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붉은 지붕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희동 김작가 May 06. 2020

그 남자의 엄마는 말보다 글이 더 강하다


그 여자에게 반했다. 드릴로 벽을 뚫는 여자. 남자의 옷도 잘 어울리는 여자, 아무거나 잘 먹는 여자, 착한 척 내숭을 떨지 않는 여자, 그럼에도 예쁜 여자, 그 여자를 걸 크러쉬라고 한다.


걸 크러쉬에게는 남자 친구가 있다. 3년 전, 남자 친구는 자신의 엄마에게 여자 친구를 소개했다. 남자 친구 엄마는 아들의 여자 친구가 친구 이상의 관계가 되기를 바랐다.

아들의 미래. 아들의 혼관, 아들의 인생계획. 이런 건 없다. 내일모레 마흔의 문턱에 다가서는 아들의 나이. 그 숫자가 문제인 것이다. 


다행히 남자의 엄마는 아들의 여자 친구가 싫지 않았다. 조각을 전공한 그녀는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하여 특별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당당해 보여서 좋았다. 대신 남자에게 고분고분하지는 않아 보이지만 사소한 일로 남자를 힘들게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동상이몽. 남자의 엄마와 두 젊은이는 서로 다른 꿈을 꾼다. 어머니 헛물켜지 마세요 저희는 친구예요, 사랑한다고 다 결혼하는 건 아니에요 친구처럼 오래오래 사귀다가 두 사람의 생각이 서로 닮을 때 자연스럽게 가족이 될 거예요.


그럴 거면 인사는 왜 해. 너희끼리 놀지 부모에게 허락받고 친구 사귈 나이는 아니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남자의 엄마는 삭은 동아줄 붙잡듯 아쉬운 기대를 걸고 둘을 지켜보았다.


코로나 19가 때로는 사회의 필요악이 되기도 한다. 이웃 나라의 공장이 가동을 중단하면서 환경이 재생되고 있다. 마스크를 쓰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똑같지만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떠다니는 모습은 오랜만이다. 치솟던 집값의 거품을 빼주고 공부보다 노는 게 좋던 학생이 학교를 그리워하고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 것도 코로나 19의 순기능이다.


코로나 19는 젊은이에게도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두 사람은 가까이에서 지지고 볶는 연애를 하는 게 아니었다. 걸 크러쉬는 우리나라가 아닌 멀리 암스테르담에서 일을 하고 있고 남자는 서울에 있다. 소위 원거리 연애, 롱디(Long distance relationship)를 하고 있다. 두 사람이 결혼을 생각하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가 두 사람의 물리적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코로나 19로 인해 걸 크러쉬가 일시 귀국을 했다. 그녀의 귀국을 남자의 엄마는 은근히 반가워한다. 위기가 기회라는 말. 남자의 엄마는 뭔가를 잔뜩 기대하고 있는 중이다.


누가 봐도 노인의 반열에 드는 나이지만 남자의 엄마는 자신의 나이를 의식하지 않는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는데..., 아들이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걸 보지 않는 한 늙을 수도 죽을 수도 없다. 아들의 결혼을 그토록 바라는 이유는 뭘까,

조상의 제사?  

일 년에 한 번 제삿밥 안 먹는다고 죽은 귀신이 다시 굶어 죽을까...,

대를 이을 자식?

천만에 요즘처럼 아이 기르기 힘들면 누구라도 두 번 생각해 볼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니면 무엇 때문에?

장성한 자식이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살았으면 하는 엄마의 바람에 이유가 있어야 할까, 


남자의 엄마는 공존하고 있는 서로 다른 두 시대를 양다리를 걸치며 살았다.

수와 진보는 정치권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세대에도 있고 우리들의 가정에도 있다.


전통을 옹호하고 안정을 지향하는 세대,

상하 질서를 중요시하며 관계의 선이 명확하다. 무엇보다도 체면과 명예를 중시하고 자신들이 살아온 인생을 훈장처럼 안다.(라테의 시대)


자유분방하여 간섭과 관여를 싫어하는 세대, 뚜렷한 의지와 목표의식으로 무슨 일이든 헤쳐나갈 수 있다 변화에 익숙하고 전통을 구시대의 유물로 생각한다. 경험보다 지식을 더 중하게 여긴다(너도 세월 가면 라테가 된다 시대)


처럼 서로 융화되지 않는 두 시대를 오가며 환절기 감기환자처럼 쿨럭거리며 살았다

남자의 엄마는 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세상이 정해놓은 잣대를 보편타당성 있는 것으로 알고 나이를 내세워 무턱대고 우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샌드위치 세대가 겪어야 하는 모순이 있다. 가끔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자신을 발견할 때이.


어제 남자의 엄마는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벽에 액자를 걸고 싶은데 드릴로 못좀 박아주고 가면 안 되겠니? 그 깟 못, 굳이 드릴이 아니라도 망치로 쿵쾅쿵쾅 을 수 있다.

아들의 엄마는 아들과 대화를 하고 싶다. 너무 오랫동안 보지 않으면 마음속 오솔길이 사라져 버릴까 봐 간간히 집안일을 핑계 대고 전화를 한다.

그때마다 아들은 달려왔다. 엄마가 만들어 주는 김치 김밥도 맛있게 먹어주고 독립할 때 함께 데리고 나가지 못한 강아지도 흠뻑 예뻐해 주고 간다.


그런데 오늘은 아들 대신 걸 크러쉬가 왔다. 아들이 많이 바빠서 대신 왔다고 한다. 손에는 드릴을 들고 아들의 헐렁한 점퍼를 입고 왔다. 기다란 못을 입에 물고 드릴로 벽에 구멍을 낸다. 남자의 아버지에게는 먼지가 날리지 않도록 벽 가까이에서 청소기로 먼지를 흡입해 달라고 한다.

두 사람이 함께 하는 모습에서 남자의 엄마는 또 하나의 그림을 그려본.

 

쿨하게 못을 아주고 떠나는 걸 크러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멋짐이, 그녀의 자신감이 문득 남자의 엄마를 외롭게 만들었다.


못은 물론 전구 다는 것 하나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남편에게 의지해야 했던 과거 자신의 모습이 바위에 붙어있는 따개비처럼 느껴졌다.

문득 조바심이 생겼다.


무슨 일이든지 시작도 안 해보고 물러서면 후회만 남는다, 세상이 조용해지면 아들의 여자 친구는 다시 왔던 그곳으로 가게 된다. 언제부터인지 아들과의 진지한 대화는 3분을 넘겨본 적이 없다.


아들에게  엄마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 남자의 엄마는 말보다 글이 더 강하다. 지금껏 말로 하지 못한 진심을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    

발행을 누르는 순간 이 글은 아들의 PC로 날아가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숨 쉬는 것처럼 쉬운 일이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도전이 되기도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봄, 숲, 잎, 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