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홀수 달이면나에게 보내오는 매거진이 있다. 'AROUND'는 내가 항상 꼼꼼하게 읽어보는 잡지다. 매거진에 실린 젊은 작가들의 글을 읽다 보면 내가 사용하는 언어와의 차이를 알게 된다. 거르지 않은 듯한 낯선 단어가 신선해 보이고 폐부를 찌르는 듯한 문장과 통통 튀는 감성은 마치 살아있는 날 것을 먹는 듯한 상큼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주제로 만들어진다. 이 달의 매거진은 '따로 또 같이'라는 제목으로 결혼에 관한 주제로 엮어졌다.
지금 나는 잡지에 실린 글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읽고 있다.이글은언제인가부터 유독 결혼이란 단어에 날을 세우고 있는 다름 아닌나의 아들이 쓴 글이다.
결혼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전혀 결혼에 대한 관심을 내비치지 않는,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이 결혼이 주제인 이달의 매거진에 어떤 내용의 글을 썼을까? 그의 심중이 궁금했다.
Magazine around
아들의 직업은 건축 설계사다.
본업인 건축설계 외에 잘 나가는 잡지사에 벌써 3년째 자신의 글을 연재하고 있다. 글 쓰는 엄마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일을 해 내는걸 보면서 그의 다재다능이 자랑스럽다가도 한 우물만 파기도 모자랄 판에 은근히 염려스럽기도 하다.
아무튼 그의 글을 읽어 보자
제목은' The Place Of Positiveness'- 긍정의 자리 - 부제로 '긍정적인 사람이 더 무섭다'라고 하는 글이다.
(중략)
결혼은 언제 할 거냐는 부모님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혹은 거절하기 미안해서 집을 나오기로 결심하고 몇몇 집들을 둘러보았다. 주로 오래된 아파트였다.
어느 집이나 아이들 방은 복도 편에 면해있었고 어른들 방은 가장 깊고 넓고 햇빛이 잘 드는 곳에 있었다.
하나같이 거실엔 커다란 사진이 걸려있다. 서로 닮은 얼굴들이 웃고 있는 가족사진이다. 하지만 밝게 웃고 있는 표정 뒤에 셔터를 누르기 직전 이들을 독려하고 자세를 고쳐 주었을 사진가의 노력이 더 크게 다가왔다. 긴장한 채로 미소를 유지하고 있는 가족들의 사진은 하나같이 다 어색했다.
간혹, 간혹이라기보다는 더 자주, 아이들 물건이 거실에 나와있는 집의 어른들은 아이들이 있어서 집이 조금 어지럽다고 이야기했다. 책과 가방 줄넘기 장난감 등 아이들의 자리엔 어쩔 수 없는 것들이 놓여 있었고 어른들의 자리에는 가족사진과 넓은 소파, 좋은 글귀 등 긍정적인 것들이 놓여있었다.
흔히들 하는 말처럼 결혼은 결심의 문제다 좋은일도 힘든일도 있겠지만 인생을 긍정하기로 결심하며 어떤 사람은 어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긍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안타까운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중략)
싸우기보다는 참고, 대립각을 세우기보다는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 절충하는 방식이 익숙한 사람은 언젠가부터 쓸데없이 버티는 사람. 투쟁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내가 놓여 있어야 할 자리에놓여있지 않다는이유였다.
글을 읽고 난 후, 내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한 사람의 인생관과 가치관은 그가 살아온 환경에 의해 형성된다. 결혼관 또한 마찬가지다. 부부가 원활한 결혼생활을 유지하지 못했을 때 그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혹시라도 결혼을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그와 반대로 자신은 부모와는 달리 완전한 결혼생활을 할 것이라고 다짐을 할 수도 있다, 어쨌든 부모의 결혼생활이 자식의 결혼관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게 되는 건 사실이다.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우리 부부가 참되지 않은 적은 없다고 자부한다.
아이들 앞에서 크게 부부싸움을 한 적도 가정을 소홀히 한 적도 없다. 내 주변 누구를 봐도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갈등을 느끼며 사는 사람도 없을뿐더러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고 사는 사람들뿐이다.
'긍정적인 사람이 더 무섭다'라는 부제가 그래서 더 내 가슴을 짓누른다.
요약컨데 글쓴이는 결혼해야만 어른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회의 인식과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적령기'라는 잣대를 세워두고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에 대해서 불편함을 표현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 나이에, 그 인물에, 그 직업에 뭐가 부족해서..., 라는 긍정 섞인 비난을 하는 사람 중 대부분이 어른이라는 명분을 지녔기에 그는 어른들에게 대립각을 세운다. 그 어른 중에는 분명 엄마인 나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글을 읽다가 한 문장에 눈길이 머물렀다.ㅡ 어느 집이나 집안에서 가장 따뜻하고 넓은 거실 공간은 이미 어른들이 점령하였고 그곳에는 사진가에 의해 의도된 가족사진이 놓여있었다ㅡ라고 쓴 부분이다.
복도에 면한 공부방, 작은 아파트에 살 때는 그마저도 누나랑 함께 방을 사용하였으며 그 방은 누가 봐도저보다 먼저 태어난 누나가 주인이었다. 거실이 딸린 커다란 아파트로 이사를 와서도 아이들은 작은 방에, 크고 넓고 밝은 방은 당연히 우리 부부의 방이었다. 집은 구조적으로 그렇게 지어졌고 나뿐 아니라 아파트의 모든 주민들은 누구나 남쪽으로 난 방을 안방으로 정하고 또 그렇게들 살고 있었다.
누구나 그렇게 하니까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것들이 부당하게 보인 걸까? 똑같은 구조로 지은 아파트의 똑같은 방에서 살면서 내 아이는 보편성에 진저리치고 있었던 것 같다. 나이 들면 누구나 결혼을 해야 하는 것조차 공통적인 생활양식으로 보고주저하게 된 게 아닐까?
실제로 최근에 그가 설계한 한 주택은 직각의 벽이 아닌 유연한 원형의 벽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평범을 파괴하고 독특함을 추구하는 것을 개성이라고 한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이 글을 쓴 작가는 참 개성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한낱 독자가 아닌 작가의 엄마로서 말하고 싶었다.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와서 직장에 취직을 하고 연애를 해도 부모는 아쉬움이 남는다.
왜 그게 꼭 결혼 이어야만 하냐고 묻는다면 나도 할 말은 없다.하지만부모가 되어 자식에게 향한 애틋한 감성을느껴보지 않고는 세상을 다 안다고 할 수가 없다.
요즘에는 결혼 적령기라는 말조차 희미해져 버렸지만 부모들은 그래도 자신들이 건강하게 살아 있을 때 자녀들이 가정을 꾸리는 걸 보고 싶어 한다.
이 세상은 The placeOf Positiveness (긍정의 장소)가 너무나 많다.
"에구.. 한 명 더 낳으시지..." 생판 모르는 택시 기사님이 딸 하나만 낳은 너의 누나를 걱정하더란다.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총각은 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고 용감하게 물어보았다지?
가화만사성이라는 가훈을 거실에 버젓이 붙여두고 맨날 술만 마시던 엄마의 외삼촌도 계셨다.
어디서 떠내려 왔는지 모르는 부러진 나뭇가지 위에서 날개를 쉬고 있는갈매기를 본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