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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붉은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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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Dec 22. 2020

다시 시작되는 우리의 관계

영화( 내 어깨 위의 고양이 밥) 리뷰


2020년의 송구영신. 코로나 블루는 제야의 종소리조차 들을 수 없게 하였다.

전쟁을 겪지 않은 시대에 태어나서 행운아인 줄 알았는데 참 쓰디쓴 경험을 하고 있다. 젊은이는 무증상, 노인들은 자칫 사망까지 이르게 하는 해괴한 바이러스라니..., 마스크를  벗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인 집 안에서만 지낸 지 일 년,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길냥이와 눈이 마주치는 것조차 불편하다. 요즘 나는 화해하지 못하고 있는 길냥이와 나의 관계에 대하여 수필을 쓰고 있는 중이다.


영화 속 주인공과 흡사한 외모를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갑자기 마음이 변할 수는 없겠지만 묘하게도 '내 어깨 위의 고양이 '밥'과 내 곁을 맴도는 길냥이는 너무나 흡사한 외모를 지녔다. 과연 이 영화가 길냥이와 나의 관계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수필의 마무리가 궁금해진다


(수필전문)

아침에 뜰에 나가보니 튤립의 연한 줄기가 우지끈 꺾여 있다. 조금 후면 꽃대가 올라올 텐데 놈의 짓에 화가 난다. 대범하게도 범인은 보란 듯이 증거를 남겨두었다.

데크 위를 마치 런웨이 하듯 유유하게 지나간 고양이의 발자국 지문이 잎처럼 찍혀있다. 날이 갈수록 이놈의 행동이 뻔뻔해진다. 시도 때도 없이 제 집인양 드나들면서 거실 안을 훔쳐보는가 하면  어느 날은 대문으로 기어들어와 화단에 볼일을 보고 뒤처리는 나 몰라라 하고 유유히 제 갈길로 간다. 매일 아침 나를 힘들게 하는 고양이는 벌써 삼대째 우리 집에서 터를 잡고 지내고 있는 고양이 가족이다.

영화 속 주인공인 밥(위)과 우리 집 주변을 맴도는 길량이(아래)의 모습

그동안 동물과 인간의 교류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많이 봐왔던 터라 감동의 지수도 얼마만큼은 예견하며

관객 모드에 진입했다.


런던의 거리.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발길, 무심한 얼굴, 화면에는 무척이나 춥고 을씨년스러운 배경이 펼쳐진다.


마약중독자였던 제임스는 길 위에서 버스킹을 한다. 음악영화는 아니기에 그가 부르는 노래에 초점을 두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를 가사로 인용해서 노래하는 그는 지금 배가 고프다. 감독이 무리수를 두었다. 아마 관객들이 주머니를 털어 기타 케이스에 동전이라도 넣어주기를 바라는 요량이다. 쓰레기통을 뒤지는 주인공,

겨우 건져낸 샌드위치가 그나마 바닥으로 떨어진다. 물 묻은 샌드위치.

는다. 그리고 먹는다.

우울의 극치를 달린다. 우울은 묘하게 관객에게도 전이가 된다. 이럴 때 관객은 둘로 나뉜다. 일어서던가 참고 보던가, 만약 이 영화가 영국에 사는 마약중독자 홈리스의 감동실화라는 걸 몰랐다면 나 역시 무리하게 시간을 축내고 앉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사춘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방황을 하던 제임스는 마약에 손을 뻗치게 되고 지금은 1 단계 자가 치료 중이다.

사회복지사 '벨'만이 제임스를 우호적으로 대한다. 직업적으로 베푸는 관심이지만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따뜻함을 느끼게 되는 장면이다. '벨'이 제임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외곽의 한 아파트다.


"창문을 열어 놓으면 환기가 잘 돼요"

"아 따뜻한 물도 나오네요"


이 짧은 대사가 많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환기란 공기가 서로 교류한다는 뜻, 제임스가 마음의 창문을 열면서 누군가와 교류하게 된다는 암시가 영리하게 깔려 있지만 일 년여 동안 스스로 자가격리를 하면서 친하게 지냈던 넷플릭스의 시청자인 내가 이걸 눈치채지 못할 까닭이 없다. 열어둔 창문으로 노란 고양이가 드디어 출연을 한다.

주인이 없는 길고양이라는 걸 확인한 후 고양이를 기르기로 한 제임스는 고양이와의 인연으로 이웃집에 사는 동물 애호가 베티를 만난다. 그와 함께 고양이에게 '밥'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너는 다만 길고양이에 불과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희망이 되었다'.(김춘추의 시 '꽃' 인용)

고양이 '밥'은 그 날 이후 제임스의 어깨 위에 앉아서  함께 버스킹을 나간다.


