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첫 페이지에는 항상 힘든 기억이 있다.
아침부터 '꽃보다 청춘 In 아프리카'에 꽂혀있다. 박보검이 말한다. 비행기를 놓친 추억이 오래 남겠어요, 류준열이 되받는다, 오늘처럼 일출에 안개가 낀 것도 추억에 남을 거야.
두 청년의 속 깊은 대화가 내 맘속에 자리 잡는다.
집 밖은 위험한 요즘, 소슬바람이 불면서 가슴도 서늘해진다. 팬데믹이 발목을 붙잡지만 않았다면 지금쯤 훌쩍 어디론가 떠났을 텐데...,
그동안 여행은 내가 나에게 주는 휴식이고 선물이었다. 요즘엔 갈 수 없으니 더욱 가고 싶은 곳이 많아졌다. 최근에는 오래전에 다녀온 여행지를 떠올리며 여권 없는 추억 여행을 하고 있다.
아주 오래전. 나는 동남아에 있는 나라로 첫 번째 해외여행을 떠났다. 남편의 회사에서 포상휴가로 주어진 부부여행이었다. 어렵게 시어머님께 어린아이 둘을 맡겨놓고 떠난 여행이 맘 편할리 없었다. 거기다가 음식마다 들어있는 야릇한 향료 때문에 고역이었다. 매끼마다 바나나로 억지 다이어트를 하며 여행을 마쳤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여행을 하였지만 매번 생각나는 것은 입에 맞지 않은 향기 때문에 먹지 못한 음식으로 가득했던 첫 번째 여행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르곤 하였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지금까지도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한 것은 그때의 고생스러움이 매운 고추처럼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이다. 여행의 기억 중 달콤하고 편안한 것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더 진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그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은 그것을 극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은 신선한 야채와 고기를 함께 싸서 고소한 땅콩소스에 찍어 먹는 월남쌈을 좋아하고 녹두채를 듬뿍 넣은 쌀국수도 좋아한다. 치앙마이에서 먹어 본 카이소이와 새콤한 쏨땀, 고소한 나시고랭, 카레향과 게살이 어우러진 푸 팟 퐁 커리는 내가 즐겨먹는 요리 중 하나이다. 오히려 요즘에는 내가 왜 그때 그 음식을 먹지 못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음식뿐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여행은 힘든 기억을 먼저 떠오르게 한다.
펜데믹 이전 최근에 마지막으로 한 여행은 네 명의 지인들과 함께 떠난 영국 여행이었다. 각각 개성이 다른 여자들 네 명이 함께 떠난 여행에서 즐거움도 물론 많았지만 좌충우돌 고생도 많았다.
잠드는 시각부터 일어나는 시각, 음식의 취향. 시간을 즐기는 방법이 모두 다른 사람들과 정해진 장소에서 함께 공유하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모습들을 보게 되었다. 여행은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문화를 체험하고 적응하는 게 아니라 바로 오래되어서 굳어진 자신의 모습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몰랐던 각자의 취향에 적응하는 시간을 갖는 일이기도 했다.
여행 후 우리는 전보다 더 돈독해졌다. 참고 인내하는 것보다 상대의 개성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부드럽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흔히 인생을 여행에 비유한다.
매일 새롭고 낯선 길을 찾아 나서는 여행자처럼 우리의 삶 또한 어제와 다른 오늘을 경험하고 있어서 이다.
인생은 다시 갈 수 없는 단 한 번의 여행이라 말한 철학자도 있고 삶을 다하는 날 우리의 소풍이 끝났다고 말한 시인도 있다.
그 말이 맞다. 내가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 보면 나는 지금 긴 여행의 어디쯤에 와 있는 것 같다.
사람마다 겪는 인생도 여행의 종류처럼 각각 다르다.
어린 시절이 부모님을 따라다닌 패키지여행이었다면 부모님 곁을 떠난 사회 초년생 시절은 배낭 하나 메고 자신감 하나로 떠난 무전여행이었다.
가장 험난한 여행이었지만 도회지라는 밀림에서 그래도 함께 한 두 동생들이 있었기에 서로 의지하고 견뎌 낼 수 있었던 게 아니었나 생각한다. 지금도 고생스러운 그 시절이 내 청춘의 첫 장을 장식하는 걸 보면 나는 빈털터리 무전여행을 즐겼던 것 같다.
결혼하여 두 아이들을 키우며 아웅다웅 살면서는 부모로서 가이드 역할이 얼마나 힘든지 두 분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인생여행이었고 아이들이 내 곁을 떠나고 남편과 단둘이 남은 지금에야 비로소 가고 싶을 때 가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자유여행을 하는 기분이다.
자유여행이라고 해서 다 내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 것 같다. 아직도 방향을 잃고 헤매기도 하고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대립이 생기기도 한다. 더러는 건강이 허락해 주지 않을 때가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지나온 인생의 여행길을 추억해보면 나는 언제나 제 자리에 와 있었다.
올 한 해는 뜻하지 않게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황망한 사막에 나 혼자 남겨진 듯한 외로운 여행이다. 개미 쳇바퀴 돌 듯 집 안에서 일출과 일몰을 맞이한다, 그런데도 어제와 다른 하루가 시작되는 걸 보면 이 무료한 일상 또한 지나고 나면 뭔가를 추억하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는 편하게 누군가는 힘들게 하루를 보낸다고 해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 오늘은 아름다운 선물이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일출에 안개가 낀 것도 추억에 남을 거야''
힘들게 올라 간 나미비아 사막의 언덕에서 일출을 보지 못하고 내려오는 두 청년의 대화처럼 매일매일이 힘들어도 여정은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그래...,.
먼 훗날에는 오늘 일출을 보지 못한 실망감보다 어쩌면 안갯속에서 비치는 신비로운 그 빛이 더욱 가슴에 남아있을지도 몰라
여행은 그런 것이니까.
인생도 그렇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