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충만한 삶을 즐기는 것일 진대 나는 무엇 때문에 거절당할까 두려워하고 하고 싶은 일을 훗 날로 미루었던 것일까 "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중에서-
부부에게 서로 맞는 취향이 단 하나만 있어도 그 부부는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다. 다행히 우리 부부는 둘 다 여행을 즐긴다.
교사로 재직하던 남편이 방학을 맞이하면 우리는 여행을 떠났다. 짧은 여행은 언제나 아쉬움을 남겼다. 야금야금 줄어드는 시간이 아까워 새벽 일찍 일어나서 밤늦게 잠들며 여행지에서의 하루를 남보다 길게 늘여 썼다.
그때 약속을 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은퇴 후 주관적인 결정을 내려야 할 시기가 오면 제일 먼저 조금 긴 여행을 떠나자고, 하지만 은퇴자의 삶은 한 여름 매미 소리처럼 지루하기만 했다.
어느 날, TV에서 ‘순례자의 길’이란 프로를 방영하였다. 프랑스 남부 국경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800Km 여정을 걸어서 가는 성지순례였다. 무력한 영혼의 심지에 불이 댕겨지는 느낌이었다. 가슴이 설풋 뛰었다.
문득 가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보고 싶다…
가고 싶다…
갈까?
가자.
결정은 빨랐지만 준비기간은 길었다 ‘남 프랑스’로 여행지가 정해지고 따뜻한 계절인 오월에 떠나기로 날짜를 잡으면서 분주해졌다.
가을과 겨울 동안 꾸준히 여행 준비를 했다. 준비라는 게 단 몇 시간 만에 마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오랜 기간을 요구하는 것도 있다. 여행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을 지키는 일이다. 헬스장에 등록을 하고 운동을 하며 몸을 관리했다.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에 살고 있으므로 뜰 관리나 주변을 고치는 일 등도 미리 해 두어야 한다. 봄이 되면 마치 꽃에 접신한 사람처럼 꽃을 사 들이 곤 했다. 차 트렁크에 봄 꽃들과 고추와. 상추, 토마토 깻잎 등 어린 모종을 가득 싣고 오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어쩌면 여행보다도 더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봄이 되었지만 화단에 꽃을 심지 않았다. 제 때 모종해야 잘 자라는 옥상의 채소 박스도 그냥 빈 채로 놔두었다. 여행은 또 다른 즐거움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날이 풀리자 우린 매일 도서관으로 갔다. 그곳에서 중세시대의 이야기가 담긴 책과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 관련 서적, 근 현대사를 이끈 화가들의 작품집, 프로방스 지역을 여행한 작가들의 기행 수필 등을 수북이 쌓아 놓고 한 계절을 오롯이 보냈다. 공부를 이렇게 열심히 했더라면 우리의 인생이 바뀌어지지 않았을까, 라며 농담을 했지만 이미 우리는 여행을 계획하기 전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다. 여행의 준비를 나름 단단히 했기 때문 인지 40일의 여행기간 동안 하루도 힘들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하루도 행복하지 않았던 적도 없었다.
프로방스에서의 날들은 매일이 맑고 투명했으며 무엇보다도 허둥거리지 않아서 좋았다. 기차를 놓치면 다음 기차를 기다리면 된다. 배짱과 여유라곤 약에 쓸래도 없었던 내가 이곳에서 느긋한 여행가가 되었다.
눈으로 감상하고 사진으로 남기기만으로는 벅찬 감동이 내 감성을 건드렸다. 밤에 숙소로 돌아오면 낮에 본 풍경들을 새김질하여 글을 썼다. 순수하고 거침없는 민낯의 자연과 중세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프로방스의 아름다운 마을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마음속의 각질이 한 꺼풀 벗겨지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고 싶은 일을 훗날로 미루기엔 우리 인생은 너무나 짧다. 여행을 계획하고 떠나는 일이 그랬던 것처럼 글을 책으로 만드는 일도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더는 미루지 않기로 하였다. 누구나 떠나는 여행이지만 아무나 느낄 수 없었던 감동의 편린들을 모아 엮어내려고 한다. 사실은 내 삶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소중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다.
내 가족과 나의 벗들에게, 친지와 독자들에게,
그중에 단 한 명이라도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들의 꿈에 기꺼이 동행이 되어주고 싶다.
여행을 하면서 매일 설레었듯이 나는 지금 다시 설레고 있다.
김정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