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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붉은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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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Jan 26. 2020

명절 증후군 극복기

섣달 그믐날, 조용한  집 안에는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금방 로스팅한 커피 향이 가득하다. 평소와 다름없는 분위기지만 유난히 오늘은 더 여유롭게 느껴진다. 이 맘 때면 앞치마를 두르고 가스레인지 앞에서 전을 부치고 있어야 할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을 쓴다.

대한민국에 사는 60대 주부 중에 이처럼 한가하게 설을 맞이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혹시 꿈을 꾸는 것 아니냐고요?  아님 남편님이 1.4 후퇴 때 혈혈단신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이 아니냐고요?  무슨 말씀을...,

 

오 년 전 이맘때라면 나는 만두소를 한 다라이(맞춤법님이 대야로 바꾸라고 해도 난 그냥 다라이로 하렵니다)는 만들어 놓고 만두를 빚고 있을 것이다. 고기를 재고 생선을 씻고 전을 지지고 나물을 무치고 가래떡도 썰어야 한다.

며느리 중에서도 장남 며느리는 참 할게 못됩디다.

아랫  동서들 중에 일찌감치 큰댁에 오지 못하는 사연은 구구절절하다. 어쩌죠 하필 오늘 당직을 서야 해서요..., 감기에 걸렸어요 제가 가서 옮기기라도 할까봐 죄송해요..., 하긴 동서가 일찍 온다고 해도 아이들까지 데리고 온 가족이 함께 들이닥치면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전은 부치는 족족 거덜 나고 기름 뭍은 손을 커튼에 쓱쓱 닦지를 않나 애지중지 키우는 화초들을 망가뜨리지 않나 안방 침대는 아예 아이들 놀이터가 된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촌들이 반갑기는커녕 제 물건을 사수하느라 내 아이는 전전긍긍이다. 


지지고 볶고 무치고 찌고 굽고 썰고 꿰고 닦고..., 부엌에서  여자들이 자진모리로 돌아가는 동안 거실의 남자들은 진양조로 늘어진다.

자~쓰리고  들어 갑니다~~ 철퍼덕! 딱! 착착착.., 고스톱 올림피아드가 열리고 있는 이곳은 딴 세상이다.


결혼해서 30년. 시부모님이 살아계신 동안. 나에게 명절은 스트레스였다. 달력에 추석과 설날의 연휴 붉은 글씨가 길면 길수록 내 근심은 늘어난다. 내일도 쉬고 모레도 쉬는데 뭐 그렇게 빨리 가려고 하냐며 시어머님은 일찍 나서려는 아들들을 붙잡아 주저앉힐 게 뻔하다. 

명절에 해외여행을 떠나는 가족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부럽다.

시댁 식구들이 돌아간 후 집안 정리를 마치고 한숨 돌리고 나면 그 때야 친정식구들이 생각났다. 그리고는 아프다. 처음에는 음식을 잘못 먹어서 탈이 난 줄 알았다. 음식이 탈이 난 게 맞다. 그런데 예민해진 장이 소화를 시키지 못하는 거라고 한다. 명절에 예민하지 않은 며느리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나처럼 시댁 식구들 치다꺼리에 예민하고 시어머니의 사랑의 척도를 두고 동서지간에 서로 예민하고 사촌보다 못한 아이들 성적에 예민하고 시댁에서 너무 오래 뭉기적거리는 무심한 남편에게 예민하고 시부모님 용돈에 예민하고 등등등..., 명절날의 며느리들은 깨진 유리 조각 위를 맨발로 걷는 것처럼 예민하다.

통틀어 명절 증후군이라 한다.


어느 날은 꿈에 누군가를 먹일 음식을 만들고 있는데  모든 게 순조롭지 않아 무척 힘이 들었다.


''어머꿈속에서도 일만 해요''

시어머니께서는 이러는 내가 안쓰러우셨나 보다


 ''원래 큰 며느리들은 다 그런 것이다. 오죽했으면 나는 문간에 신발을  감추고 잠을 잤겠냐''


부지런한 우리 시할머니께서는 방문 앞에 시어머니 신발이 보이면 무조건 며느리를 밖으로 불러 내시곤 하셨단다.