따뜻함과 차가움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영화다.

고양이와 따뜻한 수돗물이 나오는 임시거처, 현관문을 열어주는 이웃 친구 베티를 바라보며 마음이 따뜻했다가 차가운 바람이 부는 거리와 사람들의 냉소, 마약을 하는 아들을 두려워하며 비난하는 아버지의 태도 등이 다시 차갑게 만든다.  

이렇듯이 온탕과 냉탕을 들락 거리다 보니 어느덧 영화에 심취해 있다.


누가 누굴 탓해 너도 나에겐 차가운 냉탕이잖아, 노랑 길냥이가 어디선가 내 모습을 훔쳐보면서 중얼거리는 것 같다.


 아파트에서만 살다가 처음 주택으로 이사를 온 우리 가족은  담장 위에서 혹은 주차해 놓은 자동차 아래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고양이로 인해 놀라는 일이 많았다.

'고양이 출입 금지'

장난기 많은 아들이 붙여놓은 경고판을 무시하고 시도 때도 없이 나돌아 다니는 고양이를 보고 문맹 고양이라고 놀렸지만 장난기 속에 담겨있는 눈곱만큼의 애정마저 한 순간에 사라지게 만든 사건이 벌어졌다.


우리는 앵무새와 금붕어를 키우고 있었다.

어느 날 돌확에 키우고 있던 금붕어가 감쪽같이 사라졌을 때만 해도 고양이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새장 안에 기르던 앵무가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를 듣고 달려간 그곳에 펼쳐진 광경이라니..., 

새장의 문은 반쯤 열려 있고 이미 깃털이 난무한 그곳에서 누런 꼬리가 급하게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 날 이후로 고양이는 나의 적이 되었다.


우리 집 두 마리 강아지들은 길고양이를 관리하는 일에 충실했다, 누가 시킨 적도 없는데 멀리서 길냥이의 작은 움직임만 보아도 후각으로 알아채고 달려가 쫓아냈으며 자신의 임무를 다 한 것에 보상을 받으려고 의기양양하며 내 주변에서 꼬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세월은 인간에게나 동물에게나 두루 공평하게 흐른


지난가을 따뜻한 오후. 우리 집의 늙은 개가 툇마루에서 졸고 있을 때였다. 후각도 시력도 잃어버린 늙은 반려견은 고양이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고양이가 가깝게 다가와서야 퍼뜩 놀라서 짖기 시작했다. 쫒을 기력도 없어 제풀에 놀라 도망쳐 주기를 바라는 안타까운 짖음이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연로한 짐승은 약자였다. 약육강식의 본능은 직감적이다. 그동안 피해 다니던 고양이가 저보다 두 배나 덩치가 큰 노견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감히 노견의 얼굴을 향해 잽을 날리는 광경을 목격했다.


강아지에게 함부로 하다니. 하극상이다. 그때부터 나는 뜰안에 고양이가 보이면 가차 없이 소리를 질러 쫓아냈다. 동물의 세계에 인간인 내가 개입한 것이다.


영화 속의 사람들은 나와 달랐다

사람들은 동질의 인간보다 가여운 동물에게 더 호의를 베풀고 있었다.

가난한 노숙자에게는 환멸을. 그가 함께하는 고양이에게는 호감을..., 결국 귀여운 고양이 '밥' 덕분에 코번트가든에서 버스킹을 하는 제임스는 처음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된다. 그에게 따뜻한 음식을 제공해 준 장본인은 사람이 아닌 고양이 '밥'이었다.

자칫 동물 학대로 방향이 쏠리지 않을까 우려하는 마음은 접어둬도 되겠다.

다친 고양이를 위해 무료 동물병원을 찾아가서 진심으로 치료하는 장면이라든가 고양이를 입양해 가겠다는 한 여인에게 "너의 아들은 나에게 얼마에 팔거니?"라고 묻는 대사에서 어머나.. 이 남자 멋지네가 연발 터져 나왔다.


벌써 3대째 내 집 주변을 배회하는 길냥이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나였는데 고양이를 사랑하는 영화 속 주인공 남자에게 푹 빠져버렸다.  


사람의 인생도 묘생도 어찌 보면 닮아있다. 해피엔딩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위기와 절정을 거쳐야 엔딩에 이를 수 있다. 제임스는 이웃에 사는 베티에게 마음을 두지만 자신의 오빠를 마약중독으로 잃은 여자 친구 베티는 제임스가 마약중독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그와의 만남을 거부한다.

