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대학생인 딸아이와 함께 유럽 배낭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이곳 파리에 왔을 때는 조금 후면 동이 트는 새벽녘이었다. 영국에서 출발한 저가 항공기는 연착을 거듭하더니 뒤늦게야 출발하여 밤중에 드골 공항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버스마저 끊길 것 같은 불안감에 시내로 향하는 버스에 무작정 올라타고 내린 곳이 바로 개선문 앞이었다. 육중하게 버티고 서 있는 개선문을 바라보며 황망했던 기억이 난다.
낯선 나라에서 보호 본능으로 가득 찬 엄마의 눈으로 바라본 개선문과 지금 남편과 함께 바라보는 개선문은 너무나 다르다. 누군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호텔 창문 밖으로 바라보이는 개선문과는 15년 만의 재회였다.
우린 이곳에서 일주일을 머물며 파리 북쪽 노르망디 지역과 근교 도시를 여행할 예정이다. 파리가 여행의 시작점이다. 호텔은 작지만 깔끔하였다. 혼자서는 들기 힘들 만큼 무거운 트렁크 무게를 생각하면 무엇보다도 오래된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건물은 중세의 옷을 걸치고 있는데 내부는 현대식으로 꾸며져 있다.
이곳 시간으로 맞춰 놓은 시계는 밤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는데도 밖은 아직도 여전히 밝다. 서머타임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해가 지지 않을 줄은 몰랐다.
바로 조금 전까지 국적기 안에서 비빔밥을 먹고 곧바로 한인 택시로 호텔까지 왔으니 아직 우리나라의 온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호텔 로비를 나서자마자 거짓말처럼 내 앞에 서있는 개선문을 보자 비로소 내가 파리에 와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끝까지 버틸 줄 알았던 해가 서서히 지기 시작하면서 웅장한 개선문이 마치 야외무대처럼 화려하게 변했다. 네 기둥에 빔을 쏘아 다양한 빛의 옷을 입고 있는 석조문은 밤에는 위엄이 사라지고 몽환적인 아름다움만 남는다.
개선문 주변은 각 나라에서 온 여행객들로 붐비고 있다. 머리에 터빈을 두른 사람과 히잡을 쓴 여인, 검정 수단을 입은 아랍인, 아시아인, 유럽인들을 한꺼번에 모아놓은 이곳에서는 여러 나라의 언어들이 뒤섞여 들렸다. 내 귀에 들리는 언어만 해도 다양하다. 바로 곁에 있는 사람에게도 큰소리로 말하는 중국인. 조용하다고 알고 있는 일본 샤람도 흥분한 목소리는 제법 크게 들렸다. 영어와. 프랑스어, 한국어도 들린다. 이 소란스러운 틈바귀에서도 상대에게 소리가 전달되는 걸 보면 참 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선문이 완성되는 걸 보지 못하고 나폴레옹은 생을 마감했다. 우리는 그가 통과해 보지 못한 문을 여유를 부리며 걷다가 전망대로 올라갔다. 에투알 광장을 중심으로 파리 시내로 쭉쭉 뻗은 길이 시원스럽게 뚫려있다. 그 모습이 마치 별과 같다고 해서 이곳을 에투알 광장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곳에서 바라본 나의 눈엔 에투알(별)보다는 정교하게 짜인 거미줄처럼 보였다. 밤에 본 파리는 거미줄 안에서 무수히 반짝였다.
열두 개의 길을 한 바퀴 걸어 보면 어떨까? 숙소가 코 앞에 있으니 밤이 깊어도 위험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개선문 산책을 시작했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자동차들이 다니는 로터리가 형성되어 있어서 길과 길 사이가 생각처럼 가까운 것은 아니었다. 가로공원을 끼고 걷다가 신호등을 건너면 길 하나가 나오고 때론 지하도를 건너기도 하고 샛길로 돌아 큰길로 들어서기도 했다.
대로 사이에 에 있는 골목길을 걷기도 했다. 좁은 길 가에 주차해 놓은 자동차들이 서로 입을 맞추듯 붙어 있는 모습이 재미있다. 불이 켜진 창문으로 집안의 모습이 언뜻언뜻 보였다. 식탁 앞에 모여 앉은 식구들과 Tv의 불빛,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 달그락거리는 그릇소리도 들린다. 파리 시민들의 일상적인 생활을 보면서 내가 살고 있는 골목 풍경과 별 차이 없음을 느꼈다.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나 다 똑같다는 걸 여행 첫날에 느끼는 건 부정출발이다.
여행 중에 밤마실을 하기란 쉽지 않다. 혹시나 있을 사고에 대비해서인지 단체여행의 인솔자는 일몰 후의 호텔 밖 출입을 단속했었다. 지금 우리는 그동안 못 해본 야간 산책을 원 없이 하고 있는 중이다. 열두 개의 길을 한가닥씩 찾아가며 거미처럼 열심히 집을 짓고 있다.
열두 개의 길에서 바라본 개선문은 방향에 따라 모두 다른 각도의 모습으로 서 있다. 개선문을 정면으로 곧게 뚫린 샹젤리제 거리를 제외하고는 모든 길이 조용하다. 인적이 드문 지하도에서 길 위로 올라섰을 때 개선문이 보이면 이내 안심이 되었다. 개선문이 그곳에 있는 한 우리는 길을 잃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산책하듯 여유롭게 걸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발걸음이 빨라졌다. 열두 개의 거리를 다 지났을 때는 둘 다 녹초가 되었다. 출발선에서 방금 달리기 시작한 마라톤 선수가 초반에 너무 속력을 낸 것 같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진해서 힘들게 치른 신고식이다.
남편의 발등엔 슬리퍼 자국이 선명하고 나는 지친 한 마리 거미처럼 네 발로 기어 호텔로 돌아왔다.