대를 이어 고생하는 큰며느리의 업보를 당신이 마무리해 주시려는 듯.


''나 죽거든 성당에서 미사나 드려 주거라'''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이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라는 전제가 붙었지만 그 말이 고생하는 큰 며느리에 대한 립서비스만은 아니었던 듯 남편에게도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전통은 지켜져야 한다. 어떤 문화나 그에 따른 관습이 존재하지만 관습과 충돌하지 않고 잘 이어져 내려오면 아름다운 전통이 된다. 추석이나 설 명절에 고향을 찾는 긴 행렬은 아름다운 우리의 문화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은 그 시대의 며느리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제사상에 절도하지 못하는 여자들이, 절을 한다 해도 남자가 두 번하는 절을 네 번이나 해야 하는 남자의 반도 못 하다는 대접을 받는 여자들이 일을 하지  않으면 누가 음식을 만들어 제사상을 차려 줄 것인가,


세대가 바뀔수록 여성의 사회 참여도는 높고 맞벌이 부부는 늘어만 가는데  전통이랍시고 옛 것만 그대로 고수하면 아마 언제인가는 이마저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다.

전통은 계승도 중요하지만 확산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모님을 구심점으로 모인 핏줄은 그 부모님 세대가 사라지면 새로운 구심점으로 모여든다.

지금까지는 거의 장자가 구심점이 되어 이어져 내려왔다.


우리 가족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첫 기일에 새로운 집안의 가풍을 만들었다. 우리 다섯 형제 모두가 만장일치로 합의를 본 내용이다.


부모님 제사는 큰아들우리지낸다

두 번의 명절 중 추석에는 부모님이 계신 산소에서 차례를 지낸다

설에는 다섯 형제가 돌아가면서 각자의 집에서 모여 지낸다.

 

이번 설은 막냇동생이 주선을 차례다. 다행히 가족들이 모두 서울에 살고 있어서 설날에 모이기가 쉽다. 5년에  한 번꼴로 치르는 설 명절을 모두 정성스럽게 준비한다. 아랫동서들은 이렇게 힘든 일을 형님은 어떻게 일 년에 몇 번씩 치렀냐며 뒤늦게 고마움을 전하기도 한다. 우리는 작은 선물을 준비해서 서로 나누고 해인사를 한다.

올 해는 막내  동생의  아들인 조카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축하파티가 겸사되었다.


나는 매 년마다 동서들에게 줄 선물로 참기름을 준비한다. 시골 올케가 보내주는 참깨가 고소한 선물이 된다.

동서들도 각각 소박한 선물을 준비했다. 둘째 동서는 추위를 많이 타는 동서들을 위해 푹신한 잠옷을 선물했고 넷째는 과일 , 막내는 과수원을 하는 친정아버지가 만든 오미자 진액을 선물했다.

버섯농장을 하는 셋째  동서는 귀한 버섯을 나눠 주고 버섯을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요리법까지 전수해 주었다.


사실, 처음에는 이래도 되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몸도 마음도 편해지면서 명절이 축제처럼 즐겁고 기다려 지기까지 한다. 우리 시어머니께서 나를 이해하고 살아생전에 하신 당신의 의견이 있었기에 오늘 내가 편하게 명절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다 자신들의 집안에 가풍이라는 게 있어서 옛 말에도 남의 집 제사 흉은 보지 말라는 말이 있다.

얼마 후면 나도 시어머니가 되어 며느리를 될 텐데  며느리에게 물려줄 가풍을 그 아이가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대 간에 서로 이해하고 그 집안의 환경에 맞는 명절 분위기를 만들어 가면 우리의 전통도 계속 이어지리라 생각한다.


명절 증후군이라는  이 시대 희귀한 병은 의사가 고치는 병이 아니라 가족이 모두 함께 고쳐 주어야 할 마음의 병이다.

나는 이제 명절 증후군 완치 판결을 받은 건강한 주부가 되었다.


                  우리 집 설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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