마약에 중독되어 거기에서 헤어나려면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된다고 한다.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사회복지사 벨은 그 고통을 '가장 심하게 앓는 독감의 백배 정도의 고통'이라고 표현을 한다.

나는 여자이고 아이를 낳아 보았기 때문에 아이를 낳는 고통의 열 배쯤으로 생각해 보았다.


지독한 고통이다. 화면 가득 고통으로 채워진 한 귀퉁이에 '밥'이 혼자 앉아 있다.

도대체 넌 누구니? 고양이 '밥'은 훈련된 동물 배우가 아니라 실제 주인공의 스토리 속 그 고양이라고 한다. 주인을 아니 동료를 지키는 눈빛, 파이팅을 외치는 눈빛, 조금만 더 참으라며 안타까워하는 눈빛, 그 눈빛은 더 이상 고양이의 눈빛이 아니었다. 고통스러워하는 자식의 곁을 지키는 어머니의 눈빛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밥'에게 점점 빠져들고 있다.


                            귀여운 고양이 '밥' (넷플릭스)

                             


우리 집 노랑 길냥이가 지금 내 모습을 보면 위선자라고 할지도 모른다. 네가 언제 적부터 고양이를 그런 눈으로 바라봤느냐고..., 감동이란 게 그렇다.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주거든, 나도 사랑까지는 아니지만 내 주변을 서성거리는 너희에게 관심 정도는 가져봐야겠다,


암흑의 굴에서 비로소 바깥세상으로 나온 제임스. 드디어 이겨냈다. 영화를 보는 중간에 두 어번 그의 이름이 불리어졌지만 아버지가 부르는 이름만큼은 아니었다. 진정한 용서와 화해의 장면에서 그의 이름이 불리어진 것은 또 하나의 감동이었다.

 

제임스..., 널 포기한 적 없다. 너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이 말은 아버지가 뒤늦게 아들에게 한 말이다. 어쩌면 고양이 '밥'은 한 발 앞서서 이 말을 제임스에게 했을지도 모른다.  


제임스의 어깨 위에서 고양이 '밥'은 행복하다. 제임스 역시 헤로인 대신 고양이를 위한 음식을 사면서 행복을 느낀다. 베티하고의 인연도 계속 이어지게 되고 더구나 어느 기자가 SNS에 올린 그의 어깨 위의 고양이 '밥'의 모습이 인기를 끌게 되면서 출판사와 계약을 맺는다. 제임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곧 책으로 출간되었다.


출판 기념 사인회장에서 실제 책의 원작자인 제임스 보웬이 카메오로 출연한 것은 나만 눈치챈 것일까?

 

우리 데크 위를 제집인 양 드나드는 길고양이


영화 속 주인공 고양이 '밥'은 '제임스'의 마음만 빼앗은 게 아니라 어느덧 나도 '밥'에게 물들어 갔다. 강아지처럼 손을 내어 줄 줄 아는 고양이, 맑고 순진한 눈동자였다가 금세 애처로운 눈빛으로 변하는 녀석을 보면 누구라도 안아주고 싶을 것 같다.

안아주고 싶다고?  언제라도 마음만 열면 당장 나에게 안길 기세인 길냥이가 저렇게 밖에서 대기 중인데...,


오늘도  노랑 길냥이는 데크 위에서 나를 주시하고 있다. 다시 봐도 고양이 '밥'과 너무나 흡사한 외모를 가졌다. 저 거실의 유리문만 열면 너도 내 어깨 위의 고양이가 될 수 있다. 어깨를 내어 준다는 건 책임을 진다는 뜻도 된다.


나는 아직 마음의 문을 열지는 못했지만 고양이 '밥'으로 인해 전보다 조금 선량해진 건 사실이다.


내 머릿속은 지금 길냥이에게  이름을  짜내고 있다. 이름을 준다는 건 우리의 관계에 새로운 의미가 생긴다는 이다.

'밥'이 제임스에게 가져다준 행운을 바라서 그러는 건 절대 아니다.

이 세상은 우연이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너와의 인연이 내 노력과 결합되길 바랄 뿐이다.  


영화의 엔딩 장면에 실제 주인공인 '제임스 보웬'과 '밥'이 나타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감동이 두 배 더 크다. 감동의 여운이 꽤 오래갈 것 같다.


                       영화 속의 실제 주인공인 밥과 제임스 보웬(출처 넷플릭스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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