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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붉은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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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Dec 27. 2019

오늘 같은 날

때론 공무원도 감동을 줄 수 있다.

화를 내면 안 되는데 화가 난다. 이럴 때 똥 뀐 놈이 성낸다고 하나? 나는 똥도 뀌고 성도 낸다.


''여보세요 거 너무하지 않나요?  오늘 같은 날 꼭 주차 딱지를 떼어야겠어요?''


참 나 우리나라 공무원들 중에는 아직도 이렇게 거만한 사람이 있다. 이런 걸 일반적 오류라고 하지. 아무튼 오늘 내 전화를 받은 여자 공무원은 나보다 더 한 톤 높은 목소리로 내 말을  받아쳤다.

 

''그런 말은 저 윗분들한테나 하세요 저희도 오늘 같은 날에는 쉬고 싶거든요''

" 아니 내 말은 일을 하지 말란 말이 아니라 오늘 같은 날은 좀 여유롭게 일처리를 하면 안 되냐는 거지요''


처음부터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생일날 엄마에게 야단맞은 느낌이랄까? 내가 분명 잘못은 했는데 야단치는 엄마가 더 야속했던 날이 있다.


'오늘 같은 날' 나는 이 말을 짧은 대화중에 아마 서너 번은 한 것 같다. 나도 오늘이 크리스마스만 아니라면 그깟 주차 딱지 좀 떼었다고 이처럼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소 꽃 선물을 자주 받곤 하는 옆 집 새댁의 아기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해 주고 싶었다. 집과 가까운 문구점은 문을 닫았다. 차를 가지고 나선 곳이 대형마트였다. 그런데  주차장 입구에서부터 길게 늘어선 차량의 줄이 장난이 아니다. 암만 기다려도  줄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선물 사기를 포기하고 돌아서 나오다가 길가에 세워둔 자동차들 사이에 비어있는 곳이 눈에 띄었다. 힘겹게 자동차를 주차시켰다. 오늘은 휴일이고 휴일이 아니라고 해도 문을 닫은 상가 옆에 여러 대의 차들이 주차되어 있는데 괜찮겠다 싶었다. 그래도 십 분은 넘기지 말아야지 생각하고 대형마트로 달려갔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도 뛰었다. 물건을 사는데 오늘처럼 망설이지 않고 사기는 처음이다.

겨울왕국의 엘사 인형을 보자마자 집어 들고 계산대로 갔다. 계산대 역시 줄이 한참 길다. 오늘이 뭔날인데 이러지? 하다가 참 오늘은 크리스 마스지하고 이해한다. 맨 앞에 산더미처럼 물건을 사고 계산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죄송하지만 제 인형 하나를 먼저 계산 좀 하면 안 되겠냐고 양해를 구했다. 쾌히 승낙하며 자기 차례에 내가 산 인형부터 계산대에 얹어 주었다. 크리스마스에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따뜻하다. 오늘 내 차에 주차 스티커를 붙인 단속공무원만 빼고...,


나와 엘사는 숨이 턱에 차게 뛰었다. 아뿔싸..., 멀리서도 세워둔 자동차들이 가슴에 반갑지 않은 딱지를 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시간을 보니 방금 뗀 따끈따끈한 과태료부과 대상차량 스티커였다. 실제로 내가 그곳에 차를 주차한 시각은 십 분을 넘지 않았다.


지난해  미국의 추수감사절 날, 내 친구는 그곳에 사는 목사님 댁에서 마련한 파티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오던 중 과속단속을 하는 경찰에게 걸렸다. 그나마 받는 연구비에서 엄청난 벌금을 낼 일에 가슴이 쪼그라들더란다. 벌금뿐 아니라 그 나라는 바쁜 시간을 쪼개어 법원에 출석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 런. 데. 면허증을 확인한 경관이 주머니에서 내민 것은 웃고 있는 호박 열쇠고리였다.


''다음부터 천천히 달리세요 아님 이 호박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친구는 한국에 와서도 자신의 자동차에 웃고 있는 호박 열쇠고리를 매달고 다닌다. 추수감사절에 받은 최고의 선물이라고 자랑했다.

미국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다. 하기야 미국 대통령은 만우절날에 국민들을 향해 '' April Pool''을 외치지 않았던가 유머를 인정하는 나라이다.

아무래도 내가 요즘 미국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았나 보다. 그들의 여유와 위트가 공권력에도 자주 등장하는 걸 보며 뭔가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기적과도  같은 일이 있었다.


2002년 월드컵 경기에서 우리나라가 4강에 들었을 때, 나는 이웃과 함께 집에서 TV를 시청하다가 모두 붉은 티셔쓰를 입고 신촌으로 나갔다. 거리에는 온통 붉은 물결이었고 우리는 그 파도에 함께 휩쓸렸다. 그 와중에도 거리의 신호등을 관리하는 경찰관이 호루라기를 입에 물고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누군가 외쳤다

 

''경찰 아저씨 이리 와서 함께 즐겨요, 우리가 4강에 들어갔잖아요''


갑자기 호루라기 소리가 오~대한민국으로 바뀌었다.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모두 손을 잡고 도로 한복판에서 춤을 추었다. 그날 신촌 사거리는 질서 있는 축제의 장이 되었다.


법은 당연히 지켜야 한다. 그것이 국민의 의무란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사랑을 베푸는 날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종교와 관계없이 유쾌하게 이 날을 즐긴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울리고 있는 종소리에 이끌려 자선냄비에 서슴없이 지폐를 집어넣는 따뜻한 마음이 샘솟는 날이기도 하다.

남들이 노는 휴일에 근무를 해야 하는 공무원의 심정도 이해는 간다. 히지만 불법 주차한 차들을  마치 먹잇감처럼 신속하게 처리하고 바람같이 사라지는 숙달된 업무능력은 적어도 오늘만은 노 땡큐다.


가로등에 붙은 CCTV 카메라도 적어도 5분은 기다려 준다. 5분 뒤에도 운전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제야 카메라는 셔터를 누른다. 만약 오늘 주차단속요원이 5분만 기다려 주었다면 아마 헐레벌떡 뛰어오는 나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아  조금만 일찍 오셨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네요 "


이 말 한마디 만으로도 나는 부끄러워서 다시는 도로변에 차를  불법으로 주차하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관공서의 문턱이 낮아진 건 확실하다. 시민의 창구인 민원실 직원의 미소가 상냥해지고 사무처리 속도가 빨라졌다. 하지만 오늘처럼 모든 국민들이 기쁘고 행복한 날에는 조금 여유 있는 행정처리를 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벌금고지서  귀퉁이에 산타할아버지가 ''미안해요  법을 지키는 일에는 휴일이 없답니다''라는 문장  구절만 넣어줘도 나처럼 얇은 양푼같이 화를 버럭 내는 사람들은 이내 화가 수그러  것이다.


국민들을 감동시키는 나라가 선진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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