거지를 하며 빨래를 개면서. 엄마는 병들어가고 있었다. 희망 없는 결혼생활의 고통만큼 이혼에 이른 당신의 처지에 대한 수치심은 컸던 것 같다. 점차적으로 주변의 관계를 정리하고 외가에게 멀리 떨어진 동네로 이사했다. 항상 엄마의 친구 선후배 학생들로 북적이던 엄마의 화실따린 우리 집은 더 이상 거기에 없었다.
엄마는 내 결혼에 문제가 된다며 가정 불화와 같은 모든 문제들을 입밖에 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때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불쌍한 엄마를 바라보며 성장하는 동안, 엄마의 슬픔 수치심은 내게 깊숙이 침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남들에게 보이면 안 되는 그런 것들에 겁박당하고 있었다. 나의 미래의 결혼 때문에 엄마가 자신의 인생을 희생해야 한다는 비논리에 혼란스러웠다.
어쨌든 엄마가 불행을 삼키며 인내하는 만큼 나는 누가 봐도 참하고 얌전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그런 딸이 되었다. 아마도 수학을 잘하는 똑똑한 엄마는 여자로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와 딸의 엄마로서 자리를 지켜만 하는 기본값을 치밀하게 계산했던 것 같다. 내가 대학에 가자 엄마는 결혼시켜도 좋을 만한 그런 남자들을 몇 명을 선별해 놓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혼녀의 딸이 아닌 사정상 잠시 해외에 떨어져 지내는 집안의 얌전한 딸처럼 지내다 좋은 남자와 결혼하길 바라면서.
나는 엄마가 오래 시간에 걸쳐 고민하고 고민했을, 그리고 어렵게 결심하고 떠난 나이, 마흔다섯이 되었다. 여전히 난 엄마를 원망하고 있었다. 엄마가 떠난 지 이십여 년이 지나고 세명을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여전히 엄마를 미워하고 탓하는 '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엄마가 언젠가 나를 떠날 것이란 것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우리는 심적으로 실질적으로도 준비하고 있었는데 왜 그렇게 참을 수 없는 상실감에 괴로워했을까.
아마도 엄마가 아빠와 완전히 정리된다 해도 나 역시 함께 분리될 것이라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동시에 집을 이사하듯 바로 한 재혼은 충격이었다. 아무리 부부 같지 않은 부부였지만 함께 생활해 왔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욱이 아빠와 모든 것이 정 반대인 엄마의 그 남자가 나는 너무 싫었다. 무엇보다 엄마가 찾은 새로운 삶이 더 나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엄마가 불쌍했던 것은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닌데'라는 마음이 저번에 깔려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다수의 공모전에 수상하며 장례 촉망받던 여자가 나의 엄마로 전락했다는 안타까움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난 아빠의 경제적 무능력 같은 표면적인 이혼 사유보다 막연하게 엄마의 삶에 대한 불만족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나를 버리고 떠나 찾은 새로운 삶이 고작 누군가의 아내라는 것이 내겐 배신이었다.
엄마는 개방적이고 진취적이었다. 그럼에도 50년생 엄마는 '결혼'이라는 제도의 보호가 절실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작품을 준비하다 계산이 안 나오면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공대에 며칠이고 찾아가 결국 배우고 해결하던 산업 디자인 여대생이 모습에 반해 결혼했다는 아빠도 그 여자의 사회생활을 차단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신의 딸이 시몬느 보부아르 같은 여자로 성장하길 바란 멋진 아빠였지만 당신의 아내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엄마는 아빠의 의사에 따라 육아를 위해 교사직도 내려놓았다.
아마도 나는 그 부분이 가장 미안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엄마가 항상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이 좋았다. 아침마다 예쁘게 싸주는 도시락 엄마표 간식들 무엇보다 수다스러운 나의 많은 이야기가 지겨울 법도 한데 항상 다 들어주던 엄마가 좋았다. 항상 내 옆에 있어주었던 엄마와 함께한 시간들이 많이 행복했고 고마웠다. 그렇기에 엄마의 '엄마로서의 인생'에 부조리를 느끼면서 나 역시 엄마의 서글픈 주문을 따라 읊었며 엄마로 살았다.
강력한 주술 같은 "나는 엄마다 나는 엄마다"를 되내며 나 역시 20년간 여자가 아닌 엄마로만 살아왔다. 나보다 잘난 엄마도 커리어를 희생하며 정성으로 나를 키웠는데 내가 뭐라고 아이들을 두고 학교를 가고 직장을 갈 수 있을까. 내가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엄마는 크게 실망했다. 셋째를 가졌을 때는 거의 울먹이며 화를 냈다. 아마도 엄마가 내게 쏟은 정성과 희생이 허망하게 느껴졌을지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엄마의 재혼에 "겨우 이거였어?" 하던 실망감과 배신감을 엄마도 내게 느꼈을지 모르겠다. 엄마가 엄마로서 주요 임무를 마쳤다고 생각했던 그 나이에 내가 있다. 엄마가 인생의 반을 엄마로 살다 새로운 삶을 재혼으로 귀결시킨 그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딸 엄마 여자의 묘한 경계의 시점에서 엄마를 한 명의 여자로 바라본다. 20세기 한국에서 엄마에게 최선이었을 선택과 21세기 미국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을 고민해 본다.
내가 엄마에게 기대했던 그 길로 내가 